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날의 떡집

13. 이 봄날에

by 신성화

"재연씨. 정연이 맘마 다 먹었어?"


헐렁한 옷을 입고 양쪽 손목에는 보호대를 찬 지애이 새 기저귀를 정리하며 물었다.


"응. 트림 시키는 중이야."


소파에 앉아 아기를 안고 등을 토닥이는 재연의 머리에 까치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연이는 아직도 자는 건가? 오늘은 오래 자네."


재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에서 주연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공주님도 일어났네. 정연이 좀 안아줘. 내가 들어가 볼게."


"우리 아들. 엄마한테 올까?"


지애에게 정연이를 안겨준 재연이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주연아. 아빠 여기 있네. 맘마 먹을까? 아니야? 기저귀부터 갈까?"


주연이는 재연이 안고 달래며 거실로 나와도 계속 칭얼거렸다.그러더니 뭐가 잘못 됐는지 혼을 쏙 빼놓게 울기 시작했다. 주연이의 목청에 덩달아 정연이도 울음을 더했다.


"왜 우는 걸까? 어디 아픈가? 뭐가 잘못 됐나?"


정신없는 거실에서 초보 엄마, 아빠의 허둥대는 움직임이 분주했다.

-----
"엄마. 저거 뭐야?"


해율이 지애네 대문을 가리켰다. 강은은 해율의 긍금증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새끼줄에 숯 덩이와 생솔가지와 빨간 고추가 번갈아 가며 꽂혀 있었다.


"금줄 이라는 거야. 강은 이모네 집에 나쁜 거 오지 마세요, 아기들 건강하게 지켜주세요, 하는 거야."


"우리 집은?"


"응? 우리 집? 왜, 금줄이 마음에 들어?"


"응. 엄마 지켜줄 거야. 우리 집에 나쁜 거 오지 말라고 할 거야."


해율이 잇몸에 새싹처럼 돋아난 새 이를 보이며 웃었다.


"안 될 거 없지. 가자. 금줄 만들러."


강은의 천연덕스런 웃음이 봄기운 가득한 거리를 채웠다.

-----
"아버지. 행복 사진관 이름 바꿀까?"


진서가 근희에게 넌지시 물었다.


"왜. 별로냐?"


"촌스럽잖아."


"그래도 난 좋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이 원하는 거 아니냐."


"행복... 또 그렇긴 하지."


진서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답했다.


"너, 내 사진 하나 찍어 봐라.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보게."


근희의 제안에 진서가 손가락으로 코끝을 비비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버지, 나 사진으로 상 받은 사람이야. 실력은 어마어마하지."


뽐내듯 과장하며 말하는 진서의 눈가가 살짝 떨려왔다.


"상을 받았어? 장하다. 어디, 상 받은 사진 한 번 보자."


근희는 이미 열 번도 더 넘게 들은 이야기를 처음 듣는 마냥 즐거워했다.


"슈퍼집 해나랑 해율이 알죠?"


진서는 아이들이 자전거 타는 사진이 담긴 액자와 상패를 보여주며 자랑했다. 마치 오늘 상을 받은 사람처럼.


"벌써 이렇게 컸냐. 아이들이 참 맑다. 사진에 잘 담았어."


근희가 사진을 한참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기억을 더듬는 눈이기도, 기억을 담는 눈이기도 했다.


"아버지. 사진 찍어 드릴게요."


그 사이 준비를 마친 진서가 말했다.


"사진? 무슨 사진?"


근희의 대답에 진서가 뒤돌아 카메라에 손을 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마음을 추스른 진서가 다정하게 근희를 바라보았다.


"여기 한 번 앉아 보실래요?"


"내 사진을 찍으려고? 좋다. 찍어 봐라. 실력 한 번 보자."


카메라 앞에 앉은 근희는 조명이 비치는 게 어색한지 얼굴 근육이 뻣뻣했다.


"아버지, 웃으세요."


"그래서 어디 웃겠어. 사진쟁이가 웃겨야 사람들이 웃지. 먼저 크게 웃어라. 그럼 사람들도 따라서 편하게 웃으니."


