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생겼다. 전혀 예상을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금방 귀한 생명을 얻게 될 줄도 몰랐다. 시내 아파트로 이사 온 그 달이었다. 한쌍의 불나방처럼 시내를 누비겠다는 계획은 당연히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런 건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에 설레어 적응이 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고작 쌀알만 하게 내 뱃속에 자리를 잡았다는 아이는 정말 엄청난 영향력을 자랑했다.
예를 들면, 더 이상 난 양파를 먹지 못했다. 난 구운 양파를 너무너무 좋아했다. 무슨 요리를 하든 일단 양파부터 잘라 볶고 봤다. 비슷한 내용을 이병률 작가의 산문집에서 봤을 때는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렇게 음식 먹을 줄 아는 분이 또 있다니!' 했다. 파스타를 해도, 떡볶이를 해도, 오징어 볶음을 해도 일단 양파부터 볶았다. 달큼한 향이 주방을 채우면 마음이 푸근해졌다.
하지만 아이가 쌀알 크기에서 콩알 크기로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하는 그 순간부터 출산까지 난 단 한줄기의 양파도 삼키지 못했다. 뱃속에 있을 때, 녀석은 양파를 퍽 싫어했다.
식성, 생활 습관, 인생의 계획까지. 티끌 만한 아이는 부지런히 우리 부부를 좌지우지했다.
원래는 이 새 아파트에 딱 1년만 살고 이사 갈 계획이었다. 내가 눌러 살 수록 손해였다. 입주 전에는 주에 650불씩 하던 렌트비가 주에 730불까지 올랐다. 월세로 2백5십 만원쯤. 렌트(월세)를 줘야 돈을 버는 집이었다. 우리는 첫 집 구매 혜택 (First home buyer라는 이름의 혜택으로 6억 이하 집은 100% 그리고 7억 5천까지는 비율로 stamp duty라는 부동산 매매 세금을 면제해줬다. 참고로 6억짜리 집의 stamp duty는 3천 백만 원이다.)의 조건을 충족하는 1년만 딱 살고 이사 나가자고 말했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자 그 계획 역시 실현이 불가능했다. 그즈음이면 나는 두 달 된 신생아를 품고 있는 시기였기에 이사는 무리였다.
아이는 감사하게도 건강하게 태어났고 잘 자라주었다. 예정일을 11일이나 넘긴 날, 24시간의 진통 끝에 3.77kg으로 태어났다. 까만 머리카락이 수북하게 자라 태어난 우리 딸을 보고 아빠는 '신생아 같지 않다'는 말을 거듭했다.
아이를 보는 일은 어이가 없을 만큼 힘들었다. 아이는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제 나름 살아남기 위해 세상에 적응하는 일이 너무 바빠 날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요 조막만 한 게 다루기 힘들어 주저앉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나의 고달픔과는 상관없이, 아이는 매일매일 빠짐없이 자랐다. 가끔은 한 뼘씩 크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허공을 보고 허우적 대는 게 일상이던 아이는 벌써 쫑알거리며 엄마 품에 달려와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어느새 출산과 신생아 시절의 기억이 흐릿해져, 그 엄청난 고통과 우울감은 어디 먼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저 뽀얗게 덧칠되어 아름다워진 추억만 남았다.
회사 사무실에서 동료들이 Baby shower를 해주었다.
하지만, 그때 박혀버린 시내 아파트에서의 내 삶은 도무지 시간이 지나도 미화되지 않았다.
완벽한 내 집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첫 집'이 숨 막혔다. 아마도 아이가 6개월쯤 자랐을 때부터였다.
아니. 답답함이 폭발한 건 그쯤이었지만, 기폭제에 불씨가 떨어진 건 아이를 낳자마자였다.
아이를 가져서 병원을 다니는 동안 통역사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의학 용어는 지금까지 내가 알던 영어와는 또 다른 언어였기에 도움을 받는 편이 안전했다. 문제는 그때그때 매번 다른 통역사 분들이 오게 되다 보니, 당황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 두 번 정도 '통역사'라는 직업의 전문성이 의심되는 분들이 있었다.
