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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May 03. 2024

남산 산책로

일주일 사이에 가로수의 색깔이 초록색으로 확 바뀌었다. 꽃잎을 다 떨구고 난 벚나무 가지에 연초록 새잎이 돋아나더니 금세 나무를 뒤덮어 푸른색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파트 현관 앞의 목련과 벚꽃이 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길 모퉁이에서는 철쭉꽃이 초록색 새 잎 사이에서 강렬한 진분홍색을 뿜어내고 있다.


오늘은 남산의 신록을 감상하며 걷기로 한다.

3호선 동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열네 명이 모였다. 이곳은 바로 장충체육관 앞이다. 장충체육관을 지나 동호로를 따라 약수동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한양도성길 입구라고 쓴 표지판과 오른쪽에 도성길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오늘날까지 한양도성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면 왼쪽으로 광희문과 동대문으로 불리던 흥인지문으로 성곽이 계속 이어졌겠지만 이제는 그  구간은 소실되고 그 자리에 장충동의 주택단지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서 있다.


남산 구간 한양도성길은 외부순성길과 내부순성길이 있는데 우리는 성곽 안쪽길인 내부순성길을 택한다. 이 성곽 안쪽 길은 호텔의 사유지여서 오랜 기간 개방되지 않고 있다가 10여 년 전쯤 서울성곽길이 복원되면서 일부가 산책로로 허용된 길이다.

성 안쪽의 이 산책길이 명품 숲길이다. 가을의 단풍길로도 손꼽히는 이 길에 들어서자마자 오늘은 온통 초록빛이다. 성곽길의 나무 색깔이 변하니 전에 다니던 길과 다르게 보여 어떤 친구는 오늘 처음 오는 길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비로소 그 뜻을 정확히 깨닫게 된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 가 바로 이럴 때를 말하는 게 아닌가? 눈부신 연초록 나뭇잎들을 보니 지난주와 2주 전에 보고 감동했던 벚꽃과 튤립의 기억이 어느새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눈부신 신록에 취한 우리들에게 꽃의 기억을 잊지 말라는 듯 성곽길 도중에  활짝 핀 겹벚꽃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서 우리를 맞이하며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 길 옆에는 신라호텔의 야외 조각정원도 있어 우리는 예술품까지 감상하며 걷는 덤도 얻는다. 도성길이 끊어지는 곳에 반얀트리 호텔(옛 타워호텔)의 골프연습장이 나오고 이 옆을 지나면 남산 타워가 보이는 호텔의 출구 쪽으로 가게 된다. 출구에서 나가면 길 건너편에 국립극장이 보인다. 교차로를 건너 국립극장의 왼쪽 길로 오르다가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북측 산책로가 시작된다. 여기에 정상으로 가는 순환버스 정류장도 있고  끊어졌던 한양도성길도 다시 이어져서 숭례문까지 계속되지만 우리는 옆으로 난 북측산책로를 걷는다.  지난해 가을 때늦은 단풍철에 이 길을 걸었는데 그날은 비 오는 날이어서 모두 우산을 쓰고 걸었기 때문에 하늘은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연초록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을 만끽할 수 있다.


북측산책로 도중에 운동기구와 정자가 있는 쉼터에서 잠깐 쉬고 계속 걷다가 남산 한옥마을로 내려간다. 한옥마을 남쪽 입구로 내려가기 전 건너야 하는 육교가 있는데 육교 양쪽 난간에 나란히 심겨 있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서 꽃을 본 우리의 사진사들은 또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봄날의 한옥마을은 그야말로 관광지 풍경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 나온 듯한 젊은 직장인들과 외국인관광객들, 등산복차림의 남녀들, 우리 같은 노인 산책객들로 한옥마을 마당이 평일인데도 북적거리고 있다.


우리는 마당에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통과해서 충무로역 앞에 있는 한 뷔페식당으로 들어간다. 이 식당에서는 오래간만에 미국서 온 친구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다. 이 친구는 10년 전  우리 모임이 걷기 시작하던 초창기에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모임에 나와 우리와 함께 걷기도 하고 점심도 같이 하기도 했으나 근년에 와서 다리 건강이 좋지 않아 같이 걷지는 못하고 코로나시절 이후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보겠다고 고맙게도 점심에 찾아온 것이다. 여고 졸업하고 처음 만난다는 친구들도 있어 모두 반가워하며 점심을 함께 한다.

이 식당은 요즘 말로 가성비 좋은  뷔페식당으로 저렴한 가격이지만 음식이 좋다고 모두 만족한다. 후식도 넉넉히 차려져 있으니 친구들이 집에서 만들어 와서 나누어준 간식은 따로 챙겨 집으로 싸가지고 간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 남산의 신록을 감상하고 오랜만에 먼 곳에서 온 벗도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고 모두 작별을 아쉬워하며 충무로역에서 헤어진다.

집에 오니 오늘도 만이천 보 이상 걸었다.


2024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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