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네림 Jul 11. 2023

난 행복했어야 할 텐데

행복한 척이라도 해야 하나.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채로 행복해지는 것과 내가 언제나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고 외로워지는 것, 무엇이 더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
- 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앨저넌에게 꽃을은 바보였던 찰리가 뇌수술로 초지능을 갖게 되는 이야기다. 수술을 받기 전, 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놀려도 그저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 행복했다. 하지만 지능을 얻게 된 후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지나치게 똑똑해진 찰리를 멀리했고 세상 사람들은 초지능을 가진 찰리의 말을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찰리는 그토록 원하던 지능을 얻은 동시에 외로움을 알아 버렸다.


찰리가 바랐던 것은 사람들의 애정이 전부였다. 지능도 사랑받기 위해 얻고자 했을 뿐이었다. 찰리는 그저 행복하길 바랐다.


한참이 지나 저 문장을 다시 읽었을 땐, 책이 말하는 바와는 조금도 상관없이 저 문장에서 내가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응원받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좋은 걸까. 책을 읽을 때도 선택하지 못했던 문제가 기어코 내 목을 잡고 섰다.

   


난 어릴 때부터 사람을 좋아했다.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단어 그대로 사람이 좋았다. 사람들이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고, 감정을 갖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는 게 재밌었다. 멍하니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았고, 누군가의 마음 끝자락을 보며 그 사람을 상상하는 일은 그것보다 더 즐거웠다. 그래서 어릴 적 친구들이 가수나 선생님, 과학자 같은 대중적인 장래희망을 이야기할 때, 나는 심리학자가 되고 싶다고 떠들어 댔다. 조금 더 커선 음악치료사가, 그 후엔 임상심리사가 되고 싶었다. 무엇을 하던, 심리학을 하지 않는 미래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 세상 속 어른들은 내가 심리학을 하는 미래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건 누구도 응원하지 않는 길이었다. 아빠는 내가 작가나 사서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한 자릿수 나이의 아이일 적부터 공무원을 찾았다. 엄마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지만, 이공계열 내에서 하고 싶은 일을 찾길 원했단 걸 안다. 날 유난히 아껴주시던 학원 선생님은 버릇처럼 변호사가 적성에 맞을 거라 말했고, 꿈이란 게 없을 때부터 다녔던 피아노학원 원장님은 내게 음대를 가도 괜찮을 재능이 있다며 예고를 언급하시곤 했다. 심지어는 입시의 문턱에 함께 선 고3 담임도 심리학과 말고 다른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냐며, 한 달이 넘도록 내가 다른 학과에 지원하도록 설득하셨던 기억이 난다. 내 세상에선 누구도 내가 심리학 같은 학문을 배우길 원하지 않았다.


사람 셋만 모이면 세상을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있다. 셋이면 보이지 않는 UFO가 있다고 할 수 있고, 선한 것도 악하게 만들 수 있다. 모두가 내게 심지가 굳고, 고집도 센 아이라 말했지만 나도 사람이다. 3의 법칙에 놀아나기 좋은 평범한 사람. 그리고 내 세상에서 사람 셋은커녕 존재하는 모두가 내가 생각하는 길은 아니라고 말했다.


세상이 원하는 일과 내가 항상 바라던 일을 하는 것 중 무엇이 더 맞는 걸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세상에 도전하는 삶을 살라는 입바른 소리는 믿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심리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가 망해버리길 원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더군다나 그때만 해도 서울에 심리학과가 있는 대학이 10개도 채 안 되었기에 반대당할만하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면 양껏 미워하고, 속상한 마음에 화라도 내봤을 텐데. 때론 공감과 이해라는 게 빌어먹을 일이란 걸 그때 알았다. 난 그들을 마음 놓고 미워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나는 로봇공학으로 대학을 갔다. 그들에게 설득된 건 아니었고, 그냥 입시를 말아먹어서 공대를 갔다. 딱 1년만 재수를 해보고 싶긴 했지만, 우리 집엔 그걸 보고 있을 만큼 너그러운 사람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일단 대학에 가고 난 후에 내가 돈을 모아서 반수나 전과를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대학 문턱을 밟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세상이 응원하는 일을 한다는 건 꽤 좋았다. 더군다나 그 일이 내게 어렵지 않다는 건 천운이었고.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누군가 내게 그건 별로라거나, 다른 걸 권유하지 않았다. 삶의 결이 바뀐 느낌. 그동안 난 피아노를 칠 때마다 은근히 제지당했고, 글을 쓰면 작가나 돼서 뭐 할 거냔 소리를 들었으며, 잠을 자도 걱정 아니면 핀잔이 따라붙었다. 심지어는 책을 읽을 때에도 다른 책을 권유받곤 했다. 그런 삶을 살다 마주한 반대 없는 세상은 여태 살기 위해 먹었던 짠맛만 가득한 소금물이 소금의 농도는 유지한 채 시원한 냉수가 된 느낌이었다. 세상이 좀 쉬워졌다. 찰리가 말했던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행복해지는 삶이 이런 건가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외면하기만 하면 된다. 그거면 된다.


