“아빠, 잘 지내고 계시죠? 네? 집으로 올 편지가 없을 텐데요..? 네네, 그럼 주말에 갈게요.”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아빠와 통화를 한다. 엄마와는 거의 매일 해서 어색함도 없고 종종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지만 아빠에게는 나도 모르게 여전히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아빠와 불편하거나 거리가 먼 사이는 아니다. 그냥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부모와의 이런 어색함이 종의 보존의 법칙 차원에서 보면 독립과 번식을 위한 거리두기라도고 하는 것 같던데.. 아무튼 우리 가족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을 꼭 같다. 분명 이틀 전에 아빠와 통화를 했는데 대뜸 전화를 하시더니 나에게 편지가 왔단다. 단 번에 승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편지도 받을 겸 금요일 저녁에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승희가 자취방으로 보낸 편지도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새로웠는데 집에 내게 온 편지가 있다고 하시니 다시 학창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런 미묘한 어린 시절의 기분과 함께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승희의 편지로부터 시작된 마법처럼 설레는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편지가 날 들뜨게 만들기 시작했다. 승희 덕분에 괌에서 얻은 학창 시절의 에너지는 해가 갈수록 시니컬해지던 나를 다시 과거의 긍정왕으로 변화시키는 중이다. 길가에 종종 보이는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 전 행동을 멈추고 고치를 만들어 스스로 변태와 탈피의 과정을 거친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애벌레는 나비가 되는 변태과정 중 애벌레 자신 내부의 모든 기관을 믹스하듯 모조리 섞은 뒤에 각자의 종에 맞는 나비의 형태를 갖춘다. 쉽게 말하면, 껍질만 그대로 둔 채 내부의 모든 장기와 뇌, 뼈를 통째로 갈아서 완전히 새로운 기관과 겉모습을 가진 새로운 생명체로 탈바꿈한다는 말이다.
이를 처음 알았을 댄 경악했었는데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렇다. 이십 대의 청초한 감성은 죽 쒀서 개나 줬는지 이미 썩어 문드러졌고 그토록 높던 자존감은 실오라기 하나 없이 발가벗겨져 사회로부터 조롱당하다 버섯처럼 피어난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마음이 곰팡이처럼 번지며 수백의 군락을 이루어 그마저 남아있던 순수의 언덕으로 점차 영역을 넓히던 중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큰 맘 먹고 마치, 냉장고 속 수개월 묵은 반찬과 유통기한이 수년이나 지난 음식물을 모두 끄집어내 음식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듯 가슴 속을 정화하고나니, 공장에서 방금나온 공산품처럼 말끔해졌다. 막다른 길이라고 여겼던 막연한 사회생활은 갑자기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던 십 대 후반의 열정으로 도치되었고 답답한 마음으로 꽉 막힌 가슴은 푸른빛 설렘이라는 거대한 선풍기로 머릿속의 안개를 모두 불어 날려버렸다.
나를 이렇게 삶의 코너로 몰고 간 건 시간일까 나의 선택일까.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 모든 결과물은 나의 선택에 달린 것 같지만 나를, 우리를 선택으로 이끄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그중 가장 강력한 요인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전 인류가 합의한 숫자에 불과하지만 숫자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하다. 특히,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시점에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이십 대가 될 때는 약간 시원섭섭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십 대가 아니라는 점이 아쉬움과 동시에 성인이 되어 선택의 자유와 폭이 더 넓어진 점이 반가웠다. 하지만 그만큼 큰 책임감과 더 많은 고민이 수반된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고 삶의 첫 계단은 고통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십 대에서 이십 대,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삼십 대에서 사십 대 그리고 오십 대, 육십 대.. 이런 세대의 구분도 1초 만에 이루어진다. 가령, 서른아홉 살이던 사람은 1초 전까지는 2030 세대로 묶여 여전히 젊은 트렌드를 이끄는 세대의 일원이었다가 1초 후에는 4050이 되어 기성세대로 편입되며 어제의 친구들이었던 2030 세대 젊은이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처지에 놓인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속한 4050세대의 누군가는 그해 12월 31일 23시 59분 59초 후 그다음 해에 육십 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건 마치, 아득한 미래의 것인 줄 알았던 나의 노년을 바로 코앞에 가져다 놓고 ‘이것 봐, 금방이지?’라고 하고는 한바탕 크게 웃어젖히는 도깨비 장난같다. 이 찰나의 변화가 젊음을 중년으로 바꾸어버리니 뭔가 좀 억울하다. 나는 이제 막 서른이 되었는데 십 년 뒤 사십 대가 되었을 때를 상상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게 생각하니 단 하루도 축축하게 젖은 채 바닥에 널브러지고 처진 그물망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을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아빠는 날 기쁘게 반겼고 오랜만에 진수성찬을 차린 엄마는 피곤해 보였지만 우리 강아지 고생이 많다며 엉덩이를 퉁퉁하고 두들겨주셨다. 어릴 땐 통통이었는데 서른이 되니 퉁퉁 소리가 난다. 엄마의 애정 어린 손짓에 갑자기 아이가 된 기분이다. 쑥스럽지만 기분은 좋다. 부모님 앞에서 자식은 언제나 아이가 아닌가. 이렇게 마구마구 비벼댈 수 있는 큰 언덕이 두 곳이나 든든하게 계셔주시니 갑자기 힘이 솟는다. 겨우 회사를 다니며 나 하나 먹여 살리는 주제에 세상의 짐을 혼자 다 진 것처럼 예민 왕이 되어 까칠하게 굴었던 불과 일이 주 전의 내가 너무나도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런데 동시에 그런 착각 속에 사는 것도 이 나이니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모든 걸 한 번에 깨우칠 순 없다. 그래서 삶에는 고통도 있고 회복도 있으며 아픔도 있지만 행복도 있나 보다.
“편지, 방 책상에 뒀다. 친구가 보낸 것 같던데.”
나는 다시 설레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내 방으로 달려갔다. 지난번과는 다른 보라색 편지 봉투 (지난 편지는 파스텔톤 분홍이었다)가 마치 롤플레잉 게임의 보스를 처치한 뒤에 받은 희귀 아이템처럼 내 책상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문자 메시지가 오는 소리가 침대 위에서 두어 번 울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편지는 가벼웠지만 그 안에서 내게 던져줄 메시지는 가볍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이번에는 또 어떤 메시지가 있을지 궁금증이 머릿속에 가득 차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아직 봉투를 뜯기 전이지만 저번 편지와 가장 큰 차이점은 편지지 외에 다른 물건은 없다는 점이었다. 커터칼로 가장 자리를 반듯하게 잘라냈다. 승희의 편지라서 더욱 함부로 뜯고 싶지 않았다. 심장박동은 이미 내 가슴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록 격렬하게 뛰었다. 어쩌면 이대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두려움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무려 승희의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드디어 승희가 내게 남긴 또 다른 편지를 확인하기 위해 편지지를 꺼내 펼쳤다.
“세븐 바, 동쪽의 밤하늘. 이 시기의 학교 운동장은 우리가 꿈꾸던 대우주를 탐험하기에 딱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