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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림 Oct 16. 2023

아가미 없는 물고기

최근 이루 말할 수 없이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유야 여럿이지만, 결과는 같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학원을 막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힐 무렵이 딱 이랬던 것 같다. 세상이 변하는지, 해가 뜨긴 했는지, 내가 밥을 먹었는지 따위의 당연한 것들이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다. 아직 살아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숨은 쉬고 있는 게 맞을 테지만 정말 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무렵은 도통 기억나질 않는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 그 시간이 내게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심지어는 미치기 직전에 쓴 글을 다시 읽어도 그렇다. 지독하게 우울해서 내가 죽어버리길 바랐던 것까진 알겠는데 그게 전부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공황이 밀려와서 책은 읽지 못했고, 글은 형편없이 망가져서 도무지 내가 쓴 것 같지 않았다. 하물며 피아노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컴퓨터 자판과 피아노 건반이 자꾸만 헷갈리는 데다 피아노를 칠 때도 불안장애라는 아이가 달려들어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덕분에 한동안 나는 내 피아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요즘 그런 날을 보내고 있다. 그 무렵보다 조금 덜한 것 같긴 하다. 그땐 누구든 사람을 만나려면 날 빈틈없이 붙잡아야만 했는데 지금은 그보단 낫다. 몇 시간 정도는 즐겁게 누군갈 만날 수 있다. 그 이후는 다시 전처럼 가라앉지 않기 위해, 헛소릴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도무지 뭘 할 수가 없다. 지금도 글을 쓰고 있지만, 이게 맞는 글인지. 읽기는 매끄러운지, 말의 어두와 어미는 맞는지 따위의 사소한 것들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저 풀어내는 중이다. 우울감이 조금 나아질 때면 그 무렵부터 괜찮아지려 노력했던 것들을 시도하고 있다. 글을 쓰거나, 엄청 재밌는 소설을 읽고 현실감을 잃어버린다거나, 몇 시간이고 음악을 들으며 가사 속을 헤집고 다니거나, 피아노 앞에서 제일 좋아했던 곡들을 친다. 개미 눈물만큼이라도 괜찮아지려고 애를 쓴다. 그래, 애를 쓰며 발악에 가까운 발버둥을 친다.


이럴 땐 사람은 조금 멀리 있는 게 좋다. 정신이 이쯤 되면 아무에게나 내 우울한 얘기를 털어버리고 싶은지 자꾸만 헛소리가 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태가 제일 좋다. 딱 지금처럼 모두 잠이 들었을 시간이 좋. 우울증 환자의 우울한 얘기를 도대체 누가 좋아하겠는가. 정신과 의사도 싫어할걸. 그런 것들을 말해버리지 않기 위해 낮에 자고 새벽에 깨는 안 좋은 삶에 적응했다. 이러니 나아질 수가 없지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 우울증 환자의 생각으론 이것 말곤 도무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렇게 참아내도 가끔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여러 생각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긴 한다. 한두 가지 생각이 끓어오르는 게 아니라 글로 적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렇게 이것저것 시끄럽게 부글거리면서도 꼭 넘치지는 않는다는 거다. 물을 가득 넣은 주전자가 끓어오르다 끝내 넘쳐서 불을 꺼버리듯 그렇게 넘쳐흘러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젠 좀 꺼져버렸으면 싶은데 도통 넘치질 않는다. 생존본능이란 파렴치한 녀석이 그게 넘치면 내가 죽을 걸 알고선 멋대로 일하고 있는 것 같다. 빌어먹을 녀석.

 

우울은 항상 이렇다. 끊임없이 날 좀 먹고,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고선 못된 생각들을 몸속 가득 쌓는다. 죽으라고 말하면서 죽이진 않는다. 자신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고, 죽는 것만은  스스로 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사실 다 내 머릿속에서 치고받는 생각일 뿐인데 말이다.


우울이 깊어던 어느날, 내가 아가미 없는 물고기가 되어 바다를 헤엄치고 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래서 언젠가 엄마에게 물고기가 돌고래도 아니면서 아가미 없이 물속에서 살 수 있을까-하고 실없는 소리를 했던 적이 있다. 엄마는 헛소리도 다양하게 한다는 그런 목소리로 아가미가 없으면 숨 쉴 다른 무언가가 있겠지, 하시곤 하던 일을 마저 하다. 난 그 순간 엄마가 몹시도 부러웠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런 물고기라도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살아갈 거라 말할 수 있다니. 언젠가 내게도 있었던 것 같은 그 막연한 긍정성이 그때도,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저 부럽기만 하다. 나는 그 감각을 다신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난 그때도, 지금도, 엄마의 말에 덧붙이고 싶은 말을 삼킨다. 그저 삼키고, 영영 묻어둘 생각이다.

      

'근데, 난 아가미도 뭣도 없는 것 같아.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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