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야 할까? 아이를 낳아야 할까?
세상에는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온 세상이 다 보는 것 같은 유명한 드라마, 본방 사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시 볼 기회는 차고 넘친다. 친구랑 술 마시기, 오늘 안 마셔도 된다. 술은 날 기다려준다. 하지만 부모님과 아이는 날 기다려주지 못한다. 그들의 사랑이 아무리 커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 엄마의 62번째 생신에 가지 않으면 다시는 갈 수 없다. 아이의 유치원 재롱잔치도 마찬가지다. 내 인생에 두 번째 기회는 없을 것 같은 일들, 그 일들을 우선순위에 배치한다면 힘은 들지언정 후회는 덜 할 것이다.
40살 유코는 미혼의 직장여성이다.
그런데 임신했다.
그것도 직장 후배와 떠난 출장에서
단 한 번 가진 관계로.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로는 선택을 고민을 하지만
마음은 이미 기울었다.
아이를 낳고 싶은 쪽으로.
하지만 장애물이 너무 많다.
'아이를 낳으면 호적은 어떻게 하지?
직장은 계속 다닐 수 있을까?
가족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지?
고향의 친인척은 얼마나 입방아를 찧어댈까?
아이 아빠에게는 말을 해야 할까?'
나, 임신했어!
마흔 살의 미혼인 유코가 언니에게 처음으로 임신 사실을 밝혔을 때 언니는 제일 먼저 불륜을 의심했고, 언니로부터 딸의 임신소식을 전해 들은 엄마는 '아이의 아빠가 되어줄 사람을 물색'한다. 직장 상사는 회사를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고, 여직원들은 소문을 퍼뜨리기 바쁘다. 아이 아빠인 미즈노는 '아이 아빠는 동창생'이라는 유코의 말을 애써 믿으며 진실을 외면한다. 각자의 입장에서 유코의 임신을 받아들인다.
마흔 살의 유코는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한다. 남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든 자기 파괴적인 결론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러라고 그래. 그럴 수 있지." 인정할 뿐 그들에게 휘둘리지는 않는다. 이런 게 나이의 힘이겠지.
번역작가가 책 말미에 이런 글을 적었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에서 주인공 브릿은 주위 사람들의 축하 속에 자신도 모르는 아이 아빠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한다. <맘마미아>에서 여주인공은 3명의 아빠 후보를 결혼식에 초대한다. 그런데 유코는 '호적을 걱정하고, 소문에 시달리고, 회사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아마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정상'이라는 고정관념이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문도, 성문도, 심지어 뇌주름도 다 다르다. 성격도 식성도 취향도 제각이다. 그런데 왜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정해진 틀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고정관념과 편견을 갖게 된다. 그리고 틀을 벗어난 사람을 향해 '마치 큰 잘못이라도 지은 것처럼 비판아니 비난'한다. 악의는 없다 하더라도 잔인한 가해자가 된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
문제를 혼자 끌어안고 전전긍긍하지 마라
"나 임신했어." 화장실에서 언니와 전화통화하는 걸 직장 동료가 들으면서 직장에 소문이 쫘하게 나고, 언니가 엄마에게 얘기하면서 고향에도 소문이 쫘하게 난다. 덕분에 문제는 해결의 가닥을 찾아간다. 큰 병은 소문을 내야 한다더니, 역시 큰 문제도 소문을 내야 문제 해결이 쉬워진다.
제발 '내 문제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라고 억지 부리지 말자.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지만, 함께 해결하면 의외로 쉽게 해결되는 일이 너무 많다. 높은 곳에 있는 선반에 무거운 짐을 올려야 할 때, 혼자 올리려고 하면 너무 힘들지만 둘이서 혹은 셋이서 힘을 합치면 간단한다. 도움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도움을 거절하고 혼자 하려고 애쓰다가 짐을 떨어뜨리면 자신이 다치거나 옆에 있는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하는 더 큰 문제를 만들 수도 있다. 걱정할까 봐 부모님에게 숨기고, 자존심 상해서 친구에게 숨기고... 숨기는 사이에 문제는 커질 뿐이다.
유코의 엄마는 자식들이 고향에 내려오면 늘 '보고회' 시간을 가진다. 맛있는 차와 다과를 준비해서 빙 둘러앉아 차례대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하는 시간을 가진다. 어쩌면 엄마는 그 시간을 통해서 함께 축하하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말고 나중에!
옛말에 '남의 흉은 삼일'이라고 했다. 유코처럼 소문쯤이야 가볍게 무시하고, 원하는 일이 있다면 용기를 내봐야 한다. 하지만 '지금 말고 나중에'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올지도 모른다. 힘든 일은 최대한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싶은 게 사람 본성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나중에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용기를 내겠다'고 부지런히 '정자와 난자'를 동결하기도 한다. 그런데 취재 차 만난 한 산부인과 의사는 이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내놨다. "정자를 동결하는 건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난자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난자는 젊은 나이에 채취해서 동결하더라도 자궁이 늙었기 때문입니다." 아, 역시 미루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유코 아이의 호적상 아빠가 되어주기로 한 동창생 본요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한다. “여기 후유다카가 있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호적이 어쨌든 누가 아버지든 그런 것은 후유다카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것이냔 말이지.” 본요의 마지막 이 한 마디가 묵직한 질문을 안겨준다.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ps.
1. 이 책은 2019년에 출간된 작품이어서 지금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꽤 있을 수 있다. 일본도 우리나라도 '인구감소와 저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고,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많은 장치를 마련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일본 사회의 중소기업에서는 임신을 하면 퇴직하고, 복직을 하더라도 아르바이트생으로 복직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고, 육아휴직을 가거나 아기가 아파서 조퇴를 할 때는 매번 상사와 동료를 눈치를 봐야만 했다고 하니,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읽자.
2. 채그로의 캡틴은 가키야 미우의 책의 많은 책들(이제 이혼합니다, 70세 사망법안 가결, 파묘 대소동) 중에서 '파묘 대소동'을 강추했다. 설날 고향 가는 차 안에서 읽기에 딱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