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과 감정
사랑은 행복보단 미움과 함께 분류되어야 한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감상(感想)이기 때문이다.
'만나면 잘 맞을 것 같다' 생각해왔던 내 친구와 내 동창의 연애는 얼마 못 가 끝이 나고, 오랜 기간의 연애를 끝내고 오히려 얼굴이 더 좋아졌던 친한 언니는 오래간만에 밥 한번 먹자는 전 애인의 연락을 받고 고민 중이라는 것을 나에게 전해왔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것에 대하여는 정말 오래도록 생각해왔지만, 도무지 맑아지지 않았다. 마치 어젯밤 끼고 잔 렌즈가 다음날 온종일 날 괴롭히듯 뇌 한편에서 뻑뻑함이 감지되는 것만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나 말고 모두가 가지고 있다던 '타인의 감정이 나의 감정으로 흘러들어오는 능력'은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난, 그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는 난 타인의 감정을 추론하기 위한 정보를 최대한으로 수집해야 했고, 이러한 절차에 너무나도 익숙해지다 보니 자연스레 주위에 일어나는 일이나 현상에 대해 감각적으로 민감하게 되었다. 감정은 외부에 대한 자극에서 느끼어 일어나는 기분이나 심정이다. 그러므로 감각적으로 민감하다면 외부에 대한 자극이 더 많이 들어올 것이고, 기분이나 심정이 드는 빈도수가 잦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가진 나에겐 그것이 드는 것과 내 감정으로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 그러니까 인지하는 것은 자동으로 분리된 절차이다. 감정이 생겨나면 그것은 자동으로 나의 마음 어딘가에 걸려 선택을 기다리는데, 의지에 따라 그것이 지속되거나 보류, 또는 폐기된다. 감각에서 비롯된 감정은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또 지금까지 정의 내려봤던 감정 중 혹 비슷한 것은 있는지 비교해보고 분류하는 작업을 거쳐 그제 서야 다른 사람들이 표현하는 '감정이 느껴진다'라는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기쁨이나 슬픔 등은 마치 뿌연 구름처럼 밀려 들어와 위의 가공 절차를 거쳐 비가 되어 마음에 안착하여야 그제야 난 감정을 느끼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타인의 감정을 생각할 땐 마음에 밀려들어오는 구름과 흡수되는 비만 없을 뿐, 이야기를 듣고 분석하는 절차는 같다. 앞서 말한 두 연애 중 첫 번째의 당사자는 내겐 정말 소중하고 또 소통을 자주 하는 친구이기에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정보들이 주어졌는데, 덕분에 난 사랑에 대해 고찰해보았고, 덕분에 나는 사랑을 분류하는 나의 방식이 잘못되었기에 갑갑했던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나는 사랑을 기쁨이나 슬픔 등과 같은 상황이나 요소 때문에 드는 기분인 '감정'과 함께 분류하고 있었기에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았던 것이다.
행복, 기쁨, 슬픔, 화 등의 감정을 잘 살펴보면, 어떤 상황이나 존재 '때문에' 행복하고, 기쁘고, 슬프고, 화가 날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랑은 다르다. 어떤 상황이나 존재 때문에 내가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고 그 존재 자체로부터 오는 나의 느낌과 생각이기에 감상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그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레 생긴다. 자의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없앨 수도 없다. 살다 보면 이상하게 좋은 것들이 있다. 딱히 이유가 없이 그냥 좋은 마음이 드는 것들이 있다. 그 좋은 마음이 먼저 생기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도 있는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며,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술관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녀 보자.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혹은 인스타에서 핫한 작가의 전시회의 대표작품,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생각 없이 살펴보자. 그 순간 우리를 사로잡아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림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오목조목 살펴본다. 살펴보고 당신이 정말 마음에 드는 부분과 약간은 (혹은 많이) 거슬리는 부분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그 그림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 그림은 여전히 당신의 마음에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일으킨다.
여행을 가서도 아무 생각 없이 걸어보자. 인생 샷 건지기 좋은 장소, 꼭 먹어봐야 할 음식 5가지는 나중에 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편안하게 걸어보자. 걷다 보면 느낌이 좋은 장소가 있을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벅참과 희열이 밀려들어 어느새 당신은 이 여행 오길 참 잘했다 생각이 들어 멈춰 섰을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아무리 담으려고 해도 담기지 않을 것이다. 그 느낌이란 것은 시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기에 그것은 당연하다. 조금 더 그 장소에 있었는데 당신이 평소 불호하던 부분들이 더해진다. 잘 정돈되지 않은 쓰레기통이라던가, 칼바람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도 그 장소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을 때가 있다. 여전히 그 장소는 당신의 마음에 원인 모를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대상에 대한 감상이란 것은 이유가 없다. 있다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 수는 없다. 막연하다. 좋아하고 싶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싫어하고 싶다고 싫어지는 것도 아니다. 선택권이 없다. 대상에 대한 느낌이 먼저 일고, 그 후에 그것에 대해 알아가는데, 대상의 부분 중엔 우리가 좋아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싫어하는 부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좋아하는 부분들, 그것들이 대상을 생각하거나 만나면 생겨나는 나의 마음속 느낌의 이유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까 부분을 좋아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 될 순 없다.
감정에는 원인이 있지만, 감상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명확한 원인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사랑을 감정으로 분류하며 이유를 찾으려 할까. 한 가지 가능성은 우리는 확실하게 답이 있는 것을 선호하는 사회에서 살아왔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감상이 왜 드는 것일까를 생각해보면 참 답이 없고, 우리는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힘들어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상의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고뇌하던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