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없이 무작정이었다고 해도 6개월간, 매주 토요일 6채~7채의 집을 보러 다니자 풍월을 조금씩 따라 읊기 시작했다. 동네 이름이 좀 친숙해져서, 코필드(Caufield) 옆에 카네기(Carnegie) 하는 식의 얄팍한 지식이 쌓였다. 그래 봤자, 상도역에서 내려서 조금 걸어가면 흑석동 나온다는 것을 알아차린 정도이지만.
동, 서, 북으로 3등분 한 짤막한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 편견 인지도 몸소 깨쳤다. 동남쪽에도 사람들이 꺼려하는 혐오시설은 곳곳에 지뢰처럼 포진해 있었다. 집이 마음에 들면, 구글맵으로 동네부터 살폈다. 거주 밀집 지역 사이사이로, 모양이 이상한 공원이 있다면 공동묘지였다. 호주 사람들은 공동묘지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다고 한다. 길 건너에 비석이 빼곡한 공동묘지를 끼고 있어도, 집값은 똑같이 비쌌다. 큰 도로를 따라 세워진 송전탑 위치도 봐야 했다. 공원이 가까우면 좋지만, 너무 크고 인적이 드문 공원과 맞닿은 집도 밤이면 무서울 것 같아 피했다.
물론 혐오시설과 반대로 값비싼 집들이 모여있는 부촌도 동, 서, 북 방향과 상관없이 어디에도 존재했다. 대부분 우리와는 큰 상관이 없는 집값의 동네들이었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늘 주문처럼 '저런 동화 같은 집에 살고 싶다'라고 말했던 유럽풍 집들도 있었다. 집보다는 대저택에 가깝고 마당이 꽃으로 꾸며진 이 멋진 집들은 사실 24시간 자동차 소음에 시달리는 곳이었다. 당연히 가격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저렴한 선에서 책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음은 내게 타협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집을 보러 다닐수록 피해야만 하는 굵직굵직한 큰 도로들 이름이 익숙해졌다.
부동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자, 흐릿했던 것들이 조금씩 밝아졌다.
하나씩 아주 조금씩 해상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우리 스스로의 기준도 조금씩 명확해졌다. 살 수 있는 집의 범위가 정해졌다.
우리나라에 이런저런 살림들을 정리해 와, 호주 통장 한 군데로 몰았다. 드디어 우리 자산이 한눈에 보였다. 거기에 회사에서 받은 pay slip (월급 명세서)이 쌓이자 은행은 구체적으로 '네가 얼마의 현금을 가졌을 때, 얼마짜리 집까지 살 수 있어'라는 가이드라인을 주었다. 대략 6억 정도가 허용된 듯했고, 욕심을 낸다면 7억짜리 집까지도 손을 뻗어 봄 직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살고 싶은 집은 7억 5천 정도는 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손끝을 아련하게 스치는 그곳에 목표는 자리 잡고 있었다.
부동산 시장은 토요일이 가장 바쁜 요일이다. 웹사이트를 통해 아침 9시 즈음부터 오후 3-4시까지 차곡차곡 인스펙션 스케줄을 잡았다. 그 중간중간 경매도 구경했다.
호주는 부동산을 통해 오퍼를 넣어 집을 사거나(Private sales), 현장에서 경매로 집을 산다(Open auction). 지금 이 순간 빅토리아 주 전체에 1,136건의 경매가 예약되어 있고, 그 밖의 매매 건수가 1,119 건이라고 한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경매의 비중이 많이 낮아졌지만, 대체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비율을 가지고 있다.
보통 층마다 구조가 비슷한 아파트보다는 다 다른 장단점을 가진 하우스 쪽이 경매의 비율이 높다. 하우스는 정확하게 비교해낼 구체적인 지표가 없다. 대지면적, 사용한 자재, 평면 구성, 관리상태 모든 게 집값을 결정하는 변수로 작용한다. 그래서 정확히 매겨진 가격보다는, 경매 당일 사람들의 심리와 현장의 분위기에 조금 더 의존하게 된다.
경매야 말로 진풍경이었다.
내가 꼭 사고 싶어서 애가 닳은 집만 아니라면, 이렇게 재밌는 구경도 또 없을 것이다.
