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예레반-트빌리시 (3.29)
인도인들 때문에 또 밤잠을 설치고, 다시 잠들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7시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식 시간도 한참 남은 이른 시간인데 필리핀 렘마가 침대에 없길래 주방엘 가보니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일어났냐며 자리에 앉길 권유하곤 지금 밥을 먹겠냐고 물어봐왔다. 오늘 내가 떠나는 날이라 내게 밥 한 끼를 해주기 위해 나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 아침을 만든 것이다. 펜네 파스타가 들어간 닭고기 수프였다. 여행 중 친절한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 왔지만, 이런 따뜻한 선물은 처음이라 마음이 일렁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숙소를 나섰다. 며칠 전 먼저 떠난 베트남계 캐나다인 '촹'아저씨가 알려준 대로 숙소 앞 버스정류장에서 5번 버스를 탔다. 시내버스는 제대로 탔는지를 알 수가 없어서 항상 긴장된다. 아르메니아 말로 시외버스 터미널이 '킬리키아'인데, 옆에 선 승객에게 '킬리키아?(킬리키아 가요?)' 묻자 맞다고 해줘서 그제야 안심했다. 버스 터미널은 예레반 시내에서 멀지 않았다. 인터넷에서는 오전 9시 11시 이렇게 두 시간 단위의 버스 시간표를 봤는데, 역시나 버스 시간표는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듯하다. 10시쯤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트빌리시에서 예레반행으로 온 버스가 손님들을 내려주고 다시 돌아가면서 타고 갈 손님을 급히 모객하고 있었다. 예레반과는 완전히 마지막이라 남은 드람을 탈탈 털어 터미널 매점에서 담배를 몇 갑 샀다. 주변 지인들 중 흡연인들에게 나눠 줄 선물로는 로컬 담배 만한 게 없는 것 같다.
중간에 휴게소를 한 번 들르고, 국경 검문소에서 출입국 심사를 받았다. 검문 대기 중인 차가 거의 없고 우리 차 승객들 대부분 검문에 별 무리가 없어서 속성으로 통과했다. 별일 없겠지만 국경에서는 괜히 쫄리는 심정이다. 예레반에서 트빌리시까지는 약 5시간 정도 걸렸다. 이번에도 물론 조그만 승합차 같은 미니버스였고, 자리는 불편했지만 이미 좀 익숙해진 터라 견딜만했다. 이 여행에서 이런 장거리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창밖 풍광을 보는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트빌리시에 도착했는데 여러 번 오갔던 '디두베' 전철역 인근 버스터미널이 아니라 전혀 생소한 곳이었다. 핸드폰으로 맵을 보니 어디 있는지는 알겠는데 근처에 지하철역도 없고 숙소가 있는 구시가지까지 어떻게 갈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나와 같이 버스에서 내린 아시아계 외국인 여성분도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이는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다가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물었다. 마침 그녀도 숙소가 구시가지 인근이라 우리는 택시를 셰어 하기로 했다. 호객하는 여러 택시기사들과 흥정을 하는데 다들 말도 안 되게 높은 금액을 불러서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지금까지 만난 택시기사들 중 가장 저렴한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있어 그 차를 탔다. 후에 생각해보건대 숙소와 터미널 거리를 생각하면 그것도 바가지 씐 금액이긴 했던 것 같다.
나는 구시가지 내에서 평이 가장 좋고, 또 한국인 후기가 많은 숙소를 골랐다. 이제 출국까지 쭉 트빌리시에 있을 예정이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기도 귀찮아서 4박을 한꺼번에 계산했다. 숙소 이름이 '알카트라즈'고 감옥 컨셉의 호스텔이었는데.. 아뿔싸 감옥 콘셉트 이래긴 해도 너무 감옥컨셉이었다. 도미토리가 6인실 4인실 나눠져는 있어도 문 대신 쇠창살이라 휴게실이고 식당이고 공간 구분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침대도 감옥 컨셉에 맞춰 간이침대 모양이었다. 내가 체크인을 할 당시엔 6인실 4인실 다 합쳐서 손님이 나뿐이었다. 컨셉도 명확하고 화장실이며 휴게실이도 아주 깨끗하고, 주인으로 보이는 호스트와 숙소 스태프 둘 다 굉장히 친절했다. 월컴 드링크로 술과 안주를 권했는데, 구 소련 국가답게 술은 마시마 마자 얼굴이 구겨지는 독한 술이고 안주는 생소한 닭 심장 볶음이었다. 자기들끼리만 먹기 뭐 해서 음식을 나눠주는 게 뭔가 한국 정서 같았다. 그러던 중 저녁에 도미토리 손님이 체크인했는데 이란인 남성 3명이었다. 문득 보니 이 숙소에 나를 제외한 5명 모두가 남성이었다. 토미토리만 있는 숙소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상황이긴 하지만, 여태껏 이렇게 다수의 사람들 중 유일하게 여성이었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5명 중 주인을 제외한 4명은 모두 이란인이었는데, 이란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불쾌했던 기억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더욱 이 숙소가 불편해졌다.
이런 불안을 차치하고도 큰 문제가 하나 더 있었는데, 같은 돔의 3명의 이란인 모두 거의 탱크 수준으로 코를 골았다. 아무튼 이 숙소에서는 모든 게 다 살면서 처음 겪는 경우였다. 10인실 숙소에 묵을 때도 이 정도로 코 고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아마 그 정도로 코 고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싱글, 더블룸에 가지 않을까) 3명 전부 다 이런 무지막지한 코골이들이라니. 방 문이 없어서(쇠창살;) 춥고, 거실과 식당 불과 소리 때문에 훤하고 시끄럽고, 화룡점정 탱크 소리 때문에 아주 밤을 꼴딱 새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