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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Mar 26. 2022

워킹맘 첫 돌

탈진 / 윤종신



아이가 첫 돌이 되던 때에 복직을 결정했다.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봐주시기로 해서 시댁 근처로 이사를 했고, 마침 시댁이 있는 동네는 남편과 나의 직장의 딱 중간지점이었다. 나는 익숙한 직장에 돌아가서 내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고 시어머니는 무척이나 아끼는 첫 손주를 돌볼 수 있음에 기뻐하셨고 남편도 내가 맞벌이를 하니 경제적으로 훨씬 부담이 덜 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모날 데 없이 효율적이고 완벽한 선택이었다. 남이 보기에도 그럴듯해 보였을 것이다. 강남의 한 복판에 살았고, 칼퇴근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며 아이는 시어머니가 살뜰하게 키워주셨고, 남편은 자상하게 가정을 돌봤으니까. 그로부터 1년 후,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워킹맘 타이틀을 도망치듯 내려놓게 돌 줄은 정말 아무도 몰랐다. 아니 나만 몰랐던 건가.  

복직 이후 직장에서의 생활은 물론 구질구질하고 지리멸렬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대체로 즐거웠다. 비슷한 또래 아이를 키우는 동료들과의 짧은 수다, 먹고 싶은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 싫다고는 했지만 내심 싫지만은 않았던 회식,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일의 새삼스러운 감격.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이를 두고 나와 일한다는 죄책감을 상쇄해줄 만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는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총량 불변의 법칙은 작용한 걸까, 그와 반대로 가정생활은 점점 더 시들어 갔다.

내가 복직을 한 이후 아이는 안 먹던 이유식을 더 잘 먹지 않았고, 퇴근한 엄마와 시간을 보내느라 늦게 자고, 출근하는 엄마와 함께 나서느라 일찍 일어났다. 몸이 약해 툭하면 전염병에 열 치레도 잦았고 아플 때는 특히 엄마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내 옷깃을 붙잡고 늘어지며 울었다. 그런 아이를 두고 뒤돌아설 때면 마치 대역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아이가 자주 아픈 걸 좋은 생활 습관을 기르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생활 규칙에 집착을 했고 주 양육자인 시어머니에게 시간표를 짜서 지켜주시길 부탁드렸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호방하신 분으로 그런 사사로운 것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셨다. 나에게도 무언갈 강요하거나 간섭하지 않으시듯 본인도 무엇이든 본인의 스타일을 고수하시는 분이셨고, 언제나 친절하게 받아들여 주시긴 했지만 ‘원래 애들은 다 그래.’ ‘우리 때도 다 그렇게 키웠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나날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그 말이 다 맞았다. 아이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아이가 금방이라도 큰일이 날 것처럼 보였다. 잘 안 먹고 잘 안자는 것은 기본이고, 카시트든 베이비 체어든 갇혀있는 걸 참지 못했고, 툭하면 동영상을 찾았고 간식이나 낮잠 시간도 뒤죽박죽이었다. 물론 나는 훈육을 했지만, 주 양육자가 아닌 내가 훈육의 지난한 과정을 꾸준하게 감내할 수 없었고 안 그래도 미안한 아이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아 포기하는 때도 많았다. 더 솔직하게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거나 울게 내버려 두는 것이 몹시 두려웠던 것 같다. 그냥 믿고 맡겨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나아질 것이라는 걸 모르고 빚을 내서 걱정을 끌어모으다 보니 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마음속의 응어리가 점점 더 무거워졌고, 그 무게가 남편과 나 사이의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둘 다 감정을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대놓고 다투거나 소리를 높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얼굴을 마주하는 저녁 식사 시간엔 이유를 알 수 없는 침묵이 이어지는 날이 잦았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들을 애써 눌러 삼키느라 늘 체기에 시달렸다. 남편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는 성실하고 착하고 좋은 남편이자 아빠였고 잘못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내 불만과 원망의 분출구가 그밖에 없다는 게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던 것.  

 

어느 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징그럽게 안 먹는 우리 아이 밥 먹이기’라는 마치 내 맘과 같은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어머님께 연락이 왔다. 아이가 열이 나는 것 같다고, 너무 보채고 울어서 아무래도 네가 와봐야 할 것 같다고. 그날은 일이 있어 바로 휴가를 쓸 수는 없었다. 서둘러 출근을 해서 오전에 업무를 처리하고 오후 반차를 쓰고 나왔다. 출근 시간보다 고작 서너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북새통 같던 지하철은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고요함인지.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 이유식을 만들고 출근 준비를 하고 아이를 깨워 시댁에 맡기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서 쉴 새 없이 전화통이 울리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저녁이 다 되어 퇴근해서 다시 또 지하철을 타고 시댁으로 가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면. 다시 또 저녁을 차려 먹고 치우고 아이를 씻기고 누우면 기력도 기억도 없이 잠드는 하루하루.

이 생활을 일 년 가까이 이어오면서 하루 중 혼자서 고요함을 느끼는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그 순간 나는 노래를 듣고 싶었다. 플레이리스트를 내리다 누른 노래는 윤종신의 탈진. 가수는 노래 제목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사실 그건 리스너도 마찬가지다.  

