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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여행 4일간의 기록 ②

밤산책 클럽 스핀오프 - 전주걷기 클럽

by 세상 사람


알람이 울리자 번쩍 눈이 뜨였다. 어젯밤 긴장을 풀려고 익숙한 팟캐스트를 틀고 누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옅은 빛을 헤아렸다. 그런데, 눈 떠 보니 아침이었다. 뒤척임 한번 없이.


아랫배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무조건 병원부터다, 하고는 신속히 나갈 준비를 했다. 뭐지? 이 부지런함은. 통증과 기운이 동시에 느껴졌다.


목적지는 현대옥 근처 내과로 결정했다. 관광 아닌 진료지만, 그래도 모험 떠나는 기분으로 착착 가방을 싸고 체크아웃했다. 지도에 미리 북마크해 둔 경로로 버스를 탔다. 이제 전주 시내 방향감각이 잡히고, 길 찾는 것도 익숙해졌다. 처음 와 봐서 그렇지 외국도 아닌데, 애초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류장에서 조금 걷다 보니 병원이었다. 관광객 모드로 간판 사진을 찰칵, 찍은 후 문을 밀고 들어갔다. 중학교 때 가족과 스키장에 간 기억이 났다. 이제 막 스키를 배워 S자 커브를 잘 못할 때. 슬로프 가장자리에 쳐 놓은 주황색 그물을 그대로 뚫고 나간 적이 있다. 왼쪽 다리를 어딘가 세게 부딪히고, 그물을 몸에 둘둘 만 채 눈밭에서 멈췄다. 그 후 패트롤에게 실려 갔고, 의무실에서 부츠를 벗어 보니 정강이가 커다랗게 부어올라 다시 지역 병원으로 실려 갔다. 침대에 몸이 묶인 채 엠뷸런스가 차선을 바꿀 때마다 좌우로 몸이 쏠리던 감각이 생생하다. 아팠지만,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여행지에서 병원 가기’ 경험도 처음은 아니다.


곧 화면에 내 이름이 뜨고, 진료 순서가 됐다. 증상을 들은 의사 선생님은 5일 치 약을 처방하며, 주사도 한 대 맞고 가라고 했다. 주사실에서 주사를 맞는데, 엉덩이를 때리는 간호사 선생님 손이 어찌나 매운지. 파바바바바박! 주사가 아픈 건지 맞는 곳이 아픈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예의 그 “따끔해요” 하는 경고조차 없는 완전한 터프함.




병원에서 나와 약 봉투를 받고 나니 절반은 나은 것 같았다. ‘콩나물국밥 한 그릇 뚝딱할 수 있겠는데?’ 하고, 어제부터 제대로 못 먹은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바로 현대옥으로 향했다.


전주에서의 제대로 된 첫 끼, 현대옥 콩나물국밥


기본 8,000원에 오징어 사리가 3,000원. 국밥 종류는 크게 토렴응용식, 전통직화식 두 가지였다. 나는 맑고 산뜻한 맛에 국물 온도가 적당하다는 토렴식을 주문했다(메뉴판에서 자세한 설명을 읽을 수 있다). 싱겁게 먹는 나에게 국물과 반찬이 간간한 편이었지만, 푸짐한 오징어 사리, 젓갈, 수란 모두 맛있게 먹었다.


본의 아닌 내과 투어에 지역 맛집까지 찍고 나니까 갑자기 여행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커피 생각이 나 근처 카페를 찾았다. 문 여는 시간이라 쭈뼛쭈뼛 “오픈하셨나요?” 물으니, 테이블을 닦던 사장님이 들어오라고 하신다. 순한 차로 시켜야 하나 망설이다가, 약 봉투를 부적처럼 품고 드립 커피로 주문했다.


맛있다. 이곳 BGM도 마음에 쏙 들고. 한참 일기 쓰다 보니 또 세 페이지를 넘겼다. 글쓰기 모임(애칭: MOI) 전주 에디션을 매일 개최하는군. 서울에서도 한적한 카페를 잘 고른다면 이런 여유를 누릴 수 있겠지. 하지만 정서가 다르다. 돌아갈 집이 가까우면 떠돌이 느낌도 안 날 테고. 지난번 모임에서 ‘돌아가고 싶은 집을 만드는 게 내 다음 할 일’이라고 썼는데, 그 첫 번째 스텝을 밟았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떠나야 돌아가지.


미리 세워 둔 계획 중 오늘은 수목원으로 정했다. 여기서 한 시간 남짓 올라가면 전주수목원. 흐릴 줄 알았던 날씨도 어쩐지 맑게 갰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어야 했다. 수목원 입구에 다다르기 전부터 길가의 풀조차 예쁘다. 안 왔으면 어쩔 뻔했을까. 들어서자마자 온갖 나무들이 환영한다. 2011년이었나.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갔던 제주도 여행이 기억났다. 봄이라 구경할 꽃이 많은데도, 식물원에 들어가서 훨씬 더 정신 못 차리던 내가 떠오른다. 돋아나는 연둣빛 새잎이 꽃보다 예쁘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한국도로공사 전주수목원은 약 304,189㎡로 여러 가지 테마 정원으로 이루어졌다. AI에 물어보니 축구장 약 42개를 합친 크기, 혹은 여의도 면적의 1/10 정도라고 한다. 이전 금요독서회에서 정원 관련 책을 읽은 터라 이곳은 어떻게 꾸며져 있을지 궁금했다.


입구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구경해 나갔다. 전주 오기 전 이곳을 ‘가볼 만한 곳’ 폴더에 저장할 때는, 조경기능사 시험도 쳤고, [밤산책 클럽 스핀오프 - 전주걷기 클럽] 장소을 다양화하려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오길 잘했어, 진짜 잘했어’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거의 홀린 사람처럼 사진을 찍어대다 배터리를 다 썼다. 수목원 내 카페에는 나처럼 식물 사진 찍느라 휴대폰 방전된 자를 위한 충전 스테이션이 마련돼 있었다. 쑥 케이크와 얼그레이를 시키고 앉아, 잠시 내 몸과 휴대폰을 충전했다.


특히 반했던 수생식물원에서




두 번째 숙소를 목적지로 찍고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에 이유 없는 웃음이 났다. 내릴 때쯤 됐나 싶어 하차하고 보니, 한두 정거장 못 미쳐 내리고 말았다. 근래 유행하던 ‘오히려 잘 됐어‘라는 문장이 딱 내 마음이었다. 마침, 하늘이 주황빛 노을로 물들기 시작했고, 계획에 없던 전라감영 앞과 전주웨딩거리를 산책할 수 있었다.


체크인하고 들어왔는데 방이 꽤 널찍하다. 이름은 호텔이지만 모텔 등급 숙소인데, 기대보다 만족스럽다. 여전히 속을 달래야 해서 맛집 욕심은 버렸다. 호텔 지하 무인 편의점에서 사 온 인스턴트 미역국밥으로 간단히 배를 채웠다.


뜨끈한 물로 샤워하고 TV를 틀었다. 장성규 아나운서가 나와 흥미진진한 얘기를 하는 프로그램을 못 끊고 보다가 느지막이 잠을 청한다.


이틀 차가 되어서야 비로소 ‘여행 왔구나’라는 기분이다. 3박 4일이라 다행이다. 이틀이나 남았다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수목원 클리어. 내일은 전주 도서관 투어다.


- 3일 차로 계속됩니다. -


Seine



첫머리 사진은 ‘핑크 월드’라는 이름표가 붙은 전주수목원의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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