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산책 클럽 불참 경위서
시계를 보니 오후 5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고, 아직 머리가 완전히 맑지는 않았다. 건강검진 직후 방문한 카페 영수증에 오전 10시 31분이 찍혔으니. 수면내시경 검사가 끝난 이래 거의 일곱 시간을 향해 가는 시점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 조금 헤엄치다 행방을 잊는 ‘도리(Dory, “니모를 찾아서” 캐릭터)’로 온종일을 보낸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그 사이가 아예 ‘블랙아웃’인 것은 아니다. 굵직하게 무슨 일들을 했는지는 안다. 검사 이후 잠에서 깼고, 머리맡에 있던 호출 벨을 눌렀다. 그리고 잠깐 기억이 없는데, 아마 그대로 일어나 탈의실로 가서 환복하지 않았을까? 그 부분이 거짓말처럼 툭 끊겼다.
그다음에는 접수창구 앞에서 ‘저쪽 진료실로 들어가라’는 말을 들은 듯한데, 어느덧 나는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다. 내시경 검사를 한 의사분이 나의 위 내부 사진을 화면에 띄우고 설명해 주는 장면이 이어진다.
“파도가 치는 모래사장처럼, 경계가 흐릿해요.”
“이제 예전하고는 다르죠, 예전 같을 순 없어요.”
“약을 계속 드세요, 비타민 먹듯이.”
의사 선생님의 이 세 문장만 각인되듯 띄엄띄엄 남았고, 중간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헛소리하지는 않았는지, 희미하기만 하다. 배가 자꾸 아파서 잘 먹지 못한다는 하소연을 한 것도 같은데, 설마 술주정 톤은 아니었을지. 필름 끊긴 사람처럼 불안하다. 어지러워하는 나에게 여기 앉아 있다가 가라고 말하는 간호사분의 목소리. 그걸 끝으로 병원 씬은 끝이다.
사물함에 넣었던 가방과 핸드폰이 내 손에 들려 있고, 외투까지 잘 입고 있는데 이렇게 생각이 안 날 수 있다니. 처방전 받은 기억은 있는데,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는 길이나 약국에 들어간 기억은 전혀 없다. 어느덧 카페 의자에 앉아 있고, 가방 속에 처방 약 열흘 치가 담긴 약 봉투가 들어 있었다.
전날 밤 여덟 시부터 금식해서 배가 고팠을 법하다. 카페에서는 따뜻한 두유 라테와 닭가슴살샌드위치를, 먹은 모양이지? 메뉴는 영수증을 확인하고 알았다. 다 먹은 후 어느 순간 너무 졸려 테이블에 엎드렸다가, 할 일이 생각나 일어났다. Just keep swimming, just keep swimming…. 다음 일정으로 계속 헤엄쳐.
그날 오후 알아볼 것과 처리할 일 몇 가지가 있었다. 휴대폰 너머의 상대에게 몰랐던 부분을 물은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기록을 보니 통화를 세 번이나 했다. 또 걱정된다. 진상 톤은 아니었겠지.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면 어쩌지. 문의하고 받은 답변은 다행히 달력 앱에 기록해 둬서, 다시 전화할 필요는 없었다.
통화가 끝나고 시계를 봤을 때가 오후 2시 남짓. 여전히 몽롱했으나 앉아서 쉬면서 뭔가를 계속했다. 비록 그 ‘뭔가’는 기억에 저장되지 않았지만. 두 시간쯤 지나 우체국으로 갔다는 사실은, 4시 41분 등기 우편료 결제내역으로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이후 집 근처까지 걸어오는데 건물 벽을 덮은 담쟁이덩굴이 눈에 들어와 문득 멈춰 섰다. 온통 빨갛게 단풍이 들어 있었다. 가을이구나. 사진을 이리 찍고 저리 찍다 보니 오후 5시. 그제야 얼른 드러누워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불규칙한 점선으로 뚝뚝 끊어진 하루가 자못 불쾌하고, 선득했다.
집에 올라오며 이 이야기를 스레드에 적었다. 이런 일들을 ‘했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가 가려진 상태. 저장된 것들이 죄 압축파일이라 파일명을 단서 삼아 추측하는 느낌. 마침, 그 글에 한 스친이 스릴러를 연상시키는 댓글을 달았고, 이어 나는 영화 “메멘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종일 겪은 게 전향성 기억상실의 모습이로구나. 주인공 레너드 셸비와 달리 수면 약제로 인한 일시적 증상이긴 해도 말이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산책으로 마무리하려던 계획은, 그래서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그날의 밤산책 클럽 불참 경위서다.
기억해. 다음부터 수면내시경 한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 곧장 와서 잠을 잘 것. ‘나 멀쩡해’라는 자아의 거짓말을 믿지 말 것.
Seine
사진은 오후 5시경 발견한 붉게 물든 담쟁이덩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