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일까?"
봄나래가 몽롱함을 느끼며 웅얼거렸다. 지난 꿈에서 겪었던, 발바닥에 전해지는 부드럽고 까칠한 감각은 없었다. 오히려 하늘 위에 붕 떠있는 듯, 안개로 만든 사슬에 꽁꽁 묶여 있는 듯 답답했다. 이윽고 삑- 하며 긴 꼬리를 남기는 새소리가 들려오자 봄나래는 이곳이 꿈속이라는 걸 확신했다.
손을 휘저으려 했지만 다른 꿈과 달리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팔을 움직일 수도, 걸음을 걸을 수도 없었다. 봄나래가 애를 쓰며 몸을 움직여보려는데 뿌옇게 흐릿하던 장면 사이로 또렷한 형상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나잖아?"
봄나래는 하늘 위에서 꿈속의 봄나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단번에 알았다. 그곳이 어디인지. 익숙한 장소지만 가고 싶지 않은 그곳. 일양대교 위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꿈속 봄나래가 대교 아래로 국화 한 송이를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봄나래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다시 또 삑- 하는 새소리가 휘파람처럼 들려왔다. 이전 화면은 바람에 흩어진 옅은 구름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새로운 장면이 선명히 드러났다. 어딘지 모를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꿈속 봄나래의 모습이 보였다.
"어쩌다가?"
"왜 그랬대?"
"너 정말 몰랐어?"
얼굴의 이목구비가 뭉개져 알아볼 수 없는 형체들이 꿈속 봄나래를 향해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 화살처럼 날아들어 꽂히는 말에 꿈속 봄나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내저었다. 듣지 않으려 해도 수군거리는 말들이 돌림노래처럼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아니야. 너희들이 뭘 알아."
봄나래가 소리쳤지만 꿈속의 그들은 외침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만 같은데 문득 웃음 소리와 함께 그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 봄날의 떡집? 그냥 이 봄날에가 낫지 않겠어?'
'개업 선물은 동백나무야. 내가 복주머니도 걸었어. 귀엽지?'
한 번만 더 듣기를 바랐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어느 날의 대화. 아주 평범했던 하루였다. 들려오는 그날의 목소리가 꿈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현실 속 기억의 한 부분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봄나래가 혼란에 빠져있는데 삑- 새소리가 길게 늘어지면서 앞선 화면을 걷어가고 다른 장면을 펼쳤다. 꿈속 봄나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다. 잊고 있던 옛 추억. 봄나래가 지닌 기억의 파편이 꿈속의 조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나랑 친구할래?"
지난 꿈에서 들었던 정체모를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쪼그려 앉아 있던 꿈속의 어린 봄나래가 고개를 들어 태양을 등지고 선 자그마한 꼬마를 올려다보았다.
"안녕?"
불현 듯 또렷하게 들려온 어린 목소리에 봄나래의 몸이 찌릿하며 무뎠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땅을 딛고 선 발바닥에 익숙한 촉감이 느껴졌다. 봄나래가 고개를 들자 마당의 동백나무 위에 앉아있던 동박새가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동박새와 눈이 마주친 봄나래가 숨죽여 울었다. 할 말이 많았는데 그저 눈물만 흘렀다.
"안녕?"
동박새의 인사가 다시 들려오자 봄나래의 아래턱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왜! 대체 왜 그랬어! 왜!"
보고 싶었다는 말도, 그리웠다는 말도, 봄나래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모든 말들보다도 먼저 튀어나온 말이었다. 수천 번 속으로만 외쳤던 말이 울음 섞인 목소리에 엉겨 처절하게 터져 나왔다.
"너한테 왜 그랬어! 왜!"
시간 안에 오래 묵혀두었던 감정이 모질게 배어나와 봄나래의 눈물을 타고 흘렀다.
동박새는 아무런 말없이 동백나무에 피어난 동백꽃 한 송이를 부리로 꺾어 물고는 봄나래를 향해 날아갔다. 짧은 거리를 포롱포롱 날아온 동박새가 봄나래의 손에 붉은 동백꽃을 올려놓았다.
"이걸로 떡을 만들어 먹어."
잠시 봄나래의 손바닥 위에 앉았던 동박새는 다시 동백나무 위로 날아갔다. 동박새의 얼굴에 그리운 이름과 닮은 웃음이 그려졌다.
"너는 왜... 도대체 왜..."
봄나래가 손 안에 든 동백꽃을 움켜쥐었다.
동박새는 꽃을 꺾은 가지에 앉아 환하게 밝혀진 꿈속 풍경을 둘러보더니 날개를 펼쳤다. 봄나래의 주변을 맴돌며 날갯짓을 하던 동박새가 더 먼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안녕."
동박새의 짧은 인사에 봄나래는 잠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