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MOI) - 전주 에디션
한옥마을 일대를 한 바퀴 돌고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경기전 근처인데, 낮에 체크인할 때부터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아 마치 빈집에 나 혼자인 기분이다. 이른 저녁이라 다시 나가긴 해야겠지만, 아까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다. 여행 와서 위장염이라니.
오랜만에 여행하려니까 신경이 많이 쓰였나 보다. 그래도 이번에는 서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지도에서 안 밟아 본 땅 한 군데만 밟자고, 낯선 카페 한 곳만 가도 성공이라는 마음으로 온 전주다.
열차에 올랐을 때부터 여행은 시작됐다. 차창 밖 움직이는 풍경만 보아도 신이 났다. 지도 위 낯선 땅 밟기가 아니라 기차만 타도 성공이었던 셈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앞자리 승객이 전화를 붙들고 타서는 출발 후에도 통화를 이어 갔는데, 마침 객실 온도 체크하던 승무원이 옆을 지나갔다. 내가 황급히 눈짓으로 상황을 알리자, 그 역시 눈을 질끈 감으며 끄덕끄덕 ‘알았다’ 신호를 주더니 곧 정중하게 “통화는 밖에서 해 주십시오.”하고 깔끔하게 상황 정리! 정말 멋졌다.
그렇게 시작은 좋았다. 배가 점점 아파질 줄도 몰랐고 말이다. 전주역에 내렸을 때는 가뜩이나 낯선데 속까지 안 좋아 길 잃은 사람처럼 우왕좌왕했다. 뭘 먹을 상태가 아니라서 숙소에 짐을 먼저 풀고, ‘그래도 여행인데 분위기만 좀 보자’ 하며 한옥마을 구경을 나갔다.
막 도착했을 때는 거리가 텅 빈 느낌이더니, 3시 넘어 다시 나가니 길목에 활기가 돌았다. 경기전을 둘러 전동성당 쪽으로 갔다. 안을 보고 싶었는데, 소음 때문에 신자가 아니면 입장을 금지했다고 해서 아쉬웠다. 그길로 한옥마을 중심을 더 걷다 남쪽으로 향했다.
거기서 길을 건너 서학동 쪽에 봐 뒀던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서 글 쓰는 거야 늘 하던 일이지만, 공식 일정을 밟을 차례였다. 이른바 [글쓰기 모임 - 전주 에디션] 첫 테이프 끊기.
통창으로 초록의 나무들이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매실차를 한 모금씩 마시며 한참 글을 썼다. 위장염에 밥도 못 먹고 아직은 이 도시의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일기를 장장 세 페이지나 썼다. 이 낯섦만으로 쓸 거리가 되는구나.
어제 여행 준비할 때, 일정 계획하고 짐도 쌌지만, 종일 한 일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집 정리다. 냉장고에 남은 부추를 소분해 신문지로 말아 두고, 냉동실에 있던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재활용 바스켓을 비우고, 설거지한 그릇을 제자리에 두고, 책상까지 정리했다. 계속 그러고 있더라. 집에만 너무 오래 있었던 것일까. 꼭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떠난 집이 말끔했으면 하는, 이상한 마음이었다. 이런 얘기도 모두 일기에 적었다.
카페에서 나와 남천교를 건너려는데, 때마침 해가 지길래 아예 신발을 벗고 청연루로 올라갔다. 바람이 여간 시원한 게 아니었다. 이어폰을 꽂고 혼자 그 바람을 맞고 있자니 충만하고 기쁘면서 조금 외로웠다.
일기 내용 때문일까. 떠오른 노래가 있었다. 2000년에 발매된 GIGS 2집의 “그날 이후”라는 곡. 이런 구절로 시작하는데,
죽음이 문득 두려울 때
예를 들면 홀로 비행기를 탈 때
난 자꾸 이런 그림 생각해
나 없는 세상 뭐가 다를는지
비행기 탈 때마다 떠올리던 가사다. 청연루에서 내려와 귀에 꽂았던 이 곡을 따라 부르며 걸었다.
어둑해진 길을 다시 걸어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속이 더 안 좋았다. 이 어지러움이 두 끼를 내리 굶어서인지, 아니면 위염이 심해져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기운이 없으니 마음도 약해지는 듯해 바나나라도 입에 넣어야겠다 싶었다.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타벅스까지 걸어가는 길. 또 그 와중에 밤 풍경은 예쁘다.
바나나와 스팀드 두유를 주문했다. 2층은 큰 목소리로 상스러운 말을 주고받는 무리가 점령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1층에 앉았다. 그러고 있으니 처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도 앱을 열고 내과를 검색했다. 한옥마을 쪽에는 없고,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한다.
숙소로 돌아와 바로 잠을 청하지는 못했다. 휴대폰 보는 버릇을 여행지까지 데리고 온 것인가. 게다가 몸 상태로 보아 아무래도 내일은 병원부터 들러야겠다고 판단. 내과 두 군데를 찾아 지도에 등록했다. 때아닌 내과 투어다. 그러면서도 혹시 모르니, 하나는 현대옥—유명한 콩나물국밥집—본점 근처로 골라 뒀다. 리뷰도 읽어 보고. 여행자 정체성을 지키려는 몸부림이랄까.
나 지금 여행 와 있는 거 맞나. 맞겠지?
- 2일 차로 계속됩니다. -
Seine
첫머리 사진은 ITX-마음 전주행 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