한 번은 대기실에서 의사를 기다리면서, 병원에 함께 온 내 남편의 외모를 나에게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게 '남편 분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하고 귓속말을 했다. 내가 꼬아들은 게 아니라, 불편하게 들릴 꺼란 걸 스스로도 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그때 마침 남편과 의사가 동시에 날 찾았다. '어?' 하느라 뭐라 대꾸할 여유가 없었다.
만삭의 배를 뒤뚱뒤뚱 진료실로 옮기면서 '아니, 이 사람은 나를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걸까?' 싶었다.
"저기요! 내가 저 사람 부인이거든요!"하고 말했어야 했는데.
병원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타이밍에 맞게 화내지 못한 내게 화가 나 부르르 떨렸다. 정색할 타이밍을 놓쳤다. 둔해 터진 나 스스로가 못마땅해 하루 종일 언짢았다.
다른 최악의 경험 한 번은 아이를 낳고 나서였다. 호주 병원은 '미드와이프'라는 출산, 아동 전문 간호사가 있다. 그들은 아이를 낳고 퇴원 후 3일 이내에 산모의 집을 방문해 아이와 아이가 살게 될 집의 상태를 점검한다. 그리고 그날의 통역사 분도 천천히 내 기분을 긁어댔다. 더 정확하게는, 날 좀 초라하게 했다.
시작부터 통역사 분이 간호사의 이야기를 우리나라 말로 바꿀 때, 간호사가 하지 않은 말을 덧붙이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얘가 평균보다 크다던가, 좀 더 잘 감싸 둬야 했는데 안 했다던가. 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적 없는 단어들이 우리말로 바뀌면서 조금씩 덧붙었다. 일일이 따지기도 귀찮아 흘려듣고 있었는데, 결정타는 마지막에 날아왔다.
어느 정도 대화가 마무리되고 간호사와 서로 다음 방문 일정을 이야기할 때, 통역사분이 집을 한 바퀴 눈으로 훑더니 '아니, 집이 이렇게 좁아서 애를 어떻게 키운데요? 답답하게.' 했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출산 후 5일째 극도로 예민하던 나는 왈칵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때까진 집이 좁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난 내내 방 두 칸짜리 집에서도 잘 컸는걸.
하지만 남의 입으로 그런 말을 듣는 건, 없던 사실까지 진실로 만드는 불쾌한 힘이 있다. 미드와이프와 통역사가 떠나 휑해진 집안이 좀 답답하게 줄어든 기분이었다. 그때 이미 꺼질 듯 말듯한 작은 불씨가 내려앉았다.
그 불씨가 불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집이 나를 옥죄는 감옥처럼 느껴진 건, 코로나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호주 산불이었다. 코로나는 오히려 상황이 훨씬 나았다. 마스크만 끼면, 그래도 공원이라도 산책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산불은 잔인한 연기를 온통 내뿜었다.
불길은 시드니에서 멜버른 북동쪽 외곽지역으로. 그리고 점점 내려와 차로 네 시간 거리에 있는 lake enternace란 지역까지 무서운 기세로 내려왔다. 매일 뉴스는 산불의 진로를 추적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곧 그 탄 냄새를 가득 품은 뿌연 연기는 온통 시내를 뒤덮었다. 48층 아파트 창밖은 그저 회색 벽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앞 건물의 형태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문을 닫고 있어도 미세한 탄내가 스며들었다.
그렇게 20평 남짓한 하얀 상자 안에 완벽히 갇혀버렸다. 거기서 난 6개월 난 신생아와 밖으로 산책 나가지 못해 심통이 잔뜩 난 강아지를 품고 하루 종일 남편을 기다렸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집이 이렇게 좁아서 애를 어떻게 키운데요? 답답하게.'
'아니, 집이 이렇게 좁아서 애를 어떻게 키운데요? 답답하게.'
'아니, 집이 이렇게 좁아서 애를 어떻게 키운데요? 답답하게.'
