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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알고 있다는 착각

조경기능사 시험 도전기

by 세상 사람


조경기능사 실기 첫 번째 날. 미리 챙겨 둔 준비물을 가방에 넣고 시험장으로 갔다. 실기는 두 회차로 나누어 보는데, 1차는 ‘도면 제도’와 ‘수목 감별’이다. 그중 도면 그리기가 총 100점 가운데 50점이나 배점돼 있으니, 당락에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필기 때와 마찬가지로 공부는 독학으로 했다. 시험 치른 사람들이 당근마켓에 한꺼번에 내놓는 준비물을 사면 편하다고 들었는데, 마침 한 분이 계셨다. 비가 많이 오던 날, 버스를 타고 만나러 갔다. 교재며 제도 용구, 작업 도구까지 꼼꼼히 싸 오신 신사였다.


공부를 시작했는지 물으시길래 “이제부터 하려고요.”라고 하자, 도구 사용 팁이며 참고할 유튜브 채널, 시험 요령을 줄줄 알려 주셨다. 감사했다. 그리고 나는 ‘혼자 할 수 있겠는데?’하고 자만해 버렸다. 등록해 뒀던 학원 수업을 며칠 앞두고 취소했다. 공부마저 1인 스터디 그룹을 택한 셈.


도면에서 높은 점수를 얻고 싶었다. 이어질 2차는 지주목 세우기나 판석 포장 같은 작업을 실제로 해야 하므로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제도 연습을 더 해야 했는데.


시험장에 앉아 있는 내내 머릿속이 뿌예지면서 정신이 붕 떠올랐다. 집에서는 제도판 없이 식탁과 책상을 옮겨 다니며 도면을 그려 버릇해서, 시작 전부터 각도 맞추고 I자(아이자) 움직이는 법을 손에 익혀야 했다. 긴 자와 삼각자, 템플릿을 펼쳐 놓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문항 파악도 오래 걸렸다. 기출문제에서는 보지 못한 항목들이 나왔다. 제출 시간 10초 전까지 못 그린 선을 마저 그릴 만큼 촉박했다.


그래도 평면도와 단면도를 완성했으니, 첫 응시인 점을 참작하면 큰일은 아니었다. 배점 10점뿐인 수목 감별도 절반 이상은 맞춘 것 같았다. 그러나,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길. 한 구역을 완전히 비워 놨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왜 그랬지? 아까 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식물을 심어야 하는 플랜트 박스였는데, 시험 도중 나도 모르게 포장도로 같은 것으로 치부한 것이다.


뭐에 홀린 기분이었다. 도면 기호를 모르지 않았고, 시간은 빠듯했어도 관목 그려 넣을 시간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착각했다, ‘그냥’. 이럴 수가.


그걸 깨닫고 나자, 준비가 얼마나 부족했는지 실감이 났다. 평면도는 여섯 장, 단면도는 네 장 그려 본 게 다였다. 제한 시간 맞춰 그리는 연습도 소홀했다. 검토 시간까지 고려해 수목 표현이나 템플릿 쓰는 속도를 더 단축해야 했는데.


도면은 샤프로 그리고 용지 귀퉁이에 수험 번호와 이름만 검은 펜으로 쓰는 게 규칙인데, 그날 제정신이었던 시간은 딱 이름 쓰던 순간까지였던 것 같다.


집에서 처음 완성했던 도면




채점 기준을 모르니, 어느 정도 감점인지 예상할 수 없었다. 마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집에 와서도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한참 걸렸다. 밤에는 예매해 뒀던 “F1 더 무비”를 보러 갔다. 가는 도중 보행로 옆 녹지가 보일 때마다 ‘아…. 저렇게 관목을 심었어야지.’ 하며 비워 둔 도면 한 구역을 떠올렸다.


영화를 보고 나와 근처 경의선숲길을 걸었다. 요즘은 볼일 보러 나갔다가도 밤산책 클럽까지 해결하고 귀가할 요량에 일부러 걷기도 한다. 영화를 봐서인지, 숲길이 예뻐서인지. 밤 공원의 조용함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음이 들떴다.


