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의 경매를 시도해 봤지만, 매번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행여나 머리를 넘기는 손이 경매에 참여한 걸로 보일까 봐 머리도 함부로 못 넘길 만큼, 엄청난 가격들이 오고 갔다. 만발의 준비를 하고 가서, 겸손하게 손을 모으고 돌아오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어렴풋이 부동산이 제시한 가격은 그저 '참고'용일 뿐이었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범위로 제시된 가격에서 제일 비싼 가격, 거기에 적어도 15%- 20% 정도는 더 얹어야 의미 있는 값이 나왔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의도적으로 가격을 낮춰서 광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집 값이 오르는 상황에서 예측하는 값은 언제나 실질적인 가격 트렌드를 반영하지 못했다.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돈의 15%쯤 할인된 금액으로 필터를 고쳤다. 그래야 실질적인 '오늘의' 매매 가격이 보일 것 같았다. 그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지도에서 빨갛게 표시되던 매물은 또다시 멀어져 뚝 떨어진 지역에 검색되어 나왔다. 그나마도 집이라기보다는 캠핑카 같았다. '하아. 저런 집에서 살면 겨울에 야외 취침하는 것보다는 아주 조금 더 따뜻하겠지?' 싶었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희미한 집이었다. 허물어 질 것 같은 집인데 놀랍게도 아이 키우는 집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동네에 있던 아파트 매물을 방문하게 되었다.
우리가 예산으로 잡고 있던 딱 6억 원 중반대의 가격이었다. 집이 엄청나게 넓다거나 파격적으로 좋지는 않았지만, 살 만했다. 깔끔하게 마무리된 내벽을 가졌고, 새로 깐 카펫이 깔려있었다. 50년, 100년 된 집을 보러 다니다가 지은 지 2년 이내의 신축 아파트를 보자, 마음이 동했다. 나름 선진 시스템들도 도입해두었다. 수납이 다양한 모양으로 짜인 주방이라던가, 이중창이라던가, 바꾼 지 얼마 안돼 반짝반짝하는 벽걸이 에어컨이라던가. 우리나라에서 살 때는 너무 당연해서 확인도 안 했던 부분들이 새삼 감동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햇볕이 내리쬐는 집안 곳곳이 포근했다. 집 같았다.
딱히 우리가 아파트를 꺼려한 건 아니었다. 개인적인 선호도라기보다는 전적으로 호주 사람들의 선호도를 따라 하우스를 보고 있었다.
호주에서는 그래야만 한다고 했다.
대학원에서 처음으로 들었던 강의 중에 'Sustainable infrastructure(지속 가능한 인프라)'라는 강의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호주스러운 강의였다. 학생들의 참여도 많이 유도했고, 그러기 위해 강의에 벽을 많이 허물었다. 가끔은 춤도 추고, 릴레이 발표도 하고, 게임도 해야만 했다. 무척 인상적인 강의였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건 강사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일관성 있게 '아파트' 자체를 비난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시티(CBD)에 세워진 수많은 빌딩 사진을 프로젝터로 띄우며 '이딴 성냥갑 같은 집에 대체 누가 살고 싶어 하냐'라고 물었다. 우리 부모님의 평생의 소원이자, 나의 20대 내내 동경의 대상이었던 신축 아파트들이었다. 그녀는 건축 기준만을 간신히 맞춘 2.5m 높이의 천장에 방과 화장실만 딸린 답답한 성냥갑이란 말을 강의 내내 여러 번 내뱉었다. 시내 아파트를 극도로 선호하는 중국인 학생들이 꽤 있었지만, 그녀의 강한 비판에 선뜻 누구도 나서지 않고 불편하게 듣고만 있었다.
도시마다 다르지만, 최소한 멜버른의 아파트 값은 지난 10년 동안 오르지 않았다. 언제나 분양가가 제일 높게 측정되어 있었고 거기서 몇 천만 원씩 떨어지는 추세였다. 호주 사람들은 뒷마당 바비큐를 포기할 수 없기에 아파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냥 생활 패턴 자체가 이들과 맞지 않았다.
게다가 멜버른은 급격하게 개발되면서 시티에 무수한 아파트들이 새로 들어섰다. 빈집이 생길 만큼의 공급과잉은 아니었지만, 값이 오를 만큼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집을 사러 다니는 초기만 해도 현실감 없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살 만한 집이 투자가치까지 있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집값이 많이 오른다는 땅을 가진 하우스를 보러 다녔다. 하지만, 6개월 정도의 좌절 끝에 하우스는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집다운 집을 살 수 없었다. 치안을 포기하거나, 대중교통을 모조리 포기하거나, 허술해 쓰러질 것 같은 집을 눈감아 줘야만 했다. 집 안에 침낭이라도 사둬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아파트가 전혀 투자가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집 값은 거의 오르지 않지만 (신축의 경우, 오히려 떨어지지만) 렌트를 놨을 때 투자 자금 대비 렌트 비율(Rent yield)은 하우스를 월등히 뛰어넘었다. 결국 하우스는 사서 묵히면 오르는 가격만큼 시세차익을 노리는 것이라면, 아파트는 당장 크진 않지만 꾸준한 수입이 생긴다. 특히 시내 아파트일수록 가격 대비 높은 렌트비를 받을 수 있었다. 월급 외의 불로소득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들이 모두 만류하는 '아파트를 사야만 하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남편과 둘이 나란히 컴퓨터에 앉아 부동산 사이트의 필터를 아파트로 고쳤다. 그리고 차례로 침묵을 깨고, 아파트를 사야만 하는 이유들을 나열했다.
"우린 집을 딱 한채만 사려는 게 아니잖아. 투자는 분산투자인데, 결국 집을 다섯 채쯤 산다면 그중 한 채는 아파트 아닐까? 그걸 미리 당겨 산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아파트를 사면 6억대로 방 두 칸짜리 매물을 우리 마음에 쏙 드는 걸로 고를 수 있어"
"6억대로 집을 사면, 첫 집 구매 혜택(First home buyer)도 받을 수 있다고."
"더 나이 먹기 전에 시내 한복판에 살면서 인프라의 혜택을 누려봐야 하지 않을까? 한 쌍의 불나방처럼 밤거리를 쏘다니며 칵테일바도 가고, 쇼핑도 다니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마음은 '예산 안에서 살 수 있는 집다운 집'인 아파트로 정해진 상태에서 마음의 평화를 위한 끝장 토론을 이어갔다. 하우스만 보고 다닌 지 약 7개월 만에, 결국 우리는 아파트를 사기로 마음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