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딱 스무 살이 되던 해 우리 집에 와서 가족이 된 반려견의 이름은 '티즈'였다. 반려견이 처음이었던 우리 집에서 몽글몽글 하얀 털을 가진 따뜻한 생후 3개월의 새끼 강아지는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작고 귀엽고 무해한 생명체였다. 이 생명체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중 강아지가 '말티즈'여서 우선 티즈야, 티즈- 하고 불렀는데, 어느새 이 순진무구한 생명체가 '티즈'라는 이름에 고개를 휙 휙 돌리며 알아듣는 바람에 그대로 반려견의 이름은 '티즈'가 되었다. 티즈, 티--즈, 우리 예쁜 티즈. 세상에서 제일 예쁜 티즈.
2년 전 티즈가 하늘나라에 간 날, 본가가 아닌 서울에 있어서 티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따뜻한 티즈를 마지막으로 안아 보지도 못했는데 하늘나라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와 동생과 엉엉 울며 통화를 했다. 그 당시 세계 일주를 하고 있던 언니에게 보이스톡으로 무작정 전화를 걸어서 티즈가 죽었다며 서럽게 울었다. 숨이 넘어가게 울던 내 목소리와,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던 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그대로 들린다. 언니는 그때 어느 대륙의 어느 나라에 있었는지, 그때 그 나라는 몇 시쯤이었는지.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도.
지난 추석 본가에 내려갔는데, 동네 오래된 단골 고깃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말티즈를 처음 만났다. 고깃집 사장님은 엄마의 오랜 친구분인데, 엄마가 그 친구분의 말티즈를 티즈야~ 하고 불렀다. 티즈가 아니고 자몽이야. 고깃집 말티즈의 이름은 자몽이었다. 내가 자몽이인 줄 아는 자몽이는 못 알아듣는데도, 엄마는 자몽이를 다시 한번 티즈~ 하고 불렀다.
추석 당일에 이제 막 200일이 넘은 조카가 본가에 왔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투정 하나 안 부리며 꿀잠을 자고 일어난 조카를 동생이 엄마와 내가 자고 있는 침대에 내려놓았다. 잠결에 눈을 뜨니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신기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앉아 있다. 엄마는 잠결에 조카의 엉덩이를 통통 두드리며 우리 예쁜 티즈~ 라고 말했다. 내 이름을 아직 모르는 조카는 멀뚱멀뚱 온순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본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엄마에게 세상의 작고 귀엽고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모든 존재는 티즈구나.
대부분의 반려견은 주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 이별의 고통을 겪은 후로 다시는 반려견을 키우지 않거나 혹은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또 반려견을 키운다. 우리 가족의 경우는 전자인데, 가끔 이렇게 티즈 같은 생명체를 만나서 나도 모르게 티즈라고 부르는 순간, 반려견은 죽고 이름은 남는 쓸쓸함에 대해 생각한다. 자꾸만 그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 진다.
그럴 때마다 위로가 되는 한 장의 그림이 있다.
죽어서도 나를 기다렸다가 마중 나오길 바란다니 이기적인 마음 같지만, 하늘나라에서 티즈야~ 하고 이름을 부르면 저 멀리서 마중 나오는 그 눈물 나게 익숙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면, 죽는다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동안 이 이야기를 매일매일 생각했다. 반려견이 떠나도 삶은 계속되니까.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슬픈 상상을 하면 늘 간식을 더 많이 주지 않은 것, 산책을 더 많이 시켜주지 않은 것 같은 후회만 남으니까. 차라리 제멋대로 믿고 싶은 대로의 상상을 한다.
티즈야, 우리 예쁜 티즈. 세상에서 제일 예쁜 티즈.
한없이 이름을 부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