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맨디 Jun 12. 2021

내 집 따윈 필요치 않았다.

80년대에 청춘을 살았던 그 세대의 대게 많은 이들처럼, 우리 엄마 아빠의 꿈은 언제나 내 집 마련이었다.


월세에서 전세로.

방 두 칸짜리 전세에서 다시 거실이 따로 있는 집으로.

그리고 지금의 아파트에 입주할 때까지 엄마 아빠는 정말 마른걸레를 쥐어짜 내는 노력을 하셨다. 이 과정을 단순히 '돈을 아낀다', '열심히 일한다'는 문장으로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내 집 마련>에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가난은 고단했다.

내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계약 만료 기한에 맞춰, 한해 걸러 이사 다녀야만 했다. 공간도 좁았다. 네 식구이다 보니 방이 최소 두 칸이긴 했지만, 이따금 화장실을 다른 집과 공유해서 쓰기도 했다.

뜨거운 물이 안 나오는 집에 살았던 적도 있는데, 덕분에 매일 저녁 아빠는 곰국을 삶는 큰 통에 물을 끓여 옮겨야만 했다.


그때 어린 내가 겪었던 설움들은 그저 짐을 싸기 힘들다던가 내 공간이 더 있었으면 하는 소소한 바람에 가까웠다. 내 책상이 따로 있었다면 공부를 훨씬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저녁마다 신발을 신고 나가 화장실을 가야 하는 일이 조금 무서웠다. 딱 그 정도의 번거로움이었다.

하지만 그때 엄마, 아빠 당신들이 겪어야 했던 설움은 내가 느꼈던 그것과는 결이 달랐음에 분명하다.

밖에서 보면 다 똑같이 생긴 아파트인데, "우리 집"만 아주 멀리서도 찾을 수 있다. 20년째 살고 있는 우리 집이다.

 

아마도 이따금 으스러지듯 자존심을 뭉개어야 했을 테다. 또 가끔은 서러움에 뒤집힌 속을 소주 한잔으로 소독하기도 했겠지. 지금이야 당신들도 기억 못 하는 시들은 추억이겠지만, 고작 지금의 내 나이쯤 되는 청춘의 엄마 아빠에게 '내 집'이라는 건 그 지독한 설움들의 유일한 돌파구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난 그래서 20대 내내 '내 집 마련'이 싫었다.

그 당시에는 꽤나 쿨한 척 '목표가 내 집 마련이라는 게 참 촌스럽다' 정도로 생각했다. 이제와 솔직함을 더해 돌이켜보면 엄마 아빠가 느꼈던 삶의 무게를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솔직히) 먹고 살만 했다.

매달 같은 날 통장으로 꼬박꼬박 입금되는 대기업 연봉에 가끔 쏟아지듯 나오는 보너스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이렇게 까지 챙겨주나' 싶을 만큼 큰돈이었다. 월급의 15%에 채 못 미치는 서울 테두리 바깥에 위치한 작은 원룸 방의 월세는 내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저 그만한 공간으로도 내 몸 하나를 뉘이기에는 충분히 안락했다.

나이가 있는 동기들은 입사와 동시에 가정을 꾸렸다. 그들은 곧 위협적인 억 단위 금액을 대출받아 집을 하나, 둘 장만했지만 그때도  조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 세대에서 사용되던 '내 집 마련'이란 단어를 복기하는 것 같은 구시대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것저것 투자니, 자산관리니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부동산' 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게 꽤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시간들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당시 평당 몇백이니 몇천이니 하던,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동기들의 아파트 매매 금액은 모두 자릿수를 달리했다. 그때 내가 위협적이라고 생각했던 억 단위 대출은 지금 내가 호주에서 집을 사기 위해 내는 대출금액에 비하면 실로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난 빚을 낼 수 있다면 그만큼 능력이 있는 거라는 당연한 진리조차 깨닫지 못했었다.

정말로 난 똥 멍청이 었다.


사실 지금도 별반 크게 다르진 않다.

아마 한 발만 물러서 보면, 애플 주식을 사야 하는 시기에 아이폰 1세대를 사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어리 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