 

 

푹 주저앉아 꿰매고 있어

너덜너덜해진 나의 상처를

어떻든 가야 하지

쉴 수 없는 길 위에 있잖아

힘이 넘쳤던 그때 출발점에서

나를 믿어줬던 따라줬던 눈동자

이제 달라진 걱정과 불안의 눈빛  

몰래 한 땀 한 땀 상처를 메꾸네

 

 

멈출 수도 쉴 수도 없는 길 위에서 상처를 받는지도 아닌지도 모르고 지나오는 시간 동안 이미 나는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복직을 앞두고 서로 으쌰 으쌰 잘해보자 함께 힘을 내던 남편의 눈빛도 달라져 있었다. 아마 그 역시 탈진 상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잘 살아내고 싶은 우리는 서로 몰래 한 땀 한 땀 알아서 상처를 메꾸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코끝이 찡했다.  

그다음 날, 남편에게 복직 이후 처음으로 긴 메일을 보냈다.  

몰래 숨어서 메꾸고 있던 상처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한낮의 밝은 볕 아래에 펼쳐냈다.  

이거는 이래서 서운했고, 이거는 이래서 힘들었고, 이거는 이래서 참을 수 없었다고.  

시댁 옆에 살며, 시댁에 두 살짜리 아이를 맡기며, 일과 육아의 균형을 잡아가며, 필연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를 분출한 메일이었다. 포장하려 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가시가 워낙 뾰족해 모르고 뜯었던 이는 더 서럽고 아플 만했다. 남편에게서 비슷한 결의 답장이 왔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잔인할 정도로 긴 몇 번의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 차라리 소리를 내고 싸우는 게 나을 뻔했다.  

그래도 그렇게 몇 번의 메일을 주고받은 이후,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지만 조금 후련했다. 한숨 돌린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고, 좀 아문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틈만 나면 메일을 썼다. 어머님이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말로 나는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당신에게 왜 서운한지,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든 건지. 가감 없이 써 내려간 메일은 바로바로 ‘내게 쓴 메일함’으로 보내졌다.  

그 꼴을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가 물었다.  

“그걸 왜 쓰는 거야? 보내지도 않을걸.”

“그러게.”하고 멋쩍게 웃었지만, 이 메일은 진짜로 내게 쓰는 메일이었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  

앞으로 살다가 남편에게 시어머니에게 아무 이유 없이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오거나 쓸데없는 심술이 날 때마다 들여다볼 워킹맘 시절의 실록 같은 것. ‘아, 그때 이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지금 내 감정이 이런 거구나.’하고 내 마음을 인정하고 이해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증거 같은 것. 그렇게 내게 쓴 메일함이 착착 쌓여가면서 남편에 대한 내 응어리는 서서히 녹아가고 있었다.  

그러고 나니 남편에게 미안해졌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도 알았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미안하다고. 지친 날 숨기려 했던 옹졸했던 태도였다고. 그때처럼 날 좀 믿어달라고. 날 사랑한다 말해달라고.  

 

 

맘과 달랐던 그때 무심코 뱉던

서로 상처 줬던

가슴 팠던 말들은

너무 미안해

그저 지친 날 숨기려

한낱 옹졸했던 외로웠었던

-

좀만 아물면 좀 숨만 돌리면

날 그때처럼 믿어줘

잠시 감은 나의 두 눈을  

아픈 척 조퇴를 바랐던 그 어릴 적

들키기 싫은 꾀병처럼

드러누운 지금 난

더 이상 일어나기 싫어

 

 

그렇게 잠시 멈춰 서서 숨을 돌리고 싶어 지자, 나는 내가 왜 회사에 다니는 가에 대한 심오한 생각을 했다. 뭐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사실 모든 것은 ‘돈’으로 수렴됐다. 내가 돈을 안 벌면 우리 가족이 살 수 없을까? 그건 아니었다. 남편의 수입이 있고, 아껴서 살면 가능했다. 하지만 아껴서 사는 삶을 옆에서 보면서 자란 나는 아껴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악착같이 버텼다. 하지만 이렇게 성실히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엄마 아빠에게, 시어머니에게, 직장 동료에게, 친구들에게, 하물며 식당에서 마주치는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까지 늘 폐를 끼치는 죄인처럼 느껴졌다. 그 무엇보다 아이에게.

물론 힘들 때 들춰보던 책에서는 “죄책감이라는 단어는 집어치우세요! 대체 이 단어가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입니까? 가당키나 합니까? 지금 사기, 절도, 도박에 대해 말하고 있나요? 일하고 싶거나, 아이를 잘 키우고 싶거나, 둘째를 낳고 싶거나 하는 욕망들은 모두 아주, 아주, 아주 건강한 욕망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아주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나 안 도와주는 사회에서 아이를 낳고 일까지 해내고 있으니까요. 어떤 이야기를 하든, 그 자부심에서부터 출발합시다.”라고 했고 실제로 그런 말에 힘을 얻고 씩씩하게 버텼다. 하지만 어느 날 미루고 미루다 너무 많이 자라 버린, 잠든 아이의 손톱을 잘라주다가 불현듯 생각했다.

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지?

순간 이렇게 계속 채워지는 삶에 만족하며 버티다간 언젠가 빵-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선명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 좀 내려놓고 비워내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다.  

어쩌면 꾀병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훗날 더 크게 혼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더는 애써서 일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이대로 드러눕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tell me tell me  

oh what I have to do  

노래를 부르며 워킹맘이라는 무대에서 패자처럼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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