되긴 무슨. 그 후 난 언젠가부터 심리학 서적을 읽을 수 없게 됐다. 학문은 여전히 즐거웠지만, 책을 읽으며 재미가 내게 닿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그 재미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이 서글퍼서 무슨 짓을 해도 책을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고작 대학 하나 왔다고 어린 시절 내내 바라왔던 걸 다 먹은 과자 껍데기 버리듯 버릴 순 없었다. 그맘때쯤 정하는 장래희망이란 건 대학에 맞춰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가벼운 것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렇지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냐며, 생활기록부에 제출할 장래희망 정도는 어그러진 대학에 맞춰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것들이인 줄 알았는데. 심리학은 그저 오래도록 바라왔기에 스스로 세뇌당해 좋아하는 것이려니, 세상이 그렇듯 나도 어딘가에 날 끼워 맞추는 게 적당한 삶이려니 싶었다. 지금도 크게 다른 마음은 아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세상이 원하는 대로 날 이리저리 끼워 맞춰야 살아갈 수 있다. 그건 꽤 품이 드는 일이지만,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애당초 그렇게 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뜯어고쳐 세상에 욱여넣어도 놓아지지 않는 게 있다. 어떤 삶을 살아도 잊히지 않고 눈앞에 아른거리다가 끝내 날 형편없이 무너뜨릴 것들. 무용하고 볼품없고 힘만 들 걸 알아도 시도하지 않으면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직성이 풀릴 만큼 먹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들. 심리학을 해보고 싶단 마음이 그랬다. 작은 실밥 하나에 솔기가 다 뜯어져 버리는 옷처럼 심리학과 비슷한 무언가만 만나도 자꾸만 속이 상해서 눈을 돌리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뭐가 그리 좋아서. 그냥 책이나 읽고 살지. 왜 그런 직업에 마음을 뺏겨서는, 미련하게.


그래서 그냥 심리학 대학원을 가기로 했다. 내 적성에 상담은 맞지 않는다는 말을 부지기수로 듣고, 모두가 날 미친놈처럼 봐도 일단 시도라도 해보고 싶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니까. 일단 해보고 정말 아니라면 그때 가서 그만두고 얌전히 전공 따라 취직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 일단 내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게 잘 배워두고, 새로운 걸 배우러 가야겠다. 날 소프트웨어 대학원으로 보내고 싶어 하시던 지도 교수님과 학부 선생님, 내가 프로그램으로 벌어먹고살 거라 믿는 부모님과 내 대학 동기 모두를 싹 다 외면하고서라도 가야겠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날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난 차근차근 내 홈그라운드를 떠날 준비를 했다. 심리학 대학원을 알아보고, 교수와 컨택을 하고, 심리학과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물어 혼자 공부를 하고, 돈을 모았다. 타과생인 내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리는 만무하고, 식구들이 도와줄 리는 더욱 만무하기에 혼자 2년을 버틸만한 돈을 모으느라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가지 않았다. 그땐 그게 조금 아쉬웠지만 후회되진 않았다. 하지만 글을 쓰는 지금은 후회한다. 그 모든 건 다 부질없는 짓이었으니, 후회해 마지않는다.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가족들이 모여 저녁을 먹던 중 누군가 내게 앞으로 뭘 할 거냐 물었다. 난 항상 내 계획을 떠벌리고 다녔었기에 별일 없다는 투로 대충 답했다.


“한 학기 쉬고 심리학 대학원 갈 거라니까.”


내 말에 아빠는 짜증이 가득한 어조로 화를 뱉었다.


“그럼 난 또 배신당한 거네?”


무엇을? 아빠가 도대체 뭘? 게다가 또라니? 아빠의 두서없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는 의문과 짜증으로 가득 덮였고 작은 식탁에 얹힌 공기의 질이 바뀐 게 느껴졌다. 우리 중 누구도 아빠가 왜 그런 소릴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불쾌한 공기에 이어 쌀알이 돌알로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프로그램으로, 혹은 로봇으로 대학원을 갈 거라 믿었던 혼자만의 믿음을 배신당했나. 난 분명 심리학 대학원을 가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은데. 주위에서 공학대학원을 권할 때도, 코딩으로 외주를 받고 있을 때도 그랬다. 다 덮어두고 심리학 대학원 갈 거라고. 하다 안 되면 그만두고 취직할 거라고. 난 분명 수없이 말했는데.


