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야만 대화는 아니니까
나는 영화든 드라마든, 감상문을 글로는 좀처럼 쓰지 않는다. 막 보고 나서 함께 본 이와 얘기 나누는 시간은 즐기지만, 가까운 관계의 사람하고만 하는 일이다.
블로그나 소셜미디어를 곧잘 쓰면서도, 작품을 어떻게 봤는지,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따위를 길게 남기는 것은 잘 못하겠다. 전부터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 같은 질문도 썩 반갑지 않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로 내가 규정되는 듯한 그 순간을 피하고만 싶었다.
좋고 싫음이라는 취향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아마도 내 감상이 온라인에 공표할 만하지 않다고 여겼던 듯하다.
독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책을 오래 읽어 온 사람이 아니라서인지, 서평에는 더 큰 자신감이 필요했다. 다독가도 애독가도 아닌 내가 무슨 평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주저함이 앞선 것.
이렇다 보니, 북클럽에 가입해 낯선 사람들과 읽은 책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일이 만만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선망의 마음은 품고 있어서, 독서 모임이 종종 궁금했다.
‘사람들은 책을 읽고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걸까. 왜 나누고 싶은 걸까.’ 그런 호기심.
그러나 그 가운데 앉은 내가 잘 상상이 안 됐다.
한편, 나는 평소 스몰톡을 즐기지 않는다. 구술 소통이 제 몫을 할 때가 있지만, 그쪽이 반드시 더 가치 있다든지 실체적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피상적인 대화는 얼마나 피로한가.
대화라는 게 꼭 말로 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느낀다.
예를 들어, 비 오는 저녁 우산을 받치고 길을 걷다 문득 훔쳐보는 가게 안 풍경. 이런 것만으로 내 대화 욕구가 그만 채워져 버리곤 한다.
티브이 보고 앉아 있는 세탁소 사장님. 손님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웃어 보이는 미용실 사장님. 바닥을 쓸며 오픈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자카야 사장님과 텅 빈 홀. 이런 장면들 말이다. 겁쟁이의 변명으로 들릴지라도, 그러한 찰나가, 관심도 없는 사람과 나누는 무의미한 잡담보다 더 짙은 무언가를 나에게 건네준다. 그게 무엇인지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읽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대화라는 명제를 자주 실감한다. 온라인이건 대면이건, 타인에게 내 의견을 말로 전달해야만 대화인 것은 아니니까. 글이 내 안에 일으킨 파장으로 나도 내 얘기를 꺼내고 싶어지고, 글이든 행동이든, 어떤 형태로든 그게 밖으로 나와 사회에 영향이 되는 과정도 대화다. 사회까지 아니더라도, 내 삶에 일으킨 짧은 반향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책을 느리게 읽는다. 원체 글을 천천히 읽는 데다 책 한 권을 보는 동안 자주 멈춰서기 때문이다. 책 속 글자들이 탐사하는 세계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도 즐거운 여행이지만, 난 그 틈에서 그렇게 멈춰서는 쪽도 좋아한다.
읽는 글이 와닿으면 와닿을수록, 내 안의 잠잠하던 영역을 건드리며 잠시라도 책을 덮고 무언가를 적어야만 하겠다는 기분이 솟구치는 때. 밑줄을 긋거나 책 속 문장을 옮기는 정도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덮어 두고 쓰기 모드를 켠다. 중요한 힌트를 찾은 흥분으로 적기 시작해, 미처 문장을 맺지 못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잔뜩 신이 난다.
(이 기분은 “옥상시선”을 연재할 때 ‘말먼지’라는 짧은 글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내게 독서는 탐험보다는 대화다. 이렇게 먼지처럼 이는 생각을 관찰하고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 말로 뱉는 행위에서보다 더 큰 생동감을 경험한다. 읽고 나서 혼자 하는 반응일 뿐이니 대화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좋은 대화도 결국 잘 듣는 것에서 비롯하지 않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 대화의 자리에 좀 더 바짝 다가가 앉아 보고 싶어진다.
이런 상념의 줄다리기 끝에, 오늘은 덜컥 북클럽에 입회 신청을 했다. 모임의 끝판왕은 역시 독서지.
월 1회 금요일, [금요독서회]는 도서관에서 모인다.
관심 있는 책을 골라 각자 자유롭게 읽고, 다음 회차에 감상을 나누면 되는데, 짧게라도 의견을 나눠야 정회원이 된다고 하네? 시작으로 어떤 책이 좋을지 몰라 요즘 흥미를 붙인 조경 분야 네 권을 빌렸다. 보나 마나 다 못 읽겠지만, 도서관까지 갔는데 도저히 한 권만 빌려 나올 재간이 없었다. 이 중 하나는 꼼꼼히 읽어야겠다.
기왕 가입했으니 정회원이 되고 싶다. 지금껏 뭉뚱그리기만 했던 내 나름의 감상을 꺼내 보이고도 싶고. 이 모임은 아직 정회원이 없다고 한다. 예비 회원도 나 한 명뿐이다. 당연하게도 이 클럽 또한, 오늘 내가 설립했기 때문.
여전히 타인을 신경 쓰기에는, 친해져야 할 내가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책과 나. 그 사이에서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다.
Seine
사진은 첫 독서회에서 대출한 가드닝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