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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Jun 22. 2024

반복된 장면 | 그림책 ‘개’

그림책 '개'의 한국판과 영문판 표지와 면지, 숀 탠Shaun Tan 지음. 한국판은 영문판의 4배 정도 크기로 제작되었다


숀 탠Shaun Tan의 그림책 ‘개’ 면지에는 개들과 옆에 선 사람들의 모습이 양쪽 페이지 가득 그려져 있다. 목줄을 찬 개와 아닌 개, 소형견부터 대형견까지 종류는 다양하며 사람들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공통점은, 그들은 함께 있다는 것이다.


내지에서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초반에 속도감 있는 전개로 개와 사람의 운명이 죽음 이후로 넘어간 다음부터 그림책은 독특한 방식으로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바로 똑같은 구도의 그림을 몇 페이지에 걸쳐 보여주는 것. 이 그림책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반복되는 장면은 헤어짐을 위한 구도다. 대각선 구도를 중심으로 왼쪽 위에는 한 사람이, 오른쪽 아래에는 한 마리의 개가 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등을 돌린 각자의 시선이 향하는 페이지의 끝은 낭떠러지일까, 영원일까. 영문판은 손바닥만 한데도, 그들이 떨어진 거리는 영겁의 시간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공간의 성격과 주인공은 계속 바뀐다. 초록색 풀이 무성한 공간도 있고, 작은 터널들이 이어져 놓인 곳도 있다. 눈이 내리는 곳도, 불탄 폐허처럼 잔 불씨가 타오르는 곳도 있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닌, 각기 다른 사례인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장면들의 느낌은 전체적으로 비슷하다. 세부적인 묘사는 다르지만 고정된 레이아웃과 등장인물의 특정한 자세가 발휘하는 효과가 더 크기 때문인 것 같다. 마치 사람과 개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경험은 같다는 것을, 이건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듯하다.


여전히 장면 사이사이에 차이는 존재한다. 여기서 그림의 가장 근본적인 기능을 알 수 있다. 그건 바로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다. 그래서 반복된 장면은 개별적 경험을 보편의 층위로 확장하면서도 그 뜻을 ‘누구나 똑같다'는 상투적인 의미로 오역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여러 사례를 하나의 경험으로 묶는 것은 글이다. 글은 당사자의 목소리 역할을 하며 이야기가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글과 그림의 온도는 닮았다. 언제, 어디서 일어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며 단지 개와 사람 사이에 어떤 방식의 교감이 일어났는지 정도만 묘사하는 서술 방식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의 이야기는 일상에서 한층 떠 있는 시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건 자체보다는 그들이 교환한 감정의 실체, 간절함이나 소중한 무엇을 더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관계에서 보편성과 고유하고 특별한 감정 그 어느 쪽도 무게를 잃지 않도록 그림과 글의 기능과 페이지 흐름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앞면지에서는 마치 멀리서 한 세계를 조망하는 것 같다가 내지에서는 각각의 관계를 포착하고, 뒷면지에서 함께 있는 여러 개와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비추는 흐름 또한 이러한 주제 의식에서 비롯한 전략으로 보인다.


이 그림책의 또 다른 특징인데, 바로 글과 그림이 함께 놓인 페이지가 없다는 것이다. 글과 그림의 공간은 완벽히 분리돼 있다. 사실 글과 그림은 시각적 유형이 다른 텍스트라서 두 요소가 함께 있어도, 독자가 글과 그림을 동시에 보고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특성을 이용해서 같은 페이지에서 글과 그림의 의미를 일부러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재미를 꾀하는 그림책도 많다. 이 그림책의 경우 서두와 말미에 글이 등장하여 그림을 감싸고 있는 듯한 구조이다. 독자는 글에서 얻은 정보를 그림에서 천천히 복기하듯 떠올릴 수 있다.


하나하나의 관계를 포착해 그림으로 나열한 시점이 등장인물의 만남이 아닌 헤어짐의 순간이었다는 사실은 생각해 볼 만하다. 왜 작가는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이 아닌, 서로를 잃어버린 때를 그림으로 반복하기를 선택했을까.


그림과 글의 역할을 근거 삼아 가정해 본다. 다음과 같이: 글은 묘사하고 그림은 보여준다. 글은 파헤치고 그림은 다가온다. 글은 지시하고 그림은 안내한다. 그림책 ‘개'의 주제와 연관된 감정, 가령 외로움이라든지 고립감, 무력함이나 영원에 가까운 감각은 그림이 소통하는 방식과 더 어울렸다면. 혹은 이 주제가 그림의 반복에서 생기는 인식의 흐름으로 만들 수 있는 종류였다면. 어떤 이야기와 감정은 이런 방식으로만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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