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맨디 Aug 28. 2021

우리가 잘했다.

'집이 주인을 정한다'는 말이 있다.

마치 미리 짜이기라도 한 것처럼 딱딱 맞아떨어져 일이 해결되어 갈 때, 멋없게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좀 더 운명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진다. 가령, '결혼할 상대는 첫눈에 알아본다'처럼 좀 더 우린 특별한 끌림이 있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게 수월했노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


우리의 첫 집도 마치 집이 우리를 주인으로 정한 것처럼, 딱딱 떨어졌다.


시내의 집들을 보러 다니다 보니, 친구들과 약속을 정하기가 쉬워졌다. 그날도 인스펙션과 인스펙션 사이에 한 시간 반 정도 짬이 나는 시간에 친구들과 커피를 한잔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졌다. 집 얘기, 결혼 얘기, 누군가의 학교 얘기, 새로 생긴 여자 친구 얘기. 말을 끊기 아쉬울 정도로 이야기가 이어지길래 남편과 짐짓 눈빛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번 인스펙션은 패스하자.' 일주일에도 대여섯 채씩 보러 다니는 한 채였다. 그냥 비슷해 보였고, 특별히 눈여겨볼 필요가 없는 집이라고 여겨졌다. 그저 수많은 아파트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30분으로 주어진 인스펙션 시간을 10분쯤 남겨뒀을 때, 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장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덩달아 옆에 있던 친구도 그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은 더 걸릴 줄 알았던 대화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남은 인스펙션 시간은 딱 10분. 구글 지도로 검색했을 때 아파트는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가면 간신히 집을 한 바퀴 휘- 돌고 나와야 했다. '갈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걸어서 고작 5분 거리니 들렀다 집에 가자고 결론지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파트는 총 65층짜리 건물에 48층이었다. A4 크기의 큰 터치패드로 된 세련된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여섯 대의 엘리베이터는 밀림 없이 사람을 실어 날랐다. 일단 반짝반짝한 엘리베이터와 로비의 첫인상이 좋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지금은 렌트를 준 상태라 집에 짐이 많다'며 감안하고 봐 달라고 부동산 직원은 바쁘게 설명했다.

과연, 문을 열자마자 쏟아질 것 같은 짐들이 시선을 가렸다. 짐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남편과 나는 잠시 "우와"했다.

일단 방들이 북향을 향해 큼직한 전면 유리창을 가졌다. 시원한 대로가 창밖 뷰로 펼쳐졌고, 가로막는 큰 건물 하나 없이 멜버른 대학교 전경과 공원들이 그대로 내보였다. 크진 않았지만 발코니가 있었고, 하얀색으로 맞춤된 주방과 화장실은 깨끗했다. 지은 지 5년이 채 안됐다고 했다. 솔직히 전망을 보자마자 마음을 뺏겼다.

위치도 마음에 들었다. 관광지로 빼놓지 않고 들르는 퀸 빅토리아 마켓(멜버른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 바로 맞은편에 있었고, 멜버른 센트럴 역에서도 가까웠다. 집 앞으로는 트램(지상철) 정거장이 있었고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한국 마트에서도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이곳에 살게 된다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가까울 것임에 분명해 보였다.


늦게 도착한 만큼 차분하게 집을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대신 오늘의 인스펙션을 모두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부동산 직원이 함께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 집주인은 off the plan(완공 전 분양해서 집을 파는 것)으로 집을 구매했고, 현재 이혼을 위해 자산을 정리하는 중이라고 했다. 마켓에 나온 지 2주도 채 되지 않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팔고 싶어 한다고. 이미 한 팀이 보고 간 그 주에 입찰을 시도했지만, 제시한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아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했다고 한다. 다음 토요일까지만 오퍼(구매의향서)를 받고, 그 안에서 가장 높은 금액으로 그냥 집을 팔 생각이라고 귀띔했다.


함께 내려오며 수영장과 피트니스가 있는 공용시설도 들렀다. 레일이 네 개나 있는 큼직한 수영장과 거품이 퐁퐁 나오는 스파, 건식과 습식으로 준비된 사우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통유리 창으로 된 바베큐장들과 작지만 대부분의 시설이 있는 피트니스 그리고 샤워실은 주말 오후를 꿈꾸게 했다. 부지런히 창밖 풍경을 보며 러닝머신을 뛰고, 이따금 친구들을 불러 바비큐도 해야지. 