내 머릿속은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아빠는 혼자 결론을 내리곤 됐다며, 이야기를 끊었다. 좋았다. 느닷없이 화를 내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술을 마신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당시 나는 매일 밤 눈을 감기 전엔 그대로 자다가 죽어버리길 기도했고, 아침에 출근할 때면 날 태우고 가야 할 그 버스에 치이길 바랐다. 언젠가 봤던 교통사고 현장처럼 가볍게 다쳐도 좋고, 재수가 없어서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음식은 먹을 때마다 위가 아팠고, 일할 때마다 나만 찾는 사람들은 지겨웠다. 그리고 아빠의 감정적인 반응들도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잠들지 못하던 어떤 새벽녘에 결정했다.


어차피 지겨울 세상이라면 어떻게 굴러가도 상관없지 않을까. 이미 지겨운데, 뭐가 더 나빠지겠어. 그래서 나는 나를 놓았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모두가 원하는 대로 공학대학원을 가자. 가서 그냥 말라죽어버리자. 좋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서 더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머리가 너무나 평온한 채 희게 질렸다.


그렇게 인공지능 대학원에 원서를 넣었고, 컨택조차 하지 않은 덕분에 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학원에 붙어버렸다. 면접을 본 교수님들이 나를 좋게 봤다나, 내 실적을 좋게 봤다나.


대학원에 합격하자마자 내내 나와 소원하던 아빠는 생전 하지도 않았던 칭찬을 하며 대학 4년 중 처음으로 내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넸다. 몇 년을 새벽잠을 자고, 장학금을 받고, 대회에 나가 수상을 해도 들은 적 없던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엄마는 그 말에 맞장구치며 내 미래를 응원했던가.

 

그 순간 난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을 느꼈다. 여태 나를 삶에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 그리고 그 기묘한 느낌과 동시에 어떤 깨달음 하나가 잽싸게 사라진 무언가의 자리를 꿰찼다.


내 인생에서 나만 빼면 모든 게 완벽해진다. 내 세상의 중심은 나일 텐데, 나만 없으면 모든 게 어긋남 없이 잘 맞았다. 내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나만 입을 다물면 기름칠하지 않아도 몇십 년은 거뜬한 기계 뭉치가 만들어진다. 모든 문제는 다 나였다. 고작 뭣도 아닌 나.


그걸 깨달은 순간 오래도록 잘 가둬둔 우울이 세상에 만연한 바이러스처럼 밖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내뱉는 숨을 따라 우울이 흘렀고, 들이쉬는 숨은 그저 역할뿐이라 폐에 공기가 찰 때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때부터 나는 토하지 않기 위해 그저 웃었고,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말만 늘어놓았다. 합격을 축하한다며 내 앞으로 권해진, 먹어봐야 쓰리기만 할 술을 위염과 함께 마셨다. 그날 있었던 일은 모조리 까먹었지만, 이 생각 하나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내가 오래도록 글을 써와서 다행이랑 생각. 내 감정은 조금도 상관없이 무난한 대답을 골라 답하는 자동응답기가 될 수 있게 해 줬으니, 그동안 소설을 많이 써봐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날은 2주나 지난 내 생일이었다. 그즈음 너무 바빠서 차마 날짜를 세보지 못했다고, 미안하다며 뒤늦게라도 챙겨준다고 이것저것 상을 차린 날이었다. 그때 나는 유독 선명한 주황색 꽃이 핀 카랑코에 화분을 하나 받았다. 그리고 그 카랑코에는 내 우울과 함께 시들어가다 올봄 뿌리까지 썩어 죽었다. 너무 잘 죽은 덕분에 썩은 뿌리를 캐내 치울 걱정조차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카랑코에는 썩어 문드러질 줄기 하나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내 삶에 기억나지 않는 일이 늘었다. 어떤 순간이든 떠올리려 하면 십 년은 된 일처럼 스치는 순간만 떠오를 뿐,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를 잃고 모두의 응원을 얻었으니 행복한 척이라도 할 수 있어야 타산이 맞는 것 같은데, 무언가 잘못됐다. 좀 많이.


그때부터 흘러간 2년이 더할 나위 없이 텅 비어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꿈을 꿨다. 한 10년 정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