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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도루묵 위원회

만장일치로 무기한 연기

by 세상 사람


일전에 밤산책 클럽 나갔다가 재미있는 소모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름하여 ‘도루묵 위원회’. 기껏 산책을 마치고 선술집이나 치킨집에 들어가서 야식을 먹는 모임이다. 집밥 살롱에서 식사를 양껏 못한 사람이나, 산책했더니 배가 다 꺼진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는. 집밥도 도루묵 되고 운동도 도루묵 되는 그런 위원회이다.


그날 저녁밥이 부족했는지, 불광천 변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갖가지 메뉴를 상상하며 갈등했다. 먹을까, 말까. 운동해서 입맛이 도는 거니 좀 요기해도 괜찮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신통한 아이디어 제시에도 불구하고 클럽 회원(내 여러 자아) 중 누구도 선뜻 참여 의사를 밝히지 않아 얌전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달밤에 혼자 편히 갈 단골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날이면 옛 생각이 난다. 바를 운영하는 동네 친구가 있던 시절. 그곳에 가면 반갑게 맞아 주는 친구와 고양이가, 따로 약속 없이 마주치는 지인이, 그리고 어쩌면 친구가 될지도 모를 낯선 사람들이 늘 있었다. 퇴근길에 들르고, 심심하면 찾아가고, 아무 밤에라도 무작정 발길을 향할 수 있는 곳. 아직 그 동네에 살고 그 가게가 있었다면,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에서 도루묵 위원회를 열었을 텐데.


그때의 친구들은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져 산다. 그 시절 참새 방앗간 들르듯 친구 가게에 출석하던 나는 이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집콕요정. 약속 없이 누군가를 만날 일은 더더욱 없고, 어쩌면 남남이 되어 가는 익숙한 듯 낯선 이름들을 하루하루 잊으며 지낸다. 한때는 이렇게 변해서는 안 되고, 내가 단단히 잘못 살고 있으며, 반드시 회복해서 전처럼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안 그래도 되겠다’ 싶었다.


‘회복’이라는 말도 맞지 않다. 엄밀히 따져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나는 그리 사교적인 아이가 아니었다. 보통 나는 그냥 누군가에게 맡겼다. ‘맡기다’라는 동사를 썼다고 해서 내 의지가 확고했거나 그 방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내가 잘 못하는 영역이니까 상대에게 ‘의지했다’라고 부연할 수 있을 것 같다. 관계에 있어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예외는 있지만, 인생을 통틀어 손에 꼽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대상이 없을 뿐이다. 별 노력 없이도 에너지가 발산되던 시기는 지났고,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 고장 난 것도 아니요, 비정상도 아니다.


고립 생활을 이어 가고 싶다는 얘기도 아니다. 요즘 어떤 면에서는 전에 없이 나를 둘러싼 이 사회와 대화하고 싶다. 단지 실시간으로 말고. 최소한으로. 욕심내지 않고. 많이 들으면서. 사람들 하는 것 나도 다 해야 하는 것처럼 쫓지 않고. 피상적으로 말고. 멀찌감치에서. 느리게. 그런 대화를 하고 싶다.


혼자 있는 시간을 기록하는 것도 대화의 시도다. 그 왜, 인간관계가 힘들다는 고민에 대한 유명인의 상담이라든지, 아니면 이 주제에 관한 책을 보면 자주 나오는 이런 말에 김이 빠져 버리곤 했는데,


“소수의 소중한 사람에게만 그 에너지를 쓰세요.”라는 말.


맞는 말이긴 해도, 온통 마음이 혼자일 때 그런 걸 보면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지금 나에게는 소수의 소중한 사람조차 없다’라는 현실이 부각되어 더 소외감이 느껴졌다. 여기서 마음이 혼자라는 건 물리적으로 명백한 혈혈단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나 연인이 있더라도 심적으로 혼자인 경우를 말한다. 하필 그 소중한 사람과 싸웠을 수도 있고, 그들과 나눌 수 없는 사정도 있을 수 있으며, 그 사람들 때문에 힘들 때는 정말이지 기댈 데도 없고 더 혼자 같지 않던가.


종종 그런 상황에 맞게 ‘그 에너지를 쓸 소중한 사람이 나 자신이어도 된다’ 유의 글도 본다. 그러면 글쓴이에게 고마웠다. 이 사람도 혼자여 봤나 보다, 하고 공감받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 1인 클럽 시리즈도 가급적 혼자인 부분만 써 보려고 했다.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비우고 나를 대접하고 내 생각을 꺼내 보는, 그런 과정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대화였다. 그래서 다른 회원도 가입시킨다든지, 지역으로 뻗어 나가고, 급기야 전국구 연합이 되고…. 그럴 의도가 없다(그럴 자신도 물론 없다). 내가 바라는 성장은 그쪽이 아니다. 그냥 이대로 혼자서, 혼자인 시간에 혼자 노는 방향이다. 어떤 날은 누군가와 함께 놀 수도 있겠지만.


예전처럼 술도 안 마시겠다, 괜히 밤산책 클럽 끝나는 시각에 야식 먹을 생각은 말아야겠다. 슬그머니 들어가 시간 보낼 장소도 마땅찮고, 그 시간에 먹으면 다음 날 후회할 것도 불 보듯 뻔하고.


이로써 도루묵 위원회 발족은, 만장일치로 무기한 연기하기로 한다. 하, 재치 있는 모임명을 못 써먹네. 약간 아쉽긴 하다.


Seine



사진은 불광천에서 마주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망가기 바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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