홀처럼 꾸며진 큼직한 로비에서는 컨시어지가 부동산 직원과 눈인사를 나눴다. '아! 택배도 여기서 받아주겠네!' 별거 아닐 수도 지만, 우리에겐 중요했던 부분 하나가 해결됐다.


아파트 로비를 통과하며 남편과 나는 동시에 "바로 여기야!"를 외쳤다.


이 아파트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일주일이었다. 부지런히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방법들을 동원해 집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했다.

Section 32라고 부르는 Vendor's statement(구매 전 판매자가 잠재적 구매자들에게 제공하는 법적 서류. Conveyancer라고 불리는 부동산 양도 전문 변호사가 작성하며, 집의 담보 상태, 도면, 판매자의 요구사항들이 담겨있다.)를 받아서 검토받았다. 지금 렌트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도 들었다. 그들은 한 주에 650불(약 55만 원)을 내고 있었고, 8월까지 계약이 되어 있다고 한다. 한 달 월세가 250만 원이 넘는 집이라니! 게다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던 렌트 집의 계약 종료 시점과도 얼추 맞았다. 이사 날짜를 따로 맞출 필요도 없었다.

부동산에 전화해 토요일 전에 한번 더 집을 보자고 했다. 부동산 직원은 흔쾌히 평일 저녁, 한번 더 집 문을 열어주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우리 집 같았다.


'이렇게 속전속결로 집을 사도 되나' 싶어 얼떨떨했다. 하지만 이미 '사야 되나 말아야 하나'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해야 이 집을 살 수 있을까'로 고민이 바뀌어 있었다.


드디어 오퍼(구매의향서)를 작성하는 대망의 토요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최종 금액을 두고 우리는 고민을 거듭했다.

"5억 6천을 냈다가 거절당했다고 하잖아. 그것보다는 당연히 많아야 하는데, 아, 얼마나 더 써야 되지?"

"우리 말고 경쟁자가 둘 더 있다고? 하아, 특히 지난주에 거절당했다는 그 팀이 아주 의욕적이라잖아."

"맞아. 말레이시아 사람들이라고 했지?"

"아, 그 말레이시아 사람들 중국계이면 어떻게 하지? 또 돈 엄~청~ 많은 거 아니야?"

우리나라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부동산 직원을 앞에 두고, 짧지만 강도 높은 토론을 이어갔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오퍼(구매의향서)에 적은 금액은 '598,900 호주달러'.

의욕적인 경쟁자가 혹시 중국계일 경우, '598,888 호주달러' (5억 9천8백8십8만 8천 원)를 써낼지 모른다고 생각해 엄선해 고른 금액이었다. 은행이 안정적으로 구매가 가능할 것이라고 이야기 해준 금액, 6억을 딱 맞췄다.


나오는 걸음이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심장소리가 두근거려서 밖으로 들릴 것만 같았다.

내가 이런 어마어마한 거래에 도전하게 되다니!


결과는 월요일 아침에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날까지 밀폐된 오퍼(구매의향서) 서류를  부동산과 집주인이 나란히 앉아 열어볼 계획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주말 내내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요일 아침.

부동산 직원은 격양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축하해! 너희가 이 집을 사게 되었어!"

부동산 직원은 바쁘게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 진짜 놀라운 얘기를 해줄까? 원래 이건 절대 이야기해주면 안 되는 건데, 나도 부동산에서 일하면서 이런 건 처음 봐서 말이지. 너희 말고 입찰한 말레이시안 커플이 얼마에 오퍼를 넣었는지 알아? 598,000이야. 딱 900불 차이로 너희가 이 집을 사게 됐다고!"


남편과 나는 그 자리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길고 지루하던 내 집 마련의 대장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경쟁자와 딱 0.15%의 가격차이로!

수주 경쟁에서 제일 잘한 건 2등과 아주 간발의 차로 이긴 1등이라던 한 부장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가 잘했다. 그냥 우리가 다 잘한 것 같았다.

그날만큼은 아낌없이 축배를 들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