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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soo Jung Jul 31. 2020

순간의 감정 조각을 대하는 자세

감정의 시작

일상이란 순간의 연속이다. 한 순간은 수많은 조각들로 구성된다. 나 자신을 잠시 떠나 그 순간을 재구성해 본다면, 우리 자신도 순간을 이루는 조각 중 하나가 된다. '나'라는 조각과 다른 조각들이 어우러져있다. 나 자신이란 조각은 다른 조각들을 체험한다. 그러니까 각자에게 일상은 '나'라는 조각이 그 순간을 구성하는 다른 조각들을 체험하는 일의 연속이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원치 않아도 이 순간의 연속에 참예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순간 또한 순간이며, 그 순간을 이루는 '나' 이외의 조각들이 있고 당신은 그 조각을 체험한다. 그렇게 '나'의 조각은 한순간 한 순간의 본질이 된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다.


앞서 '재구성해 본다면'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원한다면 그 순간의 조각들을 우리의 기억에 담을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조각들을 다시 불러 하나하나 고찰해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현재의 것을 고찰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고찰하는 순간 우리는 실질적으로 고찰의 대상의 지난 순간의 모습을 가지고 생각하지 않은가. 물론 그것이 현재와 같을 수도 있으며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우리의 고찰의 대상은 지난 순간을 이루는 조각들 뿐이다. 


우리는 그 조각들을 '나'라는 조각과 함께 불러와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나'라는 조각과 개별적으로 고찰해 볼 수도 있다. 어제저녁밥을 먹을 때 썼던 숟가락이나 입었던 옷 등은 우리의 기억력만 허락해준다면 그런 것들을 개별적으로 놓고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라는 조각이 굳이 재구성 요소 안에 포함되지 않아도 데려와 고찰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조각은 조금 특별해서 '나'라는 조각과 별개로 고찰하려면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토요일 아침 개운하게 눈이 떠져 창밖을 보니 날씨도 딱 당신이 좋아하는 날씨다. 이런 날에 오래간만에 집 청소를 하기로 하고 창문을 연다. 어디부터 시작할까 봤더니 빨래는 이틀 전에 해놓았고 바닥은 어제 다 닦아놨다. 그래도 오늘은 꼭 청소하고 싶은 날씨이다. 그래서 당신은 부엌을 청소하려고 마음먹는다. 찬장을 열었는데 언제 담아놨는지 모를 가루 양념통들이 눈에 거슬린다. 정체 모를 흰색 가루가 담긴 통을  집어 든 당신은 찐득찐득함을 느끼며 설탕통이라 확신한다. 통을 씻고 새 설탕으로 채워 넣으려고 마음먹은 당신은 뚜껑을 열어 싱크대 위에서 통을 기울인 후 팔을 한두 번 턴 후 눈앞으로 가져간다. 설탕이 여전히 안쪽에 엉겨 붙어 남아있다.


'나'라는 통 안에 존재하는 달라붙기 쉬운 성질을 가진 설탕가루 같은 것. 그게 감정인 듯하다. 완벽하게 분리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른 조각들은 개별적으로 떼어놓는 게 비교적 쉬워 관찰대 위에 올려 요리조리 살펴볼 수 있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나와 분리하기도 어렵고 분리한다고 하더라도 관찰대 위에 올려놓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며 그렇기에 고찰까지 데려가는 것에 좀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 같다.


그럼 내 감정은 설탕이 아니라 소금일까. 겉보기엔 비슷하게 생겼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아니면 결은 같지만 조금은 차이가 있는 각설탕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사람들과 나 그러니까 정서적 사이코패스는 느껴지는 감정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감정에 관해서 스스로에게 주변에게 질문하고 고찰해 본 결과 느껴지는 감정 자체가 다르진 않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감정이 들어온다. 내 안에 존재하는 감정은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같은 가루 설탕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를까. 여러 사이코패스 관련 논문들은 (그 연구들이 내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기준의 사이코패스를 대상으로 했다는 것은 보장할 수 없지만) 사이코패스의 감정적 다름에 대해서 파헤쳐보려고 애를 쓴다. 나도 보통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감정과 나의 감정에 뭔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 알아내려 애썼다. 감사하게도 나는 소수에 해당하기 때문에 저쪽 사람들처럼 비교대상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나는 ‘나’라는 조각과 ‘감정’이라는 조각을 분리하는 것이 쉽다. 통에 든 가루 설탕, 그 본질이 사람들과 다르지 않지만 내 감정은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위생이나 편의성에 의해 쉽게 볼 수 있는 개별포장된 설탕과도 같다. 같은 설탕이 담겨있지만, 통에 엉겨 붙지도 않고 더 쉽게 분리할 수 있다. 마치 나와는 별개의 것처럼 쉽게 뺄 수도 넣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만약 내가 어제 카페에서의 한 순간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고 그 카페 안 소파와 내 감정을 고찰해보겠다고 한다면, '나' 조각과 별개로 존재하는 소파 조각을 객관적으로 고찰하는 것과 '나'조각 안에 존재하는 감정 조각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는데 드는 에너지가 같다.


이것은 아마 앞으로 현재 느끼는 감정이 아닌 과거의 순간에서 느꼈던 감정에 대하여 타인에게 전달할 때 작용하는 공감능력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사이코패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사이코패스가 아닌 사람의 차이가 존재한다. 또 이것을 더 발전시킨다면 사이코패스가 감정을 느끼는 방식에 대한 설명을 좀 더 간결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살펴봤을때 사이코패스의 감정은 느낌에서가 아니라 인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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