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에 갇히지 말 것

여행기록_나에게 돌아가는 길

by 초록테이블

계획에 없던 미술관 행을 결정하고 구글맵을 검색하니 트램을 타라고 나온다. 어제 들판에서 본 바로 그 전차다. 정방향이 맞는지 역방향이 맞는지 노선도를 보고 또 보고, 결국 잘 탔다. 옆에 있던 고등학생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기들끼리 어찌나 신이 나는지 깔깔 웃느라 정신이 없어 보여서 못 물어봤다. 말을 걸어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들의 거리낌 없고 소란스러운 웃음에 한참 동안 기분이 좋았다. 야외를 달리는 아담한 전차를 타니 없던 낭만도 샘솟는다. 타야 할 일이 없어도 그냥 타고 어디라도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전차가 도시를 천천히 달린다. 지나면서 멋진 건물을 사진으로 남기고, 앞자리에 앉은 꼬마와도 눈짓으로 놀아본다. 꼬마와 꼬마의 엄마에게 '바이' 인사를 하고 내리려는데, 앗 문이 안 열린다.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역에 도착하면 자동으로 열리는 문이 아니었다. 문 열림 버튼을 누른 문만 열린다. 하마터면 못 내리고 쭉 갈 뻔했다. 한 정거장 더 가는 것과 이미 인사를 나눈 꼬마와 머쓱한 것, 둘 중 무엇이 더 신경 쓰였을까 생각한다.


미술관은 호수와 이국의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멋있고 분위기 있지만 역시나 너무 덥고 지쳐서 머릿속으로는 커피만 생각했다. 전시 관람하기 전에 카페 먼저 가야겠다고 다짐하며 힘을 내 씩씩하게 걸었다. 미술관 1층 카페에서 따뜻한 에티오피아 커피와 호박파이를 주문했다. 100번의 커피를 마신다면 99번은 Hot으로 마시는 나라는 사람은 역시 이 정도 더위에는 Ice를 선택하지 않는다.


카페에 앉아 콧잔등의 땀을 닦고 모자를 벗어둔 채 오전부터 있었던 일을 노트에 주절주절 남긴다. 쓰다 보니 작은 노트에 다섯 페이지를 채웠고 시간도 한 시간이 흘렀다. 휴대폰을 들어 뒷면을 얼굴에 비춰본다. 몇 년째 사용 중인 거울로 만들어진 휴대폰케이스는 수시로 유용하다. 내 얼굴을 보는데 '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 땀에 푹 절었고 눈도 퀭한 데다가 머리카락도 들러붙어 볼품없다. 손수건으로 머리카락을 사이를 휘적대며 닦아본다. 커피를 한잔 더 마시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미술관으로 입장했다.



가오슝 시립미술관(KMFA)은 4층으로 규모가 상당히 커서 놀랐다. 게다가 별관도 따로 있단다. 크지 않은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미술관, 공원 그리고 시민센터 등이 많이 눈에 띈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건 훨씬 많겠지. 일흔을 넘긴 것으로 보이는 미술관 직원이 입구에서 티켓을 확인하며 "welcome!"이라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현대미술 전시다. 해외에서 몇 번 현대미술 전시를 본 적이 있는데 늘 좋았다. 살아가고 있는 현재와 기대하는 혹은 걱정하는 미래에 대한 예술가들의 생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이든 타국이든 국적에 관계없는 지구적인 유대감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관람하면서 크게 와닿은 작품은 사진을 남기고 노트에 한 줄씩 남겼다. 예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아무렇게나 인상적인 점과 감상을 적어두었다. 내가 쓴 메모가 부끄러우니 괜히 "예술은 정답이 없어서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고 혼자 외쳐본다.



1) Group Diving이라는 작품은 폐허가 되어가는 우리의 터전에 모두가 다이빙을 하고 있다. 아래를 보는지 못 보는지 안 보는지 모르겠다.

2) 샤오밍의 연결이 안 되는 시리즈. 삶의 장면이 나열되어 있는데, 연결되지 않지만, 그것이 우리의 매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 생각하게 만드는 Sequence of Time 시간의 연속. 잘 모르겠지만, 사람하고 마주 보고 바라보는 시간이 찰나가 아니라 시간의 연속성 안에 있다고 해석하고 싶다.

4) 양모로 만든 백설공주.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느낌이 들었다.

5) in the middle of nowhere 멀리 인적이 끊긴. 친구를 만들고, 모자를 빙하에 씌워주는 외로운 곰의 모습이 애잔하다.

6) 가오슝에서 김창렬 작가의 물방울 시리즈를 보게 되다니.



7) 눈사람이라는 제목의 영상작품. 빙수집에서 얼음을 잔뜩 갈아서, 치진섬 같은 바닷가에서 눈사람을 만든다. 눈사람은 점점 녹고 물이 되어 바닥에서 반짝인다. 한적한 마을 어귀에도 눈사람을 만든다. 지나가는 할아버지가 오토바이의 속도를 늦추며 눈사람을 바라본다. 눈이 내리지 않는, 일 년 내내 따뜻한 도시에 사는 사람에게 눈사람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에게는 꿈과 희망, 어쩌면 기적 비슷한 것, 숨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이 녹아 눈사람이 사라진다고 해도, 존재하는 그 순간은 충분히 빛났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작품마다 걸음이 멈추고 다양한 생각과 느낌이 피어난다. 온전히 나와 그 작품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혼자라 좋은 점이다.




갑자기 뒤에서 누가 말을 걸며 다가온다.

"파마 어디서 하셨어요? 헤어 스타일이 예뻐서요."

집중하고 있는데 누가 다가온 것에 화들짝 놀라 토끼눈으로 쳐다봤다. 이십 대 초반의 발랄한 두 명의 여성이 나를 보며 눈인사를 한다.

처음엔 나를 놀리는 건가 싶긴 했다. 아침에 머리를 대충 빗고 나와서 오전 내내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고, 치진섬에서 땀 범벅되고 지금은 모자를 벗고 땀을 말리는 중이니 말이다. 엄청 헝클어져 있는데 예쁘다고?

"놀라셨어요? 그냥 머리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 괜찮아요. 근데 파마를 한국에서 했어요."

"한국인이세요? 와. 한국인이구나."

두 명의 여성은 소곤소곤 대며 하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대화를 유도했다. 여행 왔니, 미술을 원래 좋아하니, 별관도 꼭 가봐, 대만은 와본 적이 있니, 야시장은 가봤겠지, 뭐가 맛있었니, 어디에 살아, 난 제주도에 가본 적 있어, 서울은 안 가봤어, 인스타그램 있니......


이 순간 나는 큰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첫째,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 갇히지 말자. 내가 보기에 좀 부족한 것 같아도 남이 보기에는 충분히 괜찮을 수도 있다.

둘째, 이야기를 나누고 풍성하게 여행을 하려면 역시 언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녀들과 헤어지고 나서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뭐 괜찮은 것도 같다. 셀카도 괜히 찍어본다. 다음에 미용실 원장님과 이 에피소드를 나눌 생각을 하니 즐겁다. 그녀들이 살짝 구겨져있던 내 자존감을 쫙 펴주었다. 그래그래. 나 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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