진서는 근희의 노하우를 따라 크게 웃으며 손때 묻은 카메라에 손을 올렸다. 닮은 얼굴의 두 사람이 산들바람 같은 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눅진하게 녹아 있는 행복 사진관에 새로운 추억 하나가 4월의 풍경처럼 새겨졌다.

-----
흐르는 물길을 따라 이어진 둑방길을 걸으며 승재는 은하수리의 봄을 감상하고 있었다. 고요하던 겨울을 밀어내는 봄의 생동감이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눈에 보이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생기 넘치는 풍경과 어우러진 이담이 둑방길 위에서 마주오고 있었다. 이담은 둑방길 위에 이어진 아름드리나무의 나뭇가지처람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낮술 하네요. 그것도 걸어 다니면서. 넘어지면 어쩌려고."


웃음을 머금은 승재의 말에 이담이 빈 캔을 가방 속 비닐봉지 안에 넣었다.


ㅈ"여기에 왜 있어요. 사람들 잘 안 오는 곳인데."


"가끔 걷습니다. 사람이 없기에."


"산책길을 공유하게 됐네요. 자. 기념이다. 한 캔 줄게요."


이담이 뒤적이는 가방 안에서 캔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담은 승재에게 맥주 한 캔을 건네고, 하나를 더 꺼냈다. 사이좋게 건배를 나눈 그들은 이담이 걷던 방향으로 둑방길을 걸었다.


"안에 많이 들었나 봐요."


승재가 이담의 가방에서 들려오는 잘그락잘그락 소리에 살짝 웃었다.


"편의점 맥주가 왜 네 캔에 만원인 줄 알아요?"


"딱히 생각 안 해봤어요."


"그게 1인분이라서."


"네 캔이요?"


승재는 술을 잘 못 하는 편이었기에 다소 놀라며 되물었다.


"당연하죠. 묶음 상품은 1인분."


이담이 검지를 들어 1을 강조하고는 웃었다. 그러더니 가방을 뒤적여 과자 상자를 꺼냈다.


"우리 동네 슈퍼는 편의점보다 좋죠. 우림 형부가 안주를 하나 더 챙겨줬거든요. 사실, 심부름은 하나 했지만."


이담은 상자를 뜯어 안에 있는 과자 봉지 하나를 승재에게 건넸다.


"봄에 딱 하루. 매년 치르는 의식 같은 거예요. 운치 있죠?"


"그러네요. 마음에 들어요. 이 길."


과자 봉지를 받아든 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담과 나란히 걸음을 맞췄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저 빈 건물은 뭡니까?"


"오래된 양조장이예요. 지금은 안 하지만."


"규모가 꽤 크네요."


"예전에는 진짜 잘 됐거든요. 없어질 때 많이 아쉬웠어요."


이담이 벚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조장을 유심히 살피던 승재도 이담의 지척에 자리를 잡았다.


"그 시절에는 어른들이 종종 아이들한테 술심부름을 시켰는데 애들이 하도 안 와서 찾아보면 다 여기 강둑 나무 밑 어딘가에서 늘어져 자고 있었대요. 술 한 모금 훔쳐 먹고. 그래서 여기를 숨바꼭질 둑방이라고 불러요."


"자주 잠들었나 봐요. 여기서."


"나요? 그건 당연히 비밀이죠. 소달구지 타고 다닐 때였거든요."


이담이 크게 웃고는 남은 맥주를 탈탈 털어 마셨다.


"많이 발전했네요. 제법 농담도 건네고."


"선생님이 훌륭하거든요."


"그 선생님 뿌듯하겠어요. 제자 잘 둬서."


봄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를 한들한들 흔들었고, 꽃잎이 왈츠를 추듯 내렸다. 이담이 벚꽃잎을 감상하는 승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허공 위 한 곳에 고정된 승재의 눈은 여전히 참, 소년 같았다.


"내일도 나랑 산책 할래요?"


지난 계절을 담아 둔 이담의 마음이 밖으로 돋아 나왔다.


"모레도 나랑 산책 해주면."


