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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디 Aug 27. 2021

아파트 탐색기.

일단 아파트를 사자고 마음먹자, 기왕이면 시내 중심가를 사야지 싶었다. 무엇보다도 아파트는 위치라고 생각했다. 또다시 부동산 사이트의 필터를 요리 바꾸고, 조리 바꾸면서 적당해 보이는 집을 찾았다.


다 사람 사는 집을 고르는 일이라 쉽게 생각했는데, 아파트는 하우스와 눈여겨봐야 하는 포인트들이 완벽하게 달랐다. 아파트에서 기대하는 삶과 하우스에서의 삶은 그 질감이 다른 느낌이다.


예를 들면 더 이상 뒷마당이 있는지, 집이 기울었는지는 보지 않아도 됐다. 최소한 이곳 멜버른에서는 기운 아파트에 거주 허가를 내주지는 않았다. (살면서 기운 건지, 원래 실력 없는 건축 업자가 서툴게 지어 놓은 건지, 하우스는 기울어진 집이 더러 있었다. 한 번은 집을 구경하다가 자꾸만 위화감이 들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마침 옆에 있던 아기 장난감 공을 바닥에 가만히 놓아보았다. 또르르 반대편 벽을 향해 공이 거침없이 굴러갔다.)

멜버른은 문화적,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물들을 유산(heritage)로 정해둔다. 이럴 경우, 건물을 모던화하려고 해도 유산으로 지정된 의미 있는 부분만큼은 건드리지 않는다.

대신, 다른 불편을 미리 확인해야만 했다.

우리나라의 아파트들이 햇볕 잘 받는 방향을 따라 난 일자로 길쭉한 모습의 아파트 단지라면, 멜버른 시내(CBD)의 아파트들은 대부분 네모 반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시내에 큰 땅을 확보하기 어렵다 보니, 아파트 단지는 많지 않다. 대신 층고가 높은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가장 흔한 형태이다. 덕분에 앞뒤로 창을 낼 수 있는 우리나라 아파트와는 달리, 창이나 발코니를 낼 수 있는 벽면이 제한적이다.


하우스가 어지간하면 거실, 주방, 방들 중 하나쯤 해 잘 드는 곳이 있다면, 멜버른 시내의 아파트는 대체로 한쪽 면으로만 창이 나 있다. 해 드는 방향이 중요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끝도 없이 남향집을 찾아다녔는데, 남반구인 호주에서는 북향집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북향으로 가장 살기 좋은 빛이 들었다.


사실 '창을 낼 수 있는 외벽이 한쪽밖에 없다'는 건 훨씬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해드는 시간 같은 건 배부른 걱정이었다.

시내에서 수요가 가장 많은 아파트는 방 한두 칸짜리이다. 가운데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빙 둘러 방 한두 칸짜리 작은 집을 가능한 많이 다닥다닥 붙여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약 60층짜리 건물에 층마다 단 한 채의 집만 더 끼워 넣을 수 있다면? 단순히 계산해도 몇백억 원은 더 벌어들일 수 있다. 당연히 건설사들은 제한된 공간 안에 한 채라도 더 집을 끼워 넣으려 최선을 다했다.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집들을 테트리스를 했다. 그 결과 가장 최적의 집 형태는 외벽으로 노출되는 면이 적은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좁은 외벽으로는 두 개의 방, 그리고 거실을 모두를 노출되게 만들 수가 없었다. 디자인의 한계가 온 것이다.

방들이 무언가 잘못됐다.

결국 북향은커녕, 아예 창문조차 없는 방이 생겨났다.  호주의 건축법상으로 모든 방이 무조건 창문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이 생긴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외벽과 닿지 않는 방들에 과감하게 창을 다 생략해버렸다. 빛 한 자락 스미지 않는 방을 가진 아파트들이 시내에 너무나 많았다.

처음 호주에 도착해 살았던 에어비앤비 집도 그랬다. 그 안에서 잠이 들면 낮인지, 밤인지, 시간이 흐르긴 흐르는 건지. 언제나 부스스하게 낮밤이 뒤섞이기 일쑤였다.

건축법이 시행된 이후로는 다행히 창이 없는 방은 더 이상 짓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억지로 창을 내기 위해 구조가 기괴해졌다. 방 안에 창문만을 위한 길쭉한 복도가 생겼다. 어떻게도 활용할 수 없는 죽은 공간인 경우가 많았다.


엘리베이터 당 이용하는 가구수도 확인해야 했다. 한 아파트는 인스펙션을 위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인스펙션 시간을 넘겼다. 매일 퇴근길마다 이런 기다림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또 멜버른 시내(CBD)의 많은 아파트들은 주차장이 따로 없다. 대부분 시내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는 중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지어진 아파트인지라, 많은 거주자들이 차가 없기 때문이다. 한층에 12 채씩, 60층짜리 아파트에 전체 주차장은 100대도 마련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즉, 거주 세대의 단 20%만이 주차장을 차지할 수 있는 셈이다. 아파트를 산다고 주차장이 당연히 딸려오는 게 아니다 보니, 주차장을 빌리는 값도 만만치가 않다.


