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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soo Jung Oct 11. 2019

나를 보는 나의 시선은 익숙하다

순간적 감정 반응의 억제

오늘의 글은 다른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가진 사람과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는, 나의 감정과 이성의 분리에 대한 분석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요소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한 감정을 느낀다. 만약 그 모든 감정이 주변 상황을 고려함 없이 가감 없이 분출된다면 세상은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감정은 이성에 의해 잠시 억제되어 때에 따라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표현되지 않기도 한다.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는 이 억제 기술이 어른에 비해 무척 서툰데, 이것을 볼 때 이 능력은 보통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경험하고 자연스레 필요성을 느끼며 더욱 견고 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타당한 이유로 상사에게 지적받고 그 감정에 휘둘려 그 자리에서 울거나 왁왁 거리는 나이 먹은 사람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테지만, 부모님을 따라 장례식장에서 어떠한 이유에서든 웃음을 참지 못한 아이나, 공공장소에서 부모님께 혼이 나서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에게는 저 나이 먹은 사람만큼의 차가운 시선을 보내진 않는다. 


하지만 이 당연한 사실은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나도 사람이기에 여러 가지 자극에 의한 감정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을 억제하는 기술은 나에겐 연륜의 산물은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감정이 이성을 거치지 않고 분출되는 경우가 없었다. 모든 자극에 대해 생각했으며 분출하기 전에 느껴지는 것을 고찰하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은 나에겐 당연했다. 물론 나이가 적을 때일수록 지식의 범위가 좁았기에 상황을 고려해서 표현했다 하더라도 적절하지 못하게 표현된 것들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들이 결코 억제되지 못하고 멋대로 뛰쳐나간 행동들은 아니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치원 때는 넘어져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선택' (내 관점에서는 감정표현은 언제나 선택이었으니까) 친구들이 납득이 가지 않아 이해하려고 한참을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물론 나도 넘어지면 아프고 억울하고 슬프고 화나고 하여간 울고 싶긴 했지만 잠시 생각해보면 운다고 득이 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친구들은 반응을 참을 수 없기에 바로 울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느끼는 게 다른 것일까? 느껴지는 정도가 다른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나도 기쁘면 웃음이 나고 슬프면 눈물이 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과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막는 것은 나에겐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고 그 감정을 분석해서 불필요한 감정에 경우 고이 접어 더 이상 그 감정이 들게 하지 않는 것도 가능했다. 나는 이런 나의 특점에 대해 틈이 나는 대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몇 년 전 나는 내 이성은 언제나 감정을 느끼는 나를 제삼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극에서부터 오는 감정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느끼지는 않지만 이해하고 분석해서 어떤 반응을 할지 결정하는 나. 한 사람이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처음에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인가라고 생각했지만,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느낌이 없어야 하는데 오히려 나는 나의 친구들보다 자극에 예민하고 나의 감정을 빠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반응의 절차를 살펴봤을 때는 감정이 들면 억제와 동시에 분석하여 느껴야 할 감정, 느끼고 싶은 감정, 불필요한 감정으로 분류하는 게 먼저이며, 타인과 주변 상황을 고려해야 할 환경에 놓여있으면 최대한 적절한 표현을 선택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꾸며내거나 거짓된 표현은 아니다. 나는 속이는 것과 감정이 오해받는 것을 싫어하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이지 거짓된 감정을 꾸며내거나 만들어내어 전달하지는 않는다.)


신기한 것은 억제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 감정을 그대로 흘려보내도 되는 환경이라도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아 감정을 분석하는 것이 멈춰지는 것은 아니다. 억제하지 않아도 되는 때, 그러니까 나의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가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때는 홀로 있을 때와 편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인데, 그런 환경에서 나는 기쁠 때는 큰소리로 웃고 슬플 때는 울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감정에 대해 생각하고 분석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보통 눈물이 흐르다가도 고찰에 집중해 눈물이 멈추는 경우도 있다. 생각해보니 보편적 기준으로 판단해보면 장면이 참 기괴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이것이 어떤 프로세스로 일어나는지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왜 가능한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나의 감정은 느껴짐과 동시에 타인이 감정처럼 분석되어 이내 다시 나의 감정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사이코패스적 기질 중 이성과 감정의 분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이코패스들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감정 컨트롤과 선택이 가능한 것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고 다양한 프로세스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관련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로 시작을 하였는데, 나의 경우에는 삶을 직접적으로 살아가는 나와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가 따로 있다는 설명 하나로 감정과 이성의 분리뿐만 아니라 사이코패스적 기질과는 관련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다른 성향들 또한 설명이 가능하다. 사이코패스적 기질의 본질이 정리되는 날에는 그 본질을 바탕으로 둔 다양한 삶의 형태들을 살펴보며 재미난 연구들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날을 기대하며 이번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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