승재가 이담을 빤히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봄을 담은 은하수리 숨바꼭질 둑방에 벚꽃잎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
2층 오른쪽 끝 방은 봄나래가 처음 이사 온 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젯밤 늦게까지 모든 도구를 덮어둔 먼지 쌓인 하얀 천을 걷어내고, 방을 쓸고 닦으며 분주하게 보낸 봄나래는 뒤척임 없이 꿈 없는 단잠을 푹 잤다.


해가 하늘 높은 곳에 자리한 오늘, 봄나래가 닫혀있던 방문을 열었다. 햇살을 머금은 화실 안에 생기가 가득했다. 문가에 서서 방 안을 둘러본 봄나래가 구석에 기대두었던 화구통을 들어 몇 가지 재료를 담았다. 오랜 시간동안 묵혀뒀기에 남은 재료는 적었지만 새로 주문한 물감이며, 다른 재료들이 내일이면 도착할 예정이었다.


화구통을 챙겨 내려온 봄나래가 마당 한 쪽에 새로 마련해둔 자전거를 꺼냈다. 바구니 달린 자전거를 타고 떡집을 나선 봄나래가 은하수리 입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완연한 봄이었다. 연녹색 잎새를 매단 느티나무 위에서 재잘재잘 대화를 나누던 새들이 봄나래의 자전거가 다가오자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봄나래는 날아오르는 이름 모를 새들을 보며 꿈속의 동박새를 떠올렸다. 동박새는 끝까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동박새가 세상과 헤어진 이유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더 이상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다.


너는 떠나버렸다는 것. 떠났지만 어느 곳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홀로 헤맸을 네가 악몽에서는 깨어났을 거라는 것. 두 가지만 기억하기로 했다.


"안녕."


가끔은 파란 하늘에 인사를 보내기도 하면서.

봄나래의 자전거는 어느새 마을의 초입에 다다랐다. 심장이 기분 좋은 설렘으로 두근두근 울리고 있었다. 어떤 길을 택할지 잠깐 고민하던 봄나래는 자전거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봄나래 이모, 어디 가요?"


슈퍼 앞 버스 정류장에 서있던 해나가 봄나래에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 겨우내 해나는 키가 부쩍 자라 있었고, 점점 강은의 얼굴과 닮아갔다. 봄나래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해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답했다.


"좋은 곳에!"


봄나래가 다시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굴렀다. 목적지는 없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갈 마음 뿐이었다. 빠르게 달리며 나른한 봄바람을 느끼고, 천천히 달리며 봄내음을 맡고,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는 잠시 멈추기도 하면서.

-----
고운 백색의 한복을 입은 심방이 느릿느릿 한가롭게 산 속 오솔길을 걸었다. 곳곳에서 여린 색으로 움튼 새싹들은 봄바람에 한들거리면서도 부드러운 흙과 낭창거리는 나뭇가지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따사로운 봄볕 사이로 홀연히 새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심방의 눈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자기를 봐달라는 듯 빙빙 돌던 새는 심방이 손짓하자 그녀의 어깨 위에 살포시 앉았다.


"두견새로구나."


심방이 손을 들어 가볍게 두견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잿빛 새가 부드럽게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어떤 사연을 가져왔누. 아마 두견화가 핀 곳으로 가겠지? 운이 좋으면 두견주도 한 잔 마실 수 있겠구나. 오래 전 마셨던 두견주가 아주 맛이 좋았는데. 그때만큼 맛있는 술을 만날 수 있으려나."


두견새는 심방의 어깨를 얄따란 다리로 톡톡 두드렸다.


"오, 그래. 이제 너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원, 녀석도.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구나. 좋다, 말해보거라."


두견새는 오랜 이야기를 풀어내듯 얼굴을 심방의 귓가에 대고 종알종알 지저귀기 시작했다. 느긋한 걸음을 옮기며 두견새의 말에 귀 기울이는 심방의 주름진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어느새 심방의 백색 한복은 밝은 자줏빛으로 변해 있었다. 산 속에 피어난 진달래처럼.

이전 12화이 봄날의 떡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