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아픔 따돌리며
아침에 헐레벌떡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맥모닝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 10시 16분에 출발하고 십 분 만에 도착해, 무사히 주문까지 마쳤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이었다. 지난밤 발행을 예약해 둔 연재 브런치북 “클럽이라고 불러 줘” 글 한 편이 무사히 올라가 있었다. 맥모닝을 놓치면 다른 카페로 가도 되지만, 시간 제약 없이는 또 뭉그적대다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올 여지가 다분했다. 집과는 애증의 관계다.
소셜미디어만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 줄 알았더니, 브런치스토리도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다. 좀 더 긴 글을 느리게 쓰고 교류가 활발하지 않을 뿐. 온라인에 공개해 불특정한 사람들의 ‘좋아요’를 기다리게 되는 건 다르지가 않다. 반응 신경 쓰고 싶지 않다면서 나도 모르게 중독돼 있다.
연재 브런치북이 부여하는 규율성에는 만족한다. 오늘도 출근 시간 지키려는 사람처럼 맥도널드로 달려와, 올라간 글 확인하고 다음 화에 사용할 이미지까지 착착 골라 놓았다. 한 손으로는 그 일들을 하면서, 소시지 맥머핀과 드립커피를 조금 급하게 먹었다.
연재 관련 점검을 일단락하자 긴장이 풀리며 배가 찌릿찌릿 쑤셔 왔다. 또 아프다니, 문제다. 집에 가서 물주머니에 끓인 물 부어 배에 대고 눕고만 싶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출근한 나’잖아. 멋대로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커피 다 마시면 도서관으로 가는 게 내 다음 스케줄인걸.
배를 잡고 통증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다가 걸으면 조금 나을까 싶어 가방을 챙겨서 나왔다.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 들르고, 아직 스르르 아픈 배를 달래며 서가를 향했다. 속으로 ‘배 너, 언제까지 아플 거야?’ 하면서 어떤 책이라도 좋으니 내 주의를 좀 앗아가 달라며 눈에 힘을 주었다. 문학 쪽을 서성이다 에세이 구역 앞에 서서 5단에 걸친 도서의 책등을 다 훑었다. 이런 제목의 책들이 세상에 나오는구나, 하면서. 몇 권 펼쳐 봤지만, 마음을 빼앗은 책은 없었다. 위장 경직이 덜 풀린 탓도 있다. 1층으로 내려가 ‘새로 들어온 도서’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 갈 때마다 그쪽은 한 번씩 살핀다. 작은 공간에 다양한 책이 모여 있으니 어느 한 분야에 치중하지 않고 둘러볼 수 있어서 좋다.
오늘은 거기서 “숲을 읽는 사람”이라는 책을 골랐다. ‘식물분류학자가 채집한 초록의 목소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무엇보다 거대한 수림 가운데서 고요히 숲을 들여다보는 듯한 한 사람이 그려진 표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잠깐 펼쳐 본 페이지의 문장으로부터 전해지는 느낌 또한 그 그림처럼, 세상이 뭐라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의 이야기 같아 더 읽고 싶어졌다. 조경기능사 준비 때부터 여전히 식물 분야에 머물러 있는 나의 관심사. 손에 초록색을 들고 있자니 이제 배도 다 나은 것 같고.
집에 있었다면 분명 뜨거운 물주머니를 끌어안고 복통에 그대로 졌을 텐데, 밖에 있으니 어떻게든 통증을 굴복시킨 듯하다. 결국 사그라들 증상이었더라도 이긴 기분은 만끽해야지. 지난 전주 여행이 떠오른다. ‘아파도 참기’와는 다른 ‘아픔 따돌리기’ 전법을 그때도 썼다.
복통으로 현지 내과 투어까지 해야 했던 전주 여행에서 소소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과거 매일 비슷한 일과를 반복하던 때(=은둔생활 시절), 그래서는 안 되지만 아픔을 반가워(?)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내가 무의식중에 아픔을, 일상을 벗어난 새로운 ‘액티비티’쯤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을까. 그런 자각이 들어 살짝 충격이었다. 언제부턴가 심지어 나는 병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통증 덕에 어쨌든 집 밖으로 나가고, 평소 만나지 않던 사람(의료진)을 대면하여 얘기도 나누니 말이다. 그런데 낯선 고장으로 떠난 여행에서는 그 아픔을 어떻게든 이겨내려 온 힘을 쏟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통증 때문에 ‘진짜로 새로운 액티비티’를 못하는 게 너무너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이제 슬슬 모임 시간이 다가온다. 오늘은 화요일이지만, 금요일 예정이던 독서회를 당겨 열 참이다. 참여 인원 모두 일정 변경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야 이 독서회는, 나만의 1인 클럽이니까.
Seine
사진은 오늘 고른 책, 허태임 “숲을 읽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