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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Mar 26. 2022

롤모델은 하나

Smile Smile Smile / 전수연



엄마가 된 지 7년 차. 이제 막 초보 엄마 딱지를 떼어가고 있지만 엄마가 되던 나의 스물일곱을 떠올리면 마치 어릴 적 꿈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아무리 말해도 너희는 절대로 모를걸?’ 이름 모를 너희들을 향해 매일매일 자기 연민과 분노를 쏟아내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잔주름이 늘어나던 시절. 그때 나는 늑대아이를 만났다.

늑대아이는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큰 관심이 없는 나에겐 그저 낯선 작품일 뿐이었지만, 즐겨보던 잡지에서 ‘육아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는 글을 보고 마음이 동해 영화를 다운로드하였다. 사실 회사 사무실에서 당직을 서는 날 컴퓨터 모니터의 작은 화면으로 영화를 봤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기대는 딱히 없었다.

 

주인공은 대학생인 하나. 하나는 늑대인간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아이 둘을 낳는다. 행복한 때는 잠깐뿐. 그는 비 오는 날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심지어 늑대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그가 쓰레기 치워지듯 사라지는 모습을 하나는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남편도 없이 홀로 둘씩이나 되는 늑대아이를 키워야 하는 운명에 처한 나보다 어린 하나.  

그러나 하나의 이야기는 희한하게도 연민이 아닌 위로로 다가왔다.  

육아를 다룬 이야기와 콘텐츠를 넘쳐났지만 유난히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된 것은 바로 하나의 특별함 때문이었다. 늑대와 사랑을 해서 늑대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는 점. 그래서 숨어서 몰래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는 점. 그래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철저히 혼자서 해내야 했다는 점.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항상 웃었다는 점 말이다.  

심지어 하나는 입덧을 할 때도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웃고 있었단다.

그맘때 나는 웃기는 일도 웃을 힘도 없어서 거의 웃지 않았다. 심지어 예능을 보면서도 웃기는커녕 ‘저 개그맨은 얼마나 힘이 들까’하며 우는 날도 많았으니까.  

그래서일까. 나와 다르게 늘 웃고 있는 하나가 좋았다. 어쩌면 하나를 닮고 싶었던 것 같다.  

 

하나는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남편이 남긴 작은 예금으로 아이 둘을 키워갔다. 늑대였다가 아이였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늑대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아이가 아플 때도 소아과와 동물병원 중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해야 하고(결국엔 못 가고), 산책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은둔생활을 이어가다 결국 쫓기듯 사람이 적은 시골 마을로 이사를 한다. 폐허에 가까운 낡은 집을 바닥부터 지붕까지 청소하고 수리하며 세 가족이 살 공간을 마련하고,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책을 보며 감자 농사를 짓는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유키를 위해 독학으로 재봉을 익혀 원피스를 만들어내고, 자연에서 사는 법을 궁금해하는 아메를 위해 고교생 아르바이트보다 더 적은 시급의 직업을 선택해서 일을 한다.  

세상에! 나라면 열두 번도 더 드러누워 못 살겠다고 시위했을 법도 한데 하나는 꿈쩍도 없다. 심지어 아이들을 모두 다 키운 후에 홀로 시골집에 남아 사진을 보며 ‘너희들을 키우며 살았던 지난 세월은 꿈만 같았어.’ 하며 미소 짓는 하나의 모습은 내가 그해에 봤던 사람 중에 가장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뜬금없지만 나도 떠났다. 오랜 직장을 정리하고, 심지어 남편은 서울에 버려두고, 아이만 데리고 내가 태어난 시골 마을로. 물론 영화 때문은 아니었지만, 이사를 가는 차 안에서 하나의 웃는 얼굴을 떠올린 것은 정말 사실이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전수연의 ‘smile smile smile’이 흘러나왔다.

오랜 시간 동안 내 미니홈피의 배경음악이었던 피아노 연주곡. 따뜻하고 푸르른 피아노 선율 위로 항상 웃고, 웃고, 또 웃는 하나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그곳에서 적어도 사계절은 보내기로 했고, 숨어서 지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러 누군가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되도록 아이와 둘이서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노력했고 아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직장 다니는 엄마일 때 가장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기에.)  

하나가 아이들에게 ‘너희 인간 할래? 늑대 할래?’하고 선택지를 주고 원하는 삶을 선택하게 했듯이, 나 역시도 너는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때때로는 이야기를 나눌 가까운 친구가 곁에 없다는 것이 외롭고, 오로지 혼자서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힘들었다. 그럴 때도 나는 언제나 웃는 하나의 말간 얼굴을 떠올렸다.

 

고향에서의 사계절 동안 나는 많은 것을 새로 배웠다. 모르는 게 생기면 조금 쑥스럽더라도 그걸 잘 아는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 있는 용기와, 잘 물어보기 위해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공손하게 인사를 잘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베풀어 준 작은 친절에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다. 아이가 슬퍼할 때는 조용히 안아주며 '모두가 너를 싫어해도 엄마만은 네 편이야'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과, 아이가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도 결국엔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것을 내어주어도 훗날 돌아보면,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고 느끼리라는 것도.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 나에게 주어진 엄마라는 역할에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생애를 통해 배웠다.

엄마라는 이름의 굴레가 지긋지긋하다고 생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담담하게 그 무게를 감당하고 그 안에서 나를 성장하게 하는 것. 정직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성장하는 나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어떤 일 앞에서도 웃어 보이는 법을.  

그것이 세 살배기 아이를 둔 엄마로도, 서른 살의 청춘으로도 잘살아보고 싶었던 나에게 하나가 안겨준 소중한 힌트였다.

 

그렇게 일 년이 흘러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나는 고향으로 내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전수연의 ‘smile smile smile’을 찾아들었다.

익숙한 피아노 선율을 자장가 삼아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순간 유키와 아메를 떠나보낸 후 아이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하나의 얼굴이 어째서 그토록 행복해 보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표정이 어땠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의 미소였을 것임을.  

앞으로도 나는 이 아이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웃으면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아이가 내 곁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아갈 때도 다 큰 아이의 등을 바라보며 ‘너를 키우며 살았던 지난 세월은 꿈만 같았어.’하고 미소 짓고 싶다.  가능하다면 하나처럼 동안인 모습으로.

그래서 언제나 나의 롤모델은 하나다. 언제나 웃고 있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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