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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디 Aug 09. 2021

이 도시에게 나는 완벽한 '을'이었다.

멜버른은 너무나 매력적인 도시였다.

내가 처음 멜버른에 도착했던 2015년 9월. 이른 봄이 찾아온 멜버른은 선선한 온도를 품고 있었고, 분홍 빛이 도는 목련이 싱그럽게 펴 있었다. 골목골목마다 커피 향이 물안개처럼 스쳤다. 대충 눈대중으로 세도 편의점보다 카페 수가 월등히 많았다. 비 걷힌 고풍스러운 도시의 전경 위로,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이 바쁘게 발길을 옮겼다. 촌스럽게 그런 장면이 멋있었다.

주로 땅에서 기름이 샘솟고, 사람은 잘 살지 않는 사막이나 정글 같은 오지를 전문으로 다녔던 내게 멜버른은 많은 것들을 잔뜩 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음을 두드린 건 생동감이었다. 건드리면 통 터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음악의 도시, 빈', '신들의 정원, 발리'처럼 멜버른에 표어처럼 따라다니는 키워드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일 것이다. 하지만 6년쯤 살아본 내게 정말 멜버른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냐고 묻는다면 '아닙니다. 그거 여기 아닌 거 같아요' 하며 손사래를 칠 거다.

"아니에요, 거 뭔가 이상한 지표네요!"

멜버른에는 오래된 집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집도 지은지 100년쯤 됐다고 한다. 흔하다. 보통 외벽만 남기고, 내부는 살기 좋게 레노베이션을 한다.

하지만, 분명 유쾌하고 매력적인 도시임에는 확실하다.

일단, 음악과 스포츠와 문화, 것과 자연환경이 적절히 섞여있다. 한마디로 풍요롭다. 


단적인 예를 찾으려면, 이들의 공휴일을 눈여겨봐야 한다.


AFL이라고 불리는 호주식 축구? 럭비? 경기는 고작해야 오금동 옆에 송파동 정도로 팀을 나눠 해마다 경기를 하는데, 아이 어른 것 없이 스포츠에 빠져 산다. 이들의 축구 선수이자, 야구선수이자, 배구 대표팀인 AFL 선수들 얼굴을 담은 엽서를 판매하고, 도시 (우리나라 행정구역으로 치면 '시'보다는 '동'정도가 적당하지만) 팀마다 상징인 쨍한 색깔의 목도리를 해리포터처럼 두르고 다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AFL에 진심인 명백한 증거는 바로 AFL 파이널 하루 전날이 공휴일이란 점이다. 당일도 아니고, 하루 전날!

그 대단한 경기를 준비하고자, 학교, 직장, 관공서, 병원 모두가 문을 닫고 비장한 마음으로 응원전에 나선다.


'Go! Richmond!'

리치먼드 팀의 상징인 호랑이 얼굴을 백팩으로 맨 소녀가 소리치며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멜버른 컵은 어떻고?

저 격렬한 AFL 파이널이 지나고 한 달 뒤면 곧바로 'Melbourne Cup'이란 공휴일이 다가온다. 이 날은 중세시대 의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화려한 드레스와 머리장식을 하고, 경마장을 찾는다.


트랙 위를 달리는 말과 로또 종이 같은 티켓.


정말 경마를 하는 날이다. 매년 멜버른컵이 끝나면 우승자와 우승마, 그리고 1등에 '당첨'된 이들의 사연이 뉴스 1면을 장식한다. 다른 의미는 없이 국가적인 경마 행사에 온 국민이 또 하루를 쉬어버린다.


매번 한 달 건너 다시 찾아오는 자주 있는 공휴일도 아니다. 일 년에 고작 열흘 남짓한 공휴일을 하루는 스포츠로, 하루는 경마로, 하루는 쇼핑(boxing day)으로 써버렸다. 의미와 역사보다는 실질적인 니즈를 택한 공휴일들임에 틀림없다.


참 재밌는 도시였다. 진지하고 비장한 분위기보다는 뒷마당에서 바비큐나 구우면서 맥주를 들이켜는 모습이 어울렸다. 호주 사람들은 정말 매일 5시에 (혹은 3시에) 퇴근해, 뒷마당에 모여 앉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자연히 운동도, 강아지 산책도, 공연도, 해변가의 어설픈 푸드트럭까지도 관심사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있다.


