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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Jul 03. 2024

두 번의 희망 | 그림책 'After the rain'

가츠미 고마가타의 그림책 'After the rain' 비평



아코디언 북의 기본 구조


아코디언 북은 용어 그대로 아코디언 악기 모양처럼 생긴 책이다. 아코디언 북은 긴 종이를 접어 만들기 때문에 갖게 되는 구조적 특징이 있다. 우선 종이를 접은 기준으로 페이지가 구분되는 동시에 모든 페이지는 연결된 하나의 장면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페이지를 넘길 때 독자의 호흡이 한 번 끊어지는 일반적인 코덱스 북과는 달리 좀 더 긴 호흡을 갖는다. 그리고 종이를 접어 만드는 작업 과정상 필연적으로 가려지지 않는 뒷면이 생긴다.


위 특징들을 고려해 아코디언 북 구조의 그림책을 만든다면, 분할된 장면이 총합이 되었을 때의 결과를 예상하여 작업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페이지 단위의 장면들과 접은 종이를 다 펼친 하나의 그림이 서로 연관된 의미를 가지는 방향으로 만드는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작가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싶다면 책 구조가 주제나 의미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기능하도록 설계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한 그림책의 앞면과 뒷면을 모두 채울지도 결정해야 한다. 앞면 처음부터 뒷면 끝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림을 그려도, 앞뒷면이 구분되도록 기획해도 좋다. 예를 들어 앞뒷면을 각각 낮과 밤 풍경으로 그린다면 그림책 한 권에 하루의 시간을 담게 되고, 하나의 면만 채웠을 때보다 풍부한 서사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 'After the rain', 가츠미 고마가타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가츠미 고마가타의 그림책 ‘After the rain’은 이러한 아코디언 북의 문법을 잘 활용한 그림책이다. 그가 내지 앞뒷면을 구분한 기준은 공간이다. 앞면은 비바람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동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뒷면은 깜깜한 방주 안에서 물이 마르길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페이지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과 같다. 앞면은 동물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며, 뒷면은 기다림 끝에 창밖의 무지개를 본다는 결론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그래픽적인 스타일이 돋보이는 이 그림책에서,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 건 간단한 실루엣으로 표현된 동물과 그들 옆에 붙은 대사다. 등장인물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어, 독자는 하나하나의 동물에게 차례로 시선을 옮기며 책을 본다. 동물들이 웅성이는 말을 따라가는 읽기가 페이지를 넘기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는 것이다.


‘가츠미 고마가타의 작업이라’ 눈여겨봐야 하는 요소들은 따로 있다. 가령 무채색인 다른 동물들과 달리 새들은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등으로 표현한 점이나, 방주의 문을 정사각 모양의 구멍으로 잘라낸 부분이다. 여기에는 그간 종이의 재료적 특징을 활용해 그림책을 제작해 온 그만의 작업 특성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그가 단지 스타일의 일관성을 위해 이렇게 표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앞면에서 보여준 시각 요소들은 분명한 의도를 가진 장치였음이 뒷면에서 밝혀지는 과정에서 알 수 있다. 



그림책 'After the rain', 가츠미 고마가타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그림책 ‘After the rain’에서도 희망은 마지막에 찾아온다. 차이점이라면 앞뒷면에서 한 번씩, 두 번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한 번은 홍수를 피해 동물들이 서둘러 들어가는 방주의 문을 통해서, 또 한 번은 맑게 갠 하늘에 신의 약속을 뜻하는 무지개가 뜨는 창문을 통해서. 각각 컷아웃과 그림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은 다르지만, 모양과 크기 그리고 놓인 위치가 똑같다는 점에서 작가의 전략이 돋보인다. 이 두 개의 정사각형은, 고전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매개이자 고유한 조형이다. 


가츠미 고마가타의 작업 의도나 과정을 상상하여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 ‘작가는 아코디언 북의 방식으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번역할 때 희망을 두 번 보여주기로 했다’고. 플롯의 클리셰는 아코디언 북에 담겨 단순한 클리셰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책 구조가 내용을 담는 그릇을 넘어 그림과 글, 내용과 이미지를 운용하는 중추가 될 때 그림책의 아름다움이 더욱 빛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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