기능사가 가장 기초 단계 자격증이긴 해도, 조경 공부를 시작한 이래 길에서 초목을 볼 때마다 조금 다르게 보인다. 아직 나무 이름을 읊고 그러지는 못하지만, 잠깐 걸으면서도 기실 다양한 수목과 초화류를 섞어 심어 놓은 게 눈에 들어온다. 잎 생김새도 다 다르고, 꽃과 열매, 키와 둘레, 수피 무늬, 수형도 제각각. 소나무처럼 익숙한 나무도 아무튼 새롭다.


오래전부터 인간이 만든 것 중에 이 ‘공원’을 참 좋아했는데, 근래 들어 좀 더 자세히 좋아진달까. 그런 생각을 하며 6킬로미터를 걸어 집까지 왔다.


다음 날이 되니 어제의 실수를 빨리 인정하고 다음을 준비하자는 다짐이 섰다. 시험의 여운이 가시자 어느덧 저물녘.


앞선 집밥 살롱은 다 점심이었는데, 이날 처음 저녁 살롱을 열었다. 메뉴는 어묵볶음 얹은 비빔 현미 국수. 첫날의 말차 소바와 둘째 날의 달걀 국수에 이어 세 번째도 국수다. 있는 재료로 조촐한 한 끼 만들어 내는 게 포인트니까, 국수 다 쓸 때까지 계속 면식을 밀어붙일지도.


이제 단골이 된 손님이 시험 끝났다며 시원섭섭한 표정을 짓기에,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한 잔 따라 권했다. 흔쾌히 잔을 받아 든 그 단골은 물론, 나.


오늘도 손님은 나 한 명.


길게 썬 어묵과 청양고추를 함께 볶아 얹었다




1차 시험 아흐레 뒤. 드디어 2차 실기 날이 왔다. 9월 들어 날이 시원해졌다고는 해도 삽질하기에는 뜨거운 날씨였다.


나무 심기, 벽돌 깔기, 잔디 파종, 삼각 지주목 세우기 등. 열 가지가량의 시공 작업 중 두 가지가 무작위로 출제된다. 나는 관목 열식—작은 나무들을 울타리용으로 엇갈려 심는 것—과 수간주사—나무줄기 아래쪽에 구멍 뚫고 주사 놓기—를 하게 됐다.


필답형에서 저지른 실수를 발판 삼아, 이번에는 꼭 잘하고 싶었다, 꼭. 하지만.


왜 계획대로는 안 되는 걸까. 어이없는 불찰이 또 있었다. 처음 해 보는 삽질도, 나무 식재도 무사히 끝냈는데, 실수는 수간주사 놓기 전에 일어났다. 구멍 뚫을 때 드릴을 역방향으로 돌린 것. 바로 알아채지도 못하고 ‘왜 안 뚫리지?’ 생각만 했다. 전동 드릴 못 다루는 것도 아니고, 이보다 훨씬 복잡한 가구 조립도 익숙한 내가 왜.


동시에 진행되는 구술 평가—심사관이 작업 중간에 이론 질문을 하면 말로 답하는 평가—에는 대부분 잘 응했다. 그러나 역시 손에 익지 않은 작업에서 버벅댔다. 동영상으로만 접했지, 시험장에서 최초로 해 보는 일들이니.


힘을 얼마큼 줘야 삽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지, 흙 푼 삽이 얼마나 무거운지. 다 처음 알았다. 거기에 너무 힘을 쏟았나. 막상 작업형 중에 제일 쉽다고 소문난 수간주사에서 드릴을 반대로 돌리지를 않나.


머리로 알고 있다는 착각이 이렇게 실전에서 실책으로 나오는구나. 1차, 2차 다 매한가지다. 어려워서 못한 게 아니라 몸에 익지 않아서. 내 연습이 얄팍해서. 손으로 하는 일은 손으로 해야만 된다.


아쉽지만 이렇게 시험이 끝났다. 철저한 준비 끝에 매끄럽게 치른 느낌이 전혀 아니라 시간이 어찌 갔는지 모르겠다. 시험을 보는 행위 자체가 무척 오랜만이기도 했다. 긴장하고 후회도 했지만, 온몸을 써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끝낸 성취감이 뒤늦게 밀려온다.


결과는 9월 말 발표일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떨어지면 이번에는 학원 등록해야지.


Seine



첫머리 사진은 산책길 달콤한 향에 이끌려 이름을 찾아본 '옥잠화'의 백합 닮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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