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 살롱 지역음식 체험 - 전주
일어나려던 시간보다 일찍 눈을 떴다. ‘마지막 날이다!‘ 하며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이 호텔은 조식 후기가 괜찮길래 어제 체크인하며 예약해 두었다. 7시 남짓 레스토랑으로 내려가니 아니나 다를까, 어젯밤 소란의 주인공이던 단체 투숙객 역시 조식을 먹으러들 와 있었다.
평온한 호캉스 계획은 진즉에 무산됐지만, 전주에서 세계 각국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경험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위장염이 나은 것 같다. 이곳 뷔페에는 비빔밥 코너도 있으니, [집밥 살롱 지역음식 탐방 - 전주] 편을 이어 가 보자. 잘 먹겠습니다!
천천히 한 접시씩 골고루 음식을 담아 왔다. 대식가가 아니면서 뷔페를 즐기는 이유는, 내 마음대로 접시를 꾸밀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요리할 때도 늘 차림새에 공을 들인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이유에서뿐 아니라, 재미있으니까. 색깔, 질감, 재료 크기, 식감과 맛의 조화를 두루두루 염두에 두며 차리는 재미.
예전에 음식 에세이 “하루치의 용기” 연재할 때도 쓴 적이 있는데, 나는 그다지 먹성 좋거나 요리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요리에서 좋아하는 부분은 재료가 변모하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과 내 손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점.
먹다 보니 세 접시를 비웠다. 작은 유기그릇에 색색의 나물을 담고 나름의 비빔밥 만들기 체험도 마쳤다. 느긋하게 두 끼를 미리 채웠으니 마지막 일정을 시작하자.
도서관 몇 군데를 더 볼 수 있을까. 부슬비를 맞으며 가까운 동문헌책도서관으로 향했다. 세 번째 탐방을 오니, 어제의 두 곳에 이어 각 도서관이 살려 놓은 테마 간의 차이가 더 뚜렷해진다.
처음 금요독서회 만들 때의 회칙은 ‘달에 한 번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만나기‘였다. 이번 여행에서 도서관의 매력에 더 빠지면서, 앞으로는 도서관 중심으로 독서회를 꾸려 볼까 싶다. 동네에서 가는 곳은 테마가 따로 없는 종합 도서관이지만, 이곳저곳 다니며 각자의 색깔을 발견하는 맛도 있지 않을까.
동문헌책도서관은 다양한 책을 두루 갖췄고, 정갈한 분위기에 테이블도 널찍해 독서와 작업에 모두 좋아 보였다. 나 역시 한쪽에 앉아 아이패드를 열고, 빗속을 걸어오는 동안 머릿속을 떠돌던 상념을 적어 내려갔다.
한바탕 글을 쏟으니 개운했다. 다시금 구석구석 돌아본 후, 책을 골라 자리로 돌아왔다.
마지막 한두 편이 가물가물했던 하루키의 “반딧불이”, ‘이동진의 파이아키아‘를 틀어 놨다가 들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고르고 나자 첫 번째 책에 그려진 보라색 병과 황색 뚜껑, 두 번째 책 표지의 보라색 톤 일러스트레이션에 어울리려면 노란색 표지의 책이 필요했다(네. 저는 이런 이유로 다음 책을 고르곤 한답니다). 마지막은 이 요건을 충족시키며 관심 분야이기도 한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을 뽑았다.
세 권에서 궁금한 부분을 발췌독했다. 서울 돌아가면 다시 찾아 읽어야지. 특히 “물고기…“는 서문 흡입력이 훌륭했다. 평소 서문 읽기 팬이 아닌데, 이렇게 내 선입견을 뒤집는 책들도 있다. 그러다 불현듯, 돌아갈 차표가 너무 촉박한 것 아닌가 하는 긴박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지.
한옥마을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 여행에서 줄곧 느끼지만, 두 눈으로 보기까지 모른다. 그곳이 어떤지. 영상으로, 블로그로 아무리 다 봤어도 말이다. 나 역시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집에 콕 박힌 채 되뇐 ‘새로울 게 없다’라는 생각은 얼마나 오만했던지.
이동하며 가로지른 좁은 골목에서 출처 모를 소똥 냄새가 났다. 더불어 장작 태우는 연기 냄새도. 농가가 아닌데 내 착각인가? 하지만 그 덕에 어린 시절이 소환됐다. 여름방학, 시골 할머니 댁에 갈 때면 마을 어귀에서부터 나던 냄새. 나도 모르게 그때 기억을 열람했다. 일상에서 떠올리는 추억 감상과는 사뭇 다른 색채였다.
결국, 한옥마을도서관에 도착해 처음 한 일은 기차표를 미룬 것이다(‘전주에서 기차표 미루며’ 편에 썼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계획 빼면 시체인 나에게 이토록 즉흥적인 결정을 하게 한 도시, 전주. 다른 도서관을 방문할 시간은 안 되지만, 작별의 시간을 좀 더 차분히 가질 수 있게 됐다.
여기서도 몇 권을 고르고, 그중 “우정 그림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나중에 친구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다. 이렇게 1인 클럽만 하는 나도 친구가 있긴 있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도서관을 나서 한옥마을을 걷는데 금요일이라서 그런가, 거리에 생기가 넘친다. 아니면 기분 탓일까? 마지막 날인데 왜 이제야 보일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국악 선율에 이끌려, 리허설 중인 춤 공연을 잠깐 훔쳐봤다. 첫날에도 분명 여기를 지나쳤는데, 감흥이 180도 다르다.
떠나기 전, 한옥에 차린 카페 한 군데를 찾아갔다. 국화차와 디저트를 먹고 떠날 채비를 했다. 못 가 본 곳이 너무 많구나. 차 시간까지 좀 더 보고 싶어 재차 한옥마을을 가로지르고, 가파른 계단을 밟아 오목대에 올랐다. 내려다보니 오밀조밀 모인 듯한 기와지붕들 위로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제 정말 갈 시간이다. 푸른 녘의 전동성당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전주역으로 향했다. 역에 들어서니 밀려드는 피곤함. 내 몸의 배터리 용량을 모두 끌어 쓴 모양이다.
막상 열차에 오르니 얼른 집에 가고 싶다. 도착하면 뻗을 것 같다. 역시 돌아다녀야 잠을 잘 자는 법. 떠나야 돌아가고 싶은 법. 멀어져야 그리운 법인가 보다.
- 전주 여행 4일간의 기록을 마칩니다. 다시 일상으로. -
Seine
첫머리 사진은 전동성당에 작별 인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