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감이 오르락내리락

여행기록_나에게 돌아가는 길

by 초록테이블

'기대'라는 것은 참 재미있다. 기대가 없다가 작은 재미를 발견하면 금세 행복해지고, 기대보다 조금 못하면 쉽게 실망해 버린다. 이래서 기대를 최대한 하지 말자고 나의 뇌에게 계속 말하지만, 나의 뇌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기대를 한껏 품고 시작하는 것이 여행일 거다. (사람이 언제 기대감이 가장 클까 생각해 보았다. 여행과 연애가 1, 2위가 아닐는지.)


혼자 바다를 보는 여행을 한 적이 있던가. 가오슝에서는 근처 치진섬에 가면 검은 모래 해변과 아름다운 석양이 있다기에 기대를 안고 출발했다. 숙소 근처에서 50번 버스를 타면 페리선착장까지 갈 수 있다는데 10여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지하철을 탔다. 하마싱 역에 내려서 걸어가는데 누가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커플이 앞서 간다. 운동복 반바지에 박시한 티셔츠, 볼캡, 백팩에 물병... 나랑 너무 똑같은 스타일로 입었다. 가까이 있으면 일행처럼 보일 것 같아서 걸음을 늦췄다. 이제 페리에 올라타고 치진섬에 가는... 엥? 눈 깜짝하니 도착이다. 5분이나 걸렸나?

치진섬에 가면 예쁜 포토스팟이 많단다. 하지만 나의 계획에 기념사진이 없다.


나의 계획은 이렇다.

(1) 등대에 올라가서 바다 전망을 본다

(2) 해변을 걷는다

(3) 해변가에서 커피를 마신다


언덕 위에 있는 등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치진섬의 모습이 아름답다. 멀리 해변이 보이고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조화롭게 옹기종기 모여있다. 소박한 느낌의 마을이다. 하지만 너무나 땡볕이고 더워서 휘청한다. 등대 앞 나무그늘에서 머리카락이 희끗하고 날씬한 할아버지 세 분이 앉아 옛날얘기가 한창이다.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군대 얘기인 것 같았다. 홍콩과 대만은 다르다는 내용인 것 같은데 뭐가 다르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젊은 시절 무용담을 나누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등대 앞에 느낌이 좋은 카페가 있었다. 하지만 야외테이블뿐이라 무더운 날씨를 해결할 수가 없는 데다가 곧 해변에 가서 커피를 마실테니까 꾹 참고 언덕길을 내려갔다. (이것은 나중에 후회하게 될 복선...)


내려오는 길에 3명의 가족과 마주쳤다. 아빠, 엄마 그리고 내 아이와 또래인 것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다. 아이는 더운지 상의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며 바람을 만들고, 힘들어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비쭉 내밀고 부모를 바라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아무 일도 없는 척 옷매무새를 다듬는 모습이 귀엽다. 나의 아이가 생각났다. 아들도 여기 왔으면 분명히 저랬겠지. 남편은 다 왔다고 하면서 아이 손을 잡아끌 테고. 아이는 징징거릴 것이고, 남편은 징징거리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다가 기운 내라고 달래줄 거다. 나는 그냥 좀 가자고 하며 아이의 등과 허리를 밀어줄지도 모른다. 가족이 없는 곳에서 가족을 떠올린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상상의 모습을 끌어내는 나를 보니, 내 머릿속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알겠다.


지도를 열어 커피가 맛있다는 리뷰의 해변 카페를 목적지로 설정하려는데, 뭐지? 어제 봤을 때는 아무 문제없었는데? 오늘 쉰단다. 그 옆의 카페도 쉬고, 그 옆은 아직 문을 안 열었단다. 여유롭게 바다를 보며 독서를 하겠다는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저 멀리 바닷속으로 -



그래. 어쩔 수 없지! 바다만 보고 가자! 모래가 곱고 까맣다. 해변이 길어 바다까지 참 먼데, 어째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한국에서 수영복을 챙길까 고민했던 게 살짝 머쓱해진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혼자 가만히 바다를 보다가 휴대폰을 들고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9월 30일 오전 11시 19분, 이 순간은 온 바다가 내 것만 같다. 해변에 쪼그리고 앉아 얇게 눌려진 조개껍데기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파도가 운동화를 덮쳐버렸다. 신발을 벗고 확인을 하면 더 축축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 아무 일 없는 척 그냥 가기로 한다. 못 본 척한다고 없는 게 되냐 싶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린다.


원래는 하루 종일 치진섬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석양도 보고 여유를 즐기려 했지만, 날씨와 카페 이슈로 오전에 섬을 빠져나왔다. 약간 속상한 마음이다. 섬에서 나오자마자 빙수집부터 찾는다. 대만이 빙수로 유명한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나처럼 일 년 내내 '뜨거운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사람조차도 빙수집을 찾게 되니까 말이다. 이번 여행이 주제가 '안 하던 짓 해보기'이기 때문에 평소 절대 안 먹을 것 같은 흑당이 들어간 푸딩빙수를 시켰다. 치아와 잇몸이 모두 얼얼해질 정도로 시원하고 짜릿하다. 좋은 선택이었다.



간식도 먹었겠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며 지하철역 방향으로 발을 옮기다가 우연히 기념품 가게를 발견했다. 대만 스럽고 개성 있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이거다. 이런걸 원했다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샤오롱빠오를 먹고 있는 귀여운 판다 키링과 휴대폰 거치대로 쓸 수 있는 키링을 골랐다. 이것만 사려고 했는데, 신들의 무기 컨셉의 랜덤 키링을 발견했다. 우리 아들이 옆에 있었으면 이거 보고 얼마나 흥분할까 생각하니 나까지 벅차오른다. 혹시 몰라서 직원에게 물어본다.

"칠성검을 가지고 싶은데, 방법이 있을까요?"

"모양을 생각하시고 포장지를 직접 만져서 고르셔야 해요."

정말 거기에 있는 수십 개의 포장지를 다 만졌다. 그리고 아리송한 후보 3개를 들고 한 번만 검토해 달라고 했더니 웃으며 골라준다.

"이거 같은데요."

"혹시나 잘못 골랐어도 절대로 원망하지 않을게요."

회심의 농담을 던졌고, 귀엽고 예쁜 직원이 웃어줬다.


그럼 오후에는 어디 가지? <가오슝 시립미술관>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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