(좀 더 편하게 읽히도록, 돈 액수는 대략적인 원화로 환전한 금액으로 변환하였습니다.)
일단 포르셰나 벤츠, 아우디. 번쩍번쩍한 차를 보란 듯이 거리에 주차한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말끔한 정장으로 빼입고 팔려는 집 앞을 지키고 있는다. 집 앞 골목에는 큼지막하게 'AUCTION'이라고 팻말을 써 붙이고, 그 뒤로는 빛 잘 들고 넓어 보이게 찍은 집 사진 몇 장이 걸려있다. 경매 시작 시간이 다가오면, 집 앞 거리로 북적북적 사람들이 모여든다. 구경 나온 동네 주민부터, 아들 손자며느리 모두 손 잡고 나온 긴장된 가족까지 각양각색의 모습이다.
부동산들은 집에 가장 예쁜 곳들을 큼지막 하게 사진 찍어서 광고해둔다. 그들은 이 한장짜리 광고판 안에서 '이 곳이 얼마나 살고 싶은 장소인가'를 증명해야만 한다.
정각이 되면, 딱 봐도 경력이 만렙으로 보이는 부동산 중개업자가 마이크를 들고 관중들의 중간으로 시선을 끌며 입장한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 집으로 말씀드리자면, 교통의 요지로 엄청난 발전 가능성을 가진 동네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족 중심적인 구조로 볕이 잘 들고, 아름다운 뒷마당에서는 당신이 꿈꾸던 생활을 이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소개는 언제나 화려하다. 조금은 어릴 때 시장에서 옷을 팔던 아저씨를 연상시키는 언변으로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10분쯤 이어진 거창한 집 소개가 끝나면, 부동산이 처음 공시했던 가격 언저리에서부터 경매를 시작한다.
"6억 있습니까?"
한쪽에서 조용히 손을 들면, 곧바로
"6억 천 있습니까?"
하면서 가격을 올리고, 어디선가 손이 쑥쑥 올라온다. 그러면 곧 손을 들었던 사람 주위로는 부동산 직원이 하나씩 종이와 펜을 들고 달라붙는다. 그들은 바쁘게 뭔가를 종이에 적으며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을 코칭하기 시작한다.
"6억 5천 나왔습니다. 6억 5천! 6억 6천 있습니까?"
언뜻 보면 진행하는 부동산 직원의 원맨쇼 같은데, 현장은 묘한 긴장감에 얼어붙어있다. 사람들의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고 싶어 하는 인기 있는 집의 경매에서는 진행 속도도 사람들의 눈치싸움도 더 빠르고 격렬하다. 시장 아저씨처럼 마이크에 대고 끊임없이 말해 주위를 환기시키는 부동산 직원은 오히려 존재감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그만큼 서로를 탐색하느라 오가는 시선이 바쁘다.
집 앞 대로변에서 경매를 진행하다 보니, 혹여 실수로 잘 못 들어선 차 때문에 경매가 중단되는 일이 종종 있다. 그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깨지면서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한다. 이때도 길어야 1분? 아주 잠깐 공기가 바뀌는데, 이런 시간이야 말로 사람들이 이 경매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그 열기를 확연히 보여준다.
천만 원 단위로 빠르게 올라가던 경매는 경쟁자 둘, 셋을 남기고는 바쁘게 올라 치는 기세가 한풀 꺾인다. 여전히 부지런히 손을 들어 숫자가 빠르게 올라가지만, 그 폭은 백만 원 단위로 줄어든다.
"7억 2천3백만 원"
"7억 2천4백만 원"
"7억 2천5백만 원"
신이 난 부동산 중개업자는 경쟁자 둘 사이로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으며 사람들을 부추긴다.
두 경쟁자 옆에 서서 종이에 무언가를 쓰며 코칭하는 직원들의 손길도 바빠진다.
"자, 지금 7억 3천3백만 원. 가격을 세 번 부를 때까지 다른 비딩이 없으면 확정됩니다."
"칠! 억! 삼! 천! 삼! 백!"
"칠! 억! 삼! 천! 삼! 백!"
