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짧은 고찰
최근 만난 꽤 마음에 드는 친구는 내가 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웃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농담이 아니라고 짚고 넘어간다. 그 친구는 여전히 웃는다. 나는 그 친구가 마음에 드는 것과는 별개로 그 친구의 이 점도 참 마음에 든다.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 끝남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어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선호하지 않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가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낸다. 그 누군가가 소중한 사람이라면 반응은 더욱더 심각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꺼리는 이유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할 수도 있으며 복잡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삶에 대한 사랑이든 죽음에 대한 증오이든 따질 것 없이 죽음이 최대한 늦게 찾아오길 바라는 사람들의 바람을 존중한다.
나는 죽음이 싫지 않다. 피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것은 내가 사이코패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사이코패스적 기질 때문에 단어와 특정 감정이 결합되어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 발생되는 막연한 감정은 없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죽음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삶이 재미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삶에 좋은 게 없는 것도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은 매우 좋은 것이며, 함께든 혼자든을 떠나 세상에 존재하는 활동들 중에도 나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들이 참 많다. 그리고 그것을 택해 재밌는 시간들의 연속으로 시간을 꾸려 나간다.
삶이 힘든 것도 아니다.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나의 삶에서 결핍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다고 말하지만 나는 귀찮다고 표현하는 것들은 뇌를 긁어놓긴 하지만 중심을 흔들진 못한다.
그렇다고 죽음을 내 손으로 내 삶에 끌어 올 마음도 없다. 싫지 않다고 했지 좋다고 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만약 죽음을 관장하는 힘이 나에게 자연에 섭리에 어긋나지 않게 선택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나는 삶 대신 죽음을 택하고 싶다. 나의 죽음이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은 내가 이 세상에 내가 자연적으로 필요한 일이 없다는 소리이며, 그 이후의 삶에는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없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에 별 볼일이 없다.
죽음에 대한 나의 태도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와 같다. 내 삶은 자연스럽게 이끌리고 있다는 게 믿긴다. 이끌림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죽음이 그 상황에서는 그것이 나에게 미덕이며 선이다. 죽음을 싫어하는 세상의 보편적 가치와는 무관하다. (보편적 가치는 유동적이고, 그 위엔 궁극적 가치가 있다. 보통 이 두 가지가 함께 인 이유는 보편적 가치를 기준으로 사회의 룰을 만들기 때문인데, 일단 제정된 법을 지키는 것이 궁극적 가치에 포함되기 때문인 것 같다. 보편적 가치 자체가 궁극적 가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죽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 해도 나는 아쉬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지금 당장 죽는다는 가정) 슬퍼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나를 잘 알아 내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의 삶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존중한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미움이 마음에 슬픔과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더라도, 그리고 사이코패스가 아닌 내 소중한 사람들은 그것을 떨쳐버리는 것에 조금은 시간이 걸린다 할지라도, 그들은 내가 지금 당장 죽는다면 그것이 나의 자연스러운 운명이었음을 그리고 그 운명이 나의 삶의 중심이었음을 알기에 적어도 나를 위해 슬퍼한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아 살짝(아니 아마도 많이) 무료해진 그들의 삶에 대한 유감은 있겠지 아마. 그것은 그들 자신을 위한 감정이다.
나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는다.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요즘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정도의 생각 나눔으로 받아들인다. 만약 죽음에 대한 태도를 알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대부분의 사람과는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나랑 이야기하는 그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기분 나쁨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 스스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일부러 불쾌감을 주는 상황을 만들려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말이다.
최근 만난 꽤 마음에 드는 친구는 내가 나의 죽음에 대해 농담조로 이야기할 때마다 웃는다. 나는 그 친구가 내가 나의 죽음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해도 불편해하지 않을 친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죽음을 논하는데 재밌어하는 그 친구가 재밌다. 그래서 나는 그럴 때마다 농담이 아니라고 짚고 넘어간다. 그 친구는 여전히 웃는다. 나는 그 친구가 마음에 드는 것과는 별개로 그 친구의 이 점도 참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