새삼 그날의 통역사의 말이 귓가에 웅웅 들리는 것 같았다. 집은 한없이 좁았고, 난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서는 매캐한 연기가 가득 묻어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노동자의 인권이 그 어느 나라보다 높다고 말하는 호주지만, '실질적으로 일이 없어서(Actual redundant)' 하는 고용 해제는 합법이었다. 운동도 시켜주고, 워라벨은 있는데, 월급도 많이 주는 완벽했던 우리 회사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날 타인으로 만들었다. 출산 휴가 전까지 날 'Korean cousin'이라고 부르며, 생일에 아기의 베이비 샤워까지 챙겨주던 다정한 회사였기에 충격이 더 컸다.
출산 휴가 중이라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한 게 가장 컸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회사는 거듭되는 실주로 직원들을 하나씩 내보내고 있었다.
매캐한 산불 매연으로 가로막힌 회색 창과 온통 흰 벽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다. 굳게 닫힌 현관은 그 어떤 것보다 크고 단단하게 지어진 감옥 문 같았다. 조막만 한 아이와 4kg를 넘지 않는 작은 강아지였지만, 집안을 꽉 채우는 느낌이었다. 이 방, 저 방, 그리고 거실을 아무리 옮겨 다녀도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정확히 같은 장소에서 각자 다른 날 찍은 사진들이다.
산불 연기가 조금 걷히자마자, 아이를 데이케어에 맡기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고작 7개월 된 아이를 맡긴다며 독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투잡으로 번역일을 해왔기에 돈은 오히려 여유로웠다. 문제는 집안에 갇혀 무능하게 느껴지는 나 자신이었다.
전문성 없는 초벌 번역은 매일 기계적으로 한글을 영어로 옮기는 일에 불과했다. 주어진 일을 끝냈을 때도 개운하지 않았다. 대체로 '엔지니어'라는 타이틀만 보고 파일이 넘어왔기에 분야도 들쭉날쭉했다. 하루는 터널 공사 시방서를 번역했다, 다음날은 접착성 소재에 대한 논문을 번역했다. 한 번도 성의 없이 일을 하진 않았지만, 시간에 쫓겨 확인 못한 찜찜한 부분이 늘 몇 군데 있었다. 파일을 보낼 때마다 '아 몰라' 하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게다가 하루 종일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와 강아지만 보는 일과는 벽을 보고 혼자 공을 튀기는 느낌이었다.
외로웠다. 사무치게 외로워 사람이 그리웠다. 무언가 해야만 했다.
다행히 면접 본 회사들에서 긍정적인 피드백이 들려왔다. 심지어 한 군데는 데이케어 시간과 맞지 않아 아이를 데리고 면접에 갔었다. 이야기하는 내내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밀며 아이를 달래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함께 일해보자고 말했다. 호주인들이 얼마나 젊은 엄마와 그 아이에게 관대한지 실감했다. 그렇게 한시름을 놓고 두세 군데 회사에서 최종 계약을 기다렸다. 어디든 가리지 않고일을시작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코로나가 닥쳐왔다. 중국을 시작으로 우리나라까지 차례차례 긴장감을 돌게 만들더니, 이내 호주땅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남반구에 겨울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패닉 한 사람들을 슈퍼에 모든 생필품들을 챙기기 바빴고, 겁먹어 제 집에 들어간 소라게처럼 집에 잔뜩 움츠렸다.
모든 산업이 하루아침에 중단됐다.
지금까지 200일이 넘게 락다운(lock down. 사회적 거리두기)을 해서 '락 토리아'라는 별명이 생긴 멜버른, 빅토리아는 코로나가 퍼지는 걸 막기 위해 매번 초 강수를 뒀다. 모든 레스토랑의 문을 닫게 했고, 백화점, 옷가게, 가구점. 어느 곳 하나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했다. 다 닫아버렸다.
덕분에 나의 취직을 논의하던 메니져들도 연락이 뚝 끊겼다. '미안하다. 지금은 있는 사람도 내보내는 중이라 채용할 수 없다'는 답변도 돌아왔다. 다시 한번 난 48층에 허용된 20평 남짓한 공간에 갇혀버렸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집에서 아이를 보거나, 아이를 재우고 쥐 죽은 듯 조용한 집에서 모니터를 보며 그때그때 주어진 활자를 번역할 뿐이었다.
한번 감옥처럼 느껴진 공간에 외력으로 억눌려 있는 건 위협적인 일이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한 집에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밀린 번역 파일을 꾸역꾸역 열었다.
