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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선정 위대한 그림 220

이카루스는 어디에?

by 효문

<BBC 선정 위대한 그림 220>은 제목 그대로 영국의 BBC방송이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위대한 그림 220선’을 소개하는 책이다. 220번째 그림부터 첫 번째 그림까지 역순으로 소개하고 있다. '세상에는 이렇게 멋진 그림들이 많이 있다'고 알려주는 책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림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만 제공하고 있고, 심지어 그림은 작고 어둡고 혹은 두 페이지에 걸쳐 있어서 자세히 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단점 때문에 오히려 자세히 검색해 보게 된다. 그림에 대한 기본 상식을 익히기 위해서 펼쳐봐도 좋고, "220점 가운데 한 작품을 우리 집 거실에 걸어둘 수 있다면 어떤 작품을 고를까?" 하는 마음으로 펼쳐봐도 좋다.


예전에 어느 큐레이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전시회를 보면서 모든 작품을 다 보려고 하지 마세요. 마음을 끄는 몇몇 작품만 봐도 충분합니다. 작품을 보면서 우리 집 거실에 한 점을 걸어두면 어떤 걸 걸어두면 좋을까 생각하면서 봐도 좋아요. 혹은 그림 속에서 자기만의 스토리를 발견해도 좋아요."


'220점 중에서 딱 하나만 골라서 우리 집 벽에 걸어둘 수 있다면, 어떤 그림을 걸어둘까?' 생각하면서 책을 읽었다. 사람 마음이 참 묘하다. 이런 상상을 하는 순간 더 관심과 애정을 갖고 그림을 보게 된다. 어쨌든 이 책에서 내가 고른 한 작품은 칸딘스키의 '즉흥그림 6'이었다.


칸딘스키의 '즉흥그림 6 - 아프리카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국립박물관(State Russian Museum) 소장


우리 집 거실에 걸어두고 싶은 한 작품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즉흥그림 6 - 아프리카인'이었다. 왜 이 작품이 단숨에 나의 시선을 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좋다. 색깔이. 느낌이. 분위기가.


자료를 찾아보니 '칸딘스키의 '즉흥' 시리즈 중 하나로, 음악과 색채의 조화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려는 그의 예술적 실험을 보여준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색채는 보이지만 내 눈에 음악은 보이지 않는다. 감정은 처음엔 경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다양한 색깔만큼이나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림 한 점을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예전에 어느 미술관에서 관람객들이 한 작품을 보는데 시간을 얼마나 투자하는지 조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조사결과 한 작품을 보는 데 걸린 시간은 평균 17초였다. 그림 한 점을 보자.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얀 반 에이크의 그림 '롤랭 총리의 성모'이다. 이 작품 속에는 대성당도 있고, 짓눌린 토끼도 있고, 공작과 꽃도 있고 심지어 2천명 이상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보이는가?

롤랭총리의 성모.jpeg

토끼를 찾는데 만도 한참 걸렸다. 심지어 책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원근법이 구사된 2천 개 이상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이 상세한 풍경을 식별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다."


만약 17초 만에 이 작품을 휙 보고 지나쳤다면 앞에 있는 3명의 인물 외에도 아무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는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걸 그려 넣었을 것이다. 그림을 본다는 건 그것들을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는 것 아닐까? 그래서 어느 교수는 한 작품을 3시간 동안 바라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3시간 아니라 30분 아니 10분만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라. 어쩌면 그림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도대체 이카루스는 어디에?


인상적인 작품을 하나 더 꼽자면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이다. 이카로스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함께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날라 오른 그리스 신화 속의 그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조어늘 무시하고 태양 가까이 갔다가 결국 추락하고 만다. 자, 그럼 이 작품 속에서 이카루스는 어디에 있을까?

제목: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작가: 피터르 브뤼헐 더 엘더(Pieter Bruegel the Elder)
소장: 벨기에 브뤼셀 왕립 미술관


오른쪽 하단 물 위로 '볼품 없이 버둥거리는 두 개의 다리'가 보이는가? 바로 이카로스의 다리이다. 작가는 왜 이카로스를 이렇게 표현했을까? 이카로스의 추락은 아주 큰 사건이다. 인류 최초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날아올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 그 어떤 문제도 내 문제보다 더 큰 사건은 없다. 다시 말해서 내 문제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무관심해진다. 그림에서도 '이카로스의 추락'은 아주 작게 다뤄지고 있고, 농부와 목동과 어부의 일상이 더 크게 다뤄지고 있다. 그들은 이카로스의 추락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각자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다. 당장 '밭을 가는 것'이 나에게는 더 중요하다. "사람이 죽어도 경작은 계속된다"는 속담처럼, 그림 속 농부와 어부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인간의 본성을 엿본 느낌이다. 그런데 우리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에 이렇게 무심해도 될까?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브뤼헐은 말했다. 이카로스가 떨어진 것은 봄날의 일이었다고.
땅은 갈라지고,
농부는 쇠붙이로 대지의 배를 갈라 한 해의 숨결을 꺼내놓고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른 물결을 흔들며
자기 혼자 태양을 등에 업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태양이 날개의 밀랍을 녹였다. 그리하여 이카로스는 떨어졌다.
해안 근처 물 튀기는 소리.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았다.
그때 이카로스는 물속에 스러졌다. 햇살과 바람도 그의 마지막을 외면했다.

미국의 시인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이라는 시를 썼다고 한다. 챗GPT에게 서정주 시인의 스타일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이렇게 번역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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