진행을 하던 부동산 직원이 목에 핏줄이 생길 듯 금액을 강조해 부른다. 꿀떡. 아마도 마지막으로 7억 3천3백만 원을 부른 이는 지금쯤 다리가 저려오겠지? '제발 아무도 나타나지 마라. 제발 아무도 나타나지 마라.'
하지만, 그의 바람을 비웃듯 숨어있던 고수들은 이쯤 되어서야 처음 등장한다.
"칠억 오천"
관심 없는 듯 관망하던 새 경쟁자가 작은 목소리로 등장하면 현장에 있던 부동산 직원들은 바쁜 눈짓으로 새 경쟁자를 반긴다. 그렇게 서너 번쯤 밀고 당기는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 집은 오늘 칠억칠천 이백에 팔렸습니다. 축하합니다!" 하며 경매가 마무리된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박수를 치며, 집의 새 주인이 탄생한 것을 축하해준다. 새 보금자리를 찾게 된 오늘의 승자는 아끼지 않고 환호하며 승리를 자축한다. 마지막까지 레이스에 참여했다 지친 패배자는 아쉬운 듯 저마다의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바쁘다.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은 콘서트가 끝나고 대중교통을 찾는 관중들처럼 썰물을 지어 빠져나간다.
처음엔 그저 재밌었다. 방금 난 누군가의 7억 7천만 원짜리 드라마를 처음부터 지켜본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쇼핑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한마디만 더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기회를 놓친 속이 쓰린 패배였을 테다.
내가 본 첫 경매는 우리가 살던 아파트 바로 옆집이었는데, 20억을 훌쩍 넘긴 경매 금액에 입이 떡 벌어졌다. 20분 만에 오른 금액이 4-5억 원은 되는 듯했다. 우와-
첫 경매로 팔린 옆집은 고전적인 외관과는 달리, 잘 수리해놓은 내부가 깔끔했다. 골목길에 나란히 줄지어 있던 쌍둥이 같은 낡은 집들의 반전 내부가 충격이었다.
경매는 매번 한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했다. 한낮의 사막에서 뱀과 새의 공격을 간신히 넘기며 자신의 굴로 도망쳐오던 도마뱀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막 모래 언덕을 이리 넘고 저리 넘고, 뱀에게 따라 잡혔지만 간발의 차로 다시 따돌리며 줄행랑을 치던 그 귀여운 뒷모습. 분명 손에 땀을 쥐게 만들지만, 내가 그 사막을 달리는 건 아니었기에재미있었던 그 다큐가 떠올랐다.
경매도 누군가는 인생의 손에 꼽히는 인상적인 순간이겠지만, 내겐 그저 한 편의 오락 같았다.
그랬다.
내가 정말 사고 싶고, 어느 정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집의 경매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정말 그랬었다.
시간이 지나 우리의 첫 경매를 하루 앞둔 금요일 밤, 우린 나름 만발의 준비를 했었다. 남편과 경매 전략을 짜며, 부동산이 범위로 공시한 금액 안에서 가장 높은 쪽 금액을 계산기에 넣었다. 세금을 내고, 집을 사면 서류 작업을 해줄 변호사 비용을 빼고, 우리가 가진 돈과 돌려받을 보증금을 넣고. 이것저것 넣고 빼고 하면서 머리를 한참이나 굴렸다. 결론은 아끼고 빚내면 한동안 빠듯하겠지만, 못 할 것도 없는 금액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다음날, 우리가 머리를 쥐어짜 준비해 간 그 금액은 경매를 시작한 지 1분? 아니 어쩌면 30초? 안에 지나가 버렸다. 손을 들지 말지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그냥 우수수 손을 드는 무리들에 섞어, 정신이 들었을 때 경매금액은 우리가 준비해 간 금액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그날 그 집은 부동산 공시 가격보다 2억 5천쯤 비싸게 팔렸다.
우리의 첫 경매였다고 하기에는 너무 아무것도 못해보고 돌아온 어느 씁쓸한 주말 아침이었다.
그날 남편과 나는 젖어 지친 날개를 접고 앉은 새처럼, 집 바닥에 늘어져서 한참이나 푸념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