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말이 나오자, 의사 결정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대학원 졸업을 위해 에세이를 쓰고, 시험을 치듯 당연한 다음 과제가 됐다. 다만 에세이를 써야 하는데, 학교 온라인 시스템이 익숙지 않아 에세이 주제조차도 확인 못한 기분이었다. 남들은 글을 써나가는데, 나만 학교 홈페이지 로그인 비밀번호를 찾아 헤매는 기분이랄까?
뭐부터 해야 하지?
일단, 어정쩡하게 합쳐져 있던 남편과의 돈을 정리했다. 남편은 오히려 깔끔했다. 호주에서만 쭉 살았던 덕에 대형은행 두 군데에 돈을 나눠 담아 뒀다. 문제는 나였다. 이런저런 재테크에 대한 '주워들은' 지식은 방대한 투자 기록을 남겼다. 역시 책 몇 권으로는 전문가가 될 수 없었다. A 책에서 언급한 지출 통장 나눠 담기, 은행에서 추천해줘서 조금 넣다만 펀드, 믿을 건 '금, 땅, 미달러'뿐이라며 사둔 금 통장과 외환 통장. 솔직히 해외에 살면서 천만 원 단위로 돈을 쪼개 놨더니, 얼마 있지도 않은 내 자산이 총얼마인지 헷갈렸다.
종신보험도 해지했다. 이제 많이 아파도 호주에서 치료를 받겠지, 싶었다. 복잡한 질문 세례를 뚫고 가입했던 거에 비하면 간단하게 해지 절차가 종료됐다. '정말 보험을 해지하는 게 맞나?'정도만 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낸 돈의 절반 정도를 뚝 뗀, 시원하게 할인된 금액이 통장으로 들어왔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각각 1890년, 1900년에 지어진 은행 건물들이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다. 이미 사람이 사는 집으로 바뀐지 오래지만 130년 전에 사용하던 간판을 그대로 두었다.
멜버른 집값을 대략적으로 알아보는 건 오히려 쉬웠다.
(호주도 주마다 법이 다르기에, 다른 주는 그렇지 않지만) 멜버른은 부동산에서 집을 광고할 때 예상되는 집 값을 공시하게 되어있다. realeastate.com / domain.com 두 쌍벽 사이트에 사이좋게 등록된 부동산 가격들을 마르고 닳도록 체크했다. 필터를 이렇게도 걸었다 저렇게도 걸었다 했다. 땅 크기에 필터를 걸었다가, 집 타입에 필터를 걸었다가, 지역에 필터를 걸었다가.
'아, 우리 옆집에 통통한 할머니 집은 대략 이 정도 가격이구나'. 그제야 내가 멜버른에 손에 꼽히는 비싼 지역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말번 (Malvern). 호주 발음으로는 '몰브~언~' 정도 되는 이 지역은 구글 서치 첫머리에 'expensive suburb'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어쩐지 동네가 그렇게 평화롭고 따스하더라니.
물론 알고 이사 들어온 건 아니었다. 월세 가격은 방 개수, 크기, 건물의 낡은 정도에만 크게 좌지우지되지 사실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검색하다 운 좋게 발견했고, 경쟁자가 없었다. 부동산에게는 돈 안 되는 작은 매물이었다.
필터를 걸어 어느 동네, 방 세 칸짜리 주택이 얼마 정도 하는가?를 찾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건, 그 쏟아지는 것 같은 정보 사이에서 내게 적합한 집을 찾는 일이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아파트를 사야 하는지 주택을 사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는다. 지역도 알 수 없었다. 살고 있는 '몰브~ 언~' 이 좋았지만, 방 두 칸짜리 아파트도 턱없이 비쌌다. 화려하게 디스플레이된 명품샵을 지나, 마트 매대에서 옷을 고르려니 속이 쓰렸다. 하지만, 주머니에 가진 게 그것뿐이라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밀어내야 했다. 그리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내 맘대로 착착 진행되리라 기대한 건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인생일대의 쇼핑이다 보니 갈길은 구만리인데 걸음마다 돌에 체였다. 정보는 방대했고 조금은 고대 이집트 벽화처럼 알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말들이 쏟아졌다. 단계마다 '들어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는' 단어들이 후드득 쌓였다.
도움을 받기 위해 부동산 계의 선두주자들에게 귀동냥을 했다. 조금씩 조금씩 조각모음을 했다.
지역에 상관없이 이미 주택을 소유하고 있거나, 최소 우리보다 몇 달 정도 먼저 집 구매에 나선이들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멜버른은 시내(CBD-central business district)를 중심으로 동, 서, 북이 극명하게 다른 트렌드를 보인다고 했다. (남쪽은 바다다.)
멜버른 지상철(Tram) 지도. 동그라미의 중심이 시내(CBD)이다.
서쪽은 집값이 싼 대신 치안이 안 좋다고 했다. 교통이 특히 안 좋은데 시내 (CBD) 왼쪽으로 바닷길이 있기에 반드시 west gate bridge라는 다리를 건너야만 한다. 그 다리 건너에 살고 있는 한 지인은 그 다리를 'west hell gate (웨스트 헬 게이트)'라고 불렀다. 출퇴근 시간마다 전쟁을 치른다는 게 그의 이야기였다. Ok. 서쪽 제외.
북쪽은 미지의 세계 같았다. 호주인들이 많이 산다고는 하는데, 역시 치안이 안 좋다고 한다. 그나마도 이야기에 힘이 없었다. 아는 이들이 통 없었고, 사는 이도 (그때까지는) 만나보지 못했다. Ok. 북쪽 제외.
남은 건, 동쪽 그리고 동남쪽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몰브~언~'도 동남쪽이었다. 그때 이야기를 하던 지인들 누구도 예외 없이 동남쪽은 좋은 동네라고 입을 모았다. '나는 안 샀지만 동남쪽에 집을 샀으면, 부자가 됐을 거다'라고 했고, '집값은 동, 그리고 동남쪽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라고 했다.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필터는 동남쪽을 향해가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살 수 있는 가격을 필터에 넣고 나면 그 많던 빼곡하던 집들이 일순간 싹 사라진다는 점이다. 좋은 동네는 맞는 거 같은데, 뭐 가서 볼 집도 없었다. 점점 동남쪽 방향이긴 한데, 시내에서 밖으로 밖으로 나가기만 했다.
집을 멀리에 사게 되면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당연히 출퇴근이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13년 전통을 자랑하는 장롱면허여서, 대중교통이 없으면 출퇴근이 막막했다. 백번 양보해 거짓말처럼 운전을 배워 '쨔잔' 운전을 한다 쳐도 문제였다. 내 마음에 드는 집은 언제나 남들 마음에도 들었다. 좀 '괜찮다' 싶은 집들은 부동산 제시 가격에서 우습게 1,2억을 넘겨 팔렸다.
한 달, 두 달, 세 달, 네 달. 하염없이 집을 보러만 다니는 시간은 길어졌고, 솔직히 집을 보러 간다고 해서 뭘 봐야 하는지, 뭘 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방향과 속도만 다른 또 다른 급류의 한 복판에서 이리저리 휘둘리고만 있었다.
정원이야 말로 집주인의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임에 확실하다. 가끔 눈이 시릴만큼 푸르게 정리된 정원들을 만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