택배 받는 방법도 짚고 넘어가야 했다. 우리나라 아파트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외부인이 들어올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각 층마다 카드키를 찍어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택배 기사님들이 집 앞까지 오기가 힘들다 보니, 우편함에 들어가는 사이즈가 아닌 경우 배달받기가 쉽지 않다. 컨시어지(concierge)라고 부르는 관리인이 있는 아파트가 아니면, 일하다가 택배 왔다고 뛰쳐나가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당연히 우리나라처럼 관리비도 얼만지 물어야 했고, 가연성 물질 (Cladding materials이 외벽에 사용되는 게 규제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이 쓰이지는 않았는지 짚고 넘어가야 했다.


경쟁자도 달라졌다. 지금까지가 호주인으로 흔히 여겨지는 백인들을 포함한 인도인, 베트남인, 중국인, 중동인 등 대상을 특정하기 어려운 다국적 사람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면, 시내 아파트는 중국인으로 한정됐다. 그리고 그들은 부동산 시장에서 세 가지 뚜렷한 성향을 들어냈다.


일단, 돈이 많았다. 호주로 유학까지 올 정도의 중국인들은 그들의 부를 숨기지 않았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강아지 옷까지 명품으로 감싼 그들은 현금으로 집을 사기 위해 부동산을 보러 다녔다.

우리는 은행이 집을 사는데, 우리 명의를 빌려주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이 대출이다 보니 끊임없이 은행과 우리의 의사 결정 단계 단계를 상담했고, 조언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는 풍기는 기운 자체가 달랐다. 무서울 게 없었다. 구찌 슬리퍼를 끌고 시내를 어슬렁 거리며 시티 아파트들을 점령했다.


중국인들은 풍수지리 사상을 이곳 호주땅까지 이끌고 들어왔다. 박스힐 (Box hill)이라고 불리는 한 지역은 풍수지리 적으로 '용의 눈'에 해당한다는 풍문이 중국인들 사이를 휩쓸었다. 그곳의 땅값은 놀랍도록 올랐고, 중국인들은 곧 그 지역의 모든 땅을 차지했다. 길을 걷다 보면 누구든 당연하다는 듯이 중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난 아파트 아래쪽에 검은 바탕 위로 그려진 그림이 나비나 꽃이라고 내내 생각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88을 써둔 거다'란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리고 부를 상징하는 숫자 8에 큰 의미를 두었다. 친구가 농담처럼,

"중국인들은 집을 살 때, 8자가 많이 들어간 숫자로 집을 사고 싶어 해. 그래야 그 집을 통해 재력을 쌓는다고 믿어. 그래서 6억 8천8백8십8만 8천 원 같은 금액으로 입찰을 한데." 했었다.

그저 재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말이 우리의 첫 집 구매에 영향을 미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우스만큼이나 아파트도 천차만별이었다. 또다시 정말 많은 집들을 만났다. 집 안에서도 옆집 담배 냄새가 스멀스멀 넘어올 만큼, 허술하게 지어진 집도 있었다. 완벽한 서향으로 난 창으로 온통 늦은 해가 들어 눈이 부신 집도 있었고, 천장이 반쯤 깎여 비스듬하게 마감된 집도 있었다.

부동산 사이트에서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미리 창문 없는 집이나 구조가 이상한 집은 거르고 가도 절반은 허탕 치기 마련이었다.


물론 꽤 괜찮은 집들도 눈에 띄었다. 이만하면 되지, 싶은 집들을 몇 장바구니에 담듯 챙겨뒀다.


시내 (CBD) 아파트들은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경매가 드물었다. 심지어 몇몇 집은 특정 금액을 말하며, 이 금액만 넘는 오퍼(구매의향서)를 내면 집주인이 바로 팔 거라고 부동산에서 눈치를 주기도 했다. 이미 시장에 나온 지 오래되어 시들시들해진 아파트들이었다. 그런 집들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딱 '내 집이구나! 여기가 우리가 살 곳이구나' 하는 느낌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쉽게 살 수 있으니깐, 좀 속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슬슬 타협도 시작됐다.

'그냥 이쯤에서 내 집 마련을 마무리지어도 좋지 않을까' 정도의 미적지근한 온도였다. 크게 흠잡을 게 없는 집들이 었다.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7-8개월쯤 이어지는 집 구경은 진이 빠지게 만들었고, 결국 어디 가도 '대충', '적당히',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을 피워냈다. 지쳐버렸다.


6개월 동안 하우스를 보러 다닌 시간은 희망과 실망이 반복된 거친 파도를 넘는 일 같았다. 매주 꼼꼼히 기대하고 파삭 좌절하는 일을 반복했다. 하지만 아파트를 보러 다닌 시간들은 그 파도가 휩쓸고 간 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느낌이었다. 딱히 부대끼지도 않았지만, 감동도 없는 밍밍한 맛이었다. 대신 볕이 머리 꼭대기로 쏟아져 목 뒤와 손 등이 따끔거렸다. 좀 어디로든 들어갔음 싶어졌다.


그리고 그 미적지근한 온도로 '이쯤에서 첫 집을 사게 되나 보다' 하는 순간, 한 집이 눈에 쏙 들어왔다.

드디어 우리의 첫 집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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