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MOI), 미션 컴플리트
아침에 일찍 눈을 뜨고도 좀 더 잘까 미적거렸다. 불과 하루이틀 전, 브런치스토리에서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 광고를 봤지만, 사전 신청이 마감된 뒤였다. 뭐든 미리 준비하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당일 현장에서 참가하기가 내심 석연찮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로에 자주 갔다. 살던 동네에서는 4호선을 타고 강을 건너야 해서 가깝지 않았는데도, 충무로, 동대문, 혜화 쪽으로 잘 놀러 다녔다. 20대를 미국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그쪽에 단골 바가 생기면서 한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었다. 그때 농담으로 엄마께, 갑자기 내가 연락 안 되면 어떻게 할 건지 물으니, “너? 대학로 가서 찾아봐야지.” 하실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버스 타고 가다가도 대학로를 지날 때면 그 시절의 정서가 잠깐 마음속에 포개진다. 알록달록하고 달큼하던, 봄바람 같은 날들.
샤워를 하고 나와 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차렸다. 백일장이 10시 시작이니까 바로 출발하면 늦지 않을 시각이었다. 노트와 볼펜, 아이패드와 충전기를 싸 들고서 대학로로 출발했다. 그래, 오늘 MOI 미션은 백일장이야.
10시 남짓 도착하니 접수처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쪽 무대에서 공식 행사가 시작됐는지, 사회자는 글제를 발표하는 중이었다. 일찍 올 걸. 물들어 가는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해가 비추고, 날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시, 산문, 아동문학 중에 산문을 골라 접수했다. 2시까지 제출이니 쓸 시간은 세 시간 반 정도 남아 있었다. 200자 원고지 20매 이내로 분량이 정해져 있었는데, 나는 2천 자 정도만 써야지 마음먹었다. 그날 주어진 글제로, 낯선 장소에서, 시간제한을 두고 글을 써 보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한 것이었다.
공원의 빈자리에는 은근히 해가 들어서, 실내 글쓰기 장소 중 ‘예술가의 집’으로 갔다. 예전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파견지원 사업에 참여했을 때였나, 들어가 본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마로니에 공원에서 기업과 예술인이 만나는 행사가 열렸다.
예술인의 집 세미나실은 벌써 백일장 참가자들로 거의 차 있었는데, 다행히 한 자리가 나서 앉았다. 주어진 네 개의 글제—삐에로, 달콤, 안경, 쓰레기—를 노트에 차례로 적고 이리저리 에피소드를 연결해 보았다. 삐에로나 안경으로는 전혀 떠오르는 게 없어서 마지막까지 달콤과 쓰레기를 두고 고심했다.
그러다 옛 일화 중에 쓰고 싶은 이야기 하나가 마침 ‘쓰레기’와 맞아떨어졌다. 글제를 더 잘 표현해 보려고 문장을 썼다 지웠다, 더했다 뺐다 하면서 글을 써 나가는데, 시간이 그야말로 휙휙 지나갔다. 1시쯤 되어 원고지에 옮기기 시작. 제목이나 이름, 부호를 어떻게 쓰더라. 마지막으로 원고지 사용한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세미나실에 있던 다른 참가자들이 한 명씩 자리를 떠나고, 1시 55분까지 서너 명만 남아 손에 불이 나도록 원고지를 채워 나갔다. 초반에 또박또박 쓴다고 너무 늑장을 부렸나 보다. 차분히 읽어 볼 겨를도 없이 겨우 내용을 다 옮겼다.
접수처로 나가자, 원고지를 쥔 사람들이 공터를 꽉 채우고 있었다. 어떤 분은 줄을 선 채 남은 원고를 옮기기도 하고, 아예 땅바닥에 앉아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는 분도 있었다. 그리고 행사 사진을 찍는 듯한 사진사 한 분은 함께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열정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오후 2시. 원고를 무사히 제출했다. 오늘 MOI의 임무 완수. 2시 반부터는 김애란 작가님의 강연이 있다고 해서 30분 내로 요기해야 했다(주최 측에서 간식을 나눠 준 모양인데, 참가자 모두에게 준 것은 아닌 듯). 글 쓰는 동안에도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옆 사람에게 방해될까 걱정한 터라 컵라면이라도 먹으러 편의점을 찾았다.
물 부은 사발면이 익기를 기다리면서 역시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조금 엉망으로 글을 쓴 것이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서너 시간 숨죽이고 온 정성을 기울이던 사람들, 그 사이에 앉아 있는 게 나는 좋았다.
정해진 한 시간이 짧게 느껴졌던 김애란 작가님의 강연을 다 본 후, 다시 공원으로 나갔다. 무대에서는 재즈팀의 공연이 이어졌다. 중간쯤에서 한참 리듬을 맞추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데, 또 하나 떠오르는 기억. 나도 저 무대에서 공연한 적 있지, 참. 리허설 때 마이크를 앞에 두고, 객석이 나오게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었다.
저녁 일정이 있어 시상식 전에 일어나 혜화역으로 향했다. 오늘 하루를 꼬박 대학로에서 보냈구나. 2025년 10월 29일, 대학로에 기억 하나를 더 심은 기분이다. 반짝반짝하고 그윽한, 가을볕 같은 날.
Seine
첫머리 사진은 감나무가 드리워진 예술가의 집 입구.
* MOI는 저의 1인 글쓰기 모임 별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