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록_나에게 돌아가는 길
가오슝은 공항에서 시내까지 아주 가깝고 지하철이 잘 되어 있었다. 헤맬 일이 없어서 긴장이 확 사라졌다. 공항 편의점에서 이지카드에 500 TWD를 충전하고 녹차음료를 하나 사서 나왔다. 녹차음료가 달다. 지하철 信義國小(신의초등학교) 역에서 내려 호텔까지 드르륵드르륵 캐리어를 끈다. 마치 서울의 새벽길을 걷는 것처럼 동네가 한산하다.
호텔에 들어서니 다리가 너무 무겁고 피곤하다. 두시가 넘었으니 점심때가 한참 지나기도 했다. 당장 나가서 우육면 한 그릇을 먹고 싶지만 힘이 없다. 게다가 지금 밥을 먹으면 저녁을 맛있게 먹을 수가 없다. 소화 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여행할 때마다 항상 아쉽다. 여행지에서는 하루에 다섯 끼 먹는 사람도 있다던데, 내 친구는 여행 가서 간식도 몇 번씩 챙겨 먹는다고 하던데 모두 남일이다. 호텔에서 간식으로 준 쿠키를 집어 들고 출출함을 달랜다. 휴대폰 충전될 때까지만 잠시 쉬자는 마음으로 소파에 기대앉는다.
저녁을 못 먹는 한이 있어도 망고빙수는 먹어야지!
지도 어플을 켜서 야시장 가는 길에 있는 빙수집을 도착지로 지정한다. 大碗公冰.甜品.
'여행의 시작이니까 힘내자'라고 스스로에게 응원을 보내며 팔과 다리를 좀 더 힘차게 흔들며 걷는다. 뚝딱거리는 모양새가 막 사회에 발 디딘 초년생 같다. 가오슝에는 아주 작은 일 차선 골목에도 횡단보도가 있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데 옆에 사람이 있으면 괜히 의식한다. 혹시 말을 걸진 않을까? 저 사람들은 어디 가는 걸까? 괜히 상상해 본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너무 본 탓인가.
빙수가게에 도착해서 사진을 보며 메뉴를 찬찬히 살핀다. 디저트 종류가 족히 100개는 되는 것 같다. 갑자기 여행이 짧게 느껴진다. 이 중에 나는 몇 개 먹어보지도 못하겠구나. 빙수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메뉴들도 꼭 먹어보고 싶은데.
일단 오늘은 망고와 바나나를 올린 빙수를 선택했다. 105 TWD = 4,860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당장 먹어야 하는 가격인데, 맛도 흠잡을 데가 없다. 우유얼음이 입안에 사르르 녹고 뭔가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감싸며 마무리된다. 생각해 보니 빙수 한그릇을 혼자 다 먹어본 건 처음인 것 같다. 괜히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에 다 먹은 그릇도 사진으로 남긴다. 배가 차가워져서 손으로 계속 쓰다듬었다.
내가 빙수가게에 들어갈 때만 해도 손님이 나뿐이었는데, 몇 분 안 되어 자리가 꽉 찼다. 안쪽 자리에 앉은 남자 두 명은 나와 같이 횡단보도를 건넌 사람들이다. 하나로 나눠먹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서 두 번째 그릇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살짝 놀란 표정이 그에게 들켰다. 나도 한 그릇 다 먹었으면서 왜 그들이 한 그릇으로 나눠먹을 거라 생각한 건지. 그가 살짝 웃어줘서 머쓱함을 덜었다.
내 바로 앞에 앉은 노부부는 과일빙수를 주문했다. 빙수를 나눠먹는 모습이 평범한 일상처럼 보여서 보기 좋았다. 노부부의 모습에 내 미래를 겹쳐보았다.
내 뒤에 앉은 가족은 -뒤에 앉아서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아이에게 계속 잔소리를 한다. 이렇게 먹어라, 똑바로 먹어라 같은 말들이 쏟아진다. 한국이나 대만이나 잔소리는 다를 바 없다.
다들 다 먹은 그릇을 제자리에 두고 나가버렸다. 분명히 테이블 옆에 반납하고 가달라고 쓰여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외국인인데 알아봤다고! 나는 그릇을 단정히 정리해서 반납하고 예쁘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한 순간이기는 하지만 착한 한국인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도 사실 조금 있었다.
다섯 시 반쯤 리우허 야시장(六合夜市)에 도착했다.
아직 밝아서 야시장 느낌은 안 난다. 하지만 곧 해가 질테니, 야맹증인 나로서는 나름 큰 도전이다. 밝은 김에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왔다 갔다 하며 꼼꼼하게 구경했다. 거의 다 먹거리다.
내 아들만 한 남자아이와 엄마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担仔麵(단즈미엔) 가게 앞으로 홀린 듯 걸어갔다. 고기고명과 새우, 고수를 올린 타이완식 국수다. 낯선 음식이면 바로 도전이다. 작은 그릇에 나온 국수가 딱 먹기 적당하고 맛있다.
참깨가 들어간 빵도 하나 골라 들었다. 뭔 맛인지 잘 모르겠다 싶은 것들로 잘 고르고 있다. 낯선 음식을 먹으면 기대치가 낮아서 그런지 왠지 더 맛있다.
마지막으로 오징어 통구이. 부들부들하고 간간하다. 한국에서는 해산물이 비싸니까 이런 건 가성비를 생각해서 일단 먹어줘야 한다. 120 TWD = 5,500원. 소화 능력만 받쳐줬으면 세 마리는 먹었을 거다.
오징어와 어울릴만한 맥주를 두 캔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어차피 맥주는 정해진 메뉴이긴 하다. TAIWAN BEER CLASSIC. 차이는 잘 모르지만 클래식이라고 쓰여 있어서 굳이 이걸로 샀다. 편의점 직원의 말을 잘 못 알아들으니 '타이완 사람이 아니야?' 묻는다. '응. 나 타이완 사람 아닌데?'라고 답하니 웃는다. 나도 웃었다.
배가 불러서 맥주 한 캔도 겨우 마셨지만, 더 마시고 싶은 기분이라 두 캔을 다 마셔버렸다. 조금 오버하고 조금 늘어진 내가 맘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