도시 곳곳에 버스커들이 음악을 그리면, 구경꾼들은 자유롭게 나와 춤을 췄다. 누구도 눈치 보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그냥 신고 있던 쪼리를 한쪽에 벗어던지고 맨발로 나와 음악에 올라섰다. 그저 덩실거리는 수준의 움직임인데도, 마음속 흥겨움이 전해졌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호주 오픈이나 멜버른 코미디 페스티벌처럼 이름난 행사도 많다. 하지만, 그보다는 작고 허술할 만큼 소박한 축제가 끊임없이 열렸다. 재즈 페스티벌, 무료 오페라 공연, 타투 박람회, 이탈리안 영화 축제, 가든 디자인 페스티벌, 보타니컬 가든에서 열리는 노천 극장까지. 동네마다 한 블록 한 블록 자그마한 이벤트들이 계속 있었다. 그리고 그 조촐한 행사조차도 참 열성적으로 즐겼다. 중고품을 판매하는 선데이 마켓이라도 가면, 어릴 때 아빠를 따라나선 달구벌 축제가 떠올랐다. 사람들의 표정은 가벼웠고, 삶의 문턱마다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담아두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멜버른에 두 달쯤 살아보면서는 신이 나면서도 묘하게 부아가 치밀었다.

그 오묘한 기분들을 지금 곱씹고 곱씹어 나열해 보자면, 우선 내가 살았던 비장하고 치열했던 20대가 통째로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자기 계발서 천권을 읽어야만 뒤처지지 않고 아득아득 살아남는 방법을 통달한다는 강사의 말을 곧이 믿었다. 월급에 꼬박 5만 원 정도는 자기 계발서를 사는 비용으로 매달 흘려보냈던 것 같다. 경쟁에서 휩쓸려 떨어지지 않고 버티려면 늘 초조했다. 시험이나 경연이 아닌, 일마저도 그렇게 접근했다. 꿈에서도 도면을 받아 사인을 했고, 주문한 물량이 제때 들어가지 않아 애를 태웠다. 아득아득  무얼 상대로 이겨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내내 무언가와 싸웠다.

하지만 악을 쓰면 쓸수록 남는 건 결국 앙상한 깡뿐이었다. 꼬락서니를 부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안감힘을 쓰고, 돌아서 집에 오면 사람들의 눈에 비칠 내 모습이 걱정돼 잠을 설쳤다.

그런 까칠하고 예민했던 나의 20대에게 직접 충고를 날리듯, 호주에서 만난 사장님은 4시에 퇴근하다 멈춰 나를 보고 짐짓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집에 가, 그렇게 예민하게 고민해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마도 또 꽤 꼴사납게 주름을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오기도 발동했던 것 같다. 바로 영어였다. 지난 10년간 주말마다 영어 시험을 보고, 새벽 2-3시까지 회식을 해도 아침에 회화 학원에 들렀다 출근을 하는 패턴을 지키려 무던히 노력했다. 그게 나의 가장 확고한 자기 계발 방법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종종 '외국 살다 오셨어요?' 하는 아부성 멘트라도 들을라 치면, 내 10년간 노력이 보상받는 뿌듯함에 달음질로 폴짝 뛰어 집에 가곤 했었다.

그런데 멜버른에 처음 도착해 들은 '바텐딩 클래스'에서 지금까지 만난 원어민 학원강사들과 사업주들이 날 얼마나 배려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난 샷의 종류를 설명하는 강사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강사가 내는 소리의 절반은 귓가에 고이지도 않고 그냥 우물우물 흘러가버렸다.

초조함에 볼펜을 똑딱이며 '리스닝'에 촉각을 세우던 그 순간조차도, 강사가 '누가 볼펜 촉 똑딱이냐'라고 묻는 걸 듣지 못했다. 이럴 수가! 철저한 영어의 배신이었다.

10년간 주말마다 영어시험을 봐왔는데, 영주권을 위한 IELTS(호주, 영국의 영어시험) 점수도 딱 0.5점만큼 모자랐다. 차라리 택도 없었다면 포기라도 빨랐을 텐데. 밀당도 밀당도 그런 고수가 없었다.

멜버른은 옛 건물들과 모던한 요즘 건물들의 조화가 인상적이었다. 공원과 놀이터가 유난히 많았고, 낮은 하늘이 변화무쌍해서 가만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멜버른에 흥에 취해 바비큐를 하고, 공원으로 산책을 다니고, 캠핑을 가면서도 내내 약이 올랐다. 한번 내뱉은 '멜버른을 짝사랑해요'라는 말이 간절해졌고, 점점 영주권 네 놈을 따고야 만다로 생각이 변해갔다.


배낭 하나 들고, '어~디~ 한~번~ 괜찮은 곳인가?' 하면서 간잽이처럼 왔던 나는 어느새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야 말겠다!'라며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이 도시에게 나는 완벽한 '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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