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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쓸모

환상인 동시에 현실의 장소, 정원

by 효문

틱낫한 스님은 생전에 자주 텃밭에 나가서 일을 했다고 한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스님의 책에서 이와 관련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얼추 이런 상황이었던 것 같다. 스님이 텃밭에 나가 일을 하려고 하자 한 신도가 스님을 말리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스님, 이런 일은 저희가 할 테니까 스님은 더 중요한 일을 하세요" 글을 쓰고, 법문을 하고, 수행을 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자 틱낫한 스님이 이런 답변한다. "이 일을 해야, 그 일들을 잘할 수 있습니다."


햇볕을 쬐고, 바람을 느끼고, 흙을 일구는 육체노동이 전제될 때 더 수준 높은 정신적 노동을 할 수 있다는말이다. 그래서 워즈워드도 처칠도 프로이트도 그토록 원예와 정원 가꾸기에 진심이었던 것일까?




2024년 채그로에서 읽었던 많은 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권을 꼽는다면

이 책 '정원의 쓸모'였다.



"원예는 반복이다.

내가 이만큼 하면 자연이 그만큼 하고

거기 내가 응답하면

자연도 다시 응답하는 식으로 반복하는 게

대화와 비슷하다." - 21p



정원에서 이루어지는 자연과의 대화가

우리의 몸과 정신에 또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를 깨닫게 한다.





서부전선의 참호에도
시리아 난민 캠프에도 있었던 '정원'


총알과 포탄이 쏟아지고 매일 같이 사람이 죽어나갔던 서부전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참호 정원을 가꿨다고 한다. 꽃을 심어 정원을 만들고, 텃밭을 가꿨다. 죽음은 언제라도 올 수 있지만, 그전까지는 삶을 살아내야 했으니까 그들이 머무는 그 참담한 공간을 '생명력이 있는 공간, 아름다운 있는 공간'으로 가꿨다.


렌몬트리라는 자선재단에서 시리아 난민 캠프에 정원을 만들었을 때, 난민들은 식량 문제가 절박한데도 불구하고 정원에 먹을 수 있는 작물이 아니라 식물을 심었다고. 심지어 그들이 정원에 심은 식물 중 70%가 꽃이었다고 한다.

생사가 오가고, 당장 저녁거리가 없어도도 정원을 가꾸고 꽃을 심는 건 어쩌면 아름다운 공간 속에서 비소로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고, 거기서 희망을 발견하고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원예란 일종의 연금술, 씨앗과 토양과 물과 햇빛을 엮어서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마술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에너지를 쏟아 흙을 일구면 무언가 대가가 따른다. 거기에 마법이 있고, 성실한 노력도 있다. 무엇보다 땅이 낸 열매와 꽃들은 현실이 된 좋음의 형태다. 원예에는 믿음을 줄 가치가, 그것도 우리 손 땋는 곳에 있다. 씨앗을 뿌리면서 우리는 가능성의 서사를 심는다. 그것은 희망의 행위다. 씨앗이 전부 발아하지는 않지만 땅에 씨앗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안정감이 느껴진다. - 81p



"최근 어린들이 실외에서 보내는 주당 평균 시간은
최대 보안감옥의 수감자보다 적다."


어디 어린이뿐일까? 많은 사람들이 실내에서 자연과 멀어진 채 디지털에 둘러싸인 채 살아간다. 그래서 현대인은 수명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심신은 충분히 건강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웨덴 찰머스 공과대학의 건축학 교수 로저 울리히는 심장, 피부, 근육의 측정치를 분석해 자연이 인간 스트레스 반응에 미치는 이로운 효과를 연구했다. 30년에 걸친 연구는 자연이 몇 분 안에 심혈관계에 명백한 회복 효과를 준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보여주었다. (...) 심박수와 혈압의 변화는 자연환경에 몇 분만 노출되어 감지된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수치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지만 통상 20~30분 후에 떨어진다. (...) 우리는 빛이 영양소라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피부에 햇빛을 쬐면 비타민D가 만들어지고, 햇빛의 청색광은 수면-기상 주기를 설정하며, 두뇌 속 세로토닌 생산 속도를 조절한다. 세로토닌은 행복감의 배경이 되고, 기분을 조절하며, 공감을 높여준다. 또 우리의 생각과 반응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공격성을 낮추고, 반성적 사고를 촉진하며, 충동 성향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자연이 보약'이고 '만병통치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트레스 쌓인다고 불평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 걷자. 맛집만 찾아가지 말고 풍경 좋은 공원에도 가자. 텃밭이나 정원을 가꿀 공간도 여력도 없다고 투덜거리지 말자. 시리아 난민도 하고 서부전선 병사들도 했는데, 설마 내 환경이 그들보다 더 열악할까. 커피 마시고 남은 일회용 컵에도 채소를 키울 수 있다고 하니 한 번 도전해 봐야겠다. 그 컵에 심을 작은 씨앗은 분명 놀라운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씨앗은 자신이 어떻게 될지 말해주지 않는다. 크기도 그 안에 잠든 생명과 관계가 없다. 콩은 폭발적으로 자란다.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거의 난폭할 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담배풀 씨앗은 먼지만큼 작아서, 어디 뿌렸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씨앗만 보면 구름처럼 피어나는 향기로운 꽃은 고사하고 어떤 시시한 일도 해낼 거라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그렇게 한다. - 19p


반찬값 아껴서 꽃을 사야겠다

<목욕탕집 남자들>이라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반찬값 아껴서 꽃을 사는 여자'라고. 찾아보니 무려 30여 년 전 드라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대사가 기억에 남아 있다. 어쩌면 그 시절 나는 '먹지도 못하는 꽃은 왜 주냐고, 차라리 돈으로 달라'라고 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반찬값 아껴서 꽃을 사고 싶다. 나를 그리고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가꾸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예를 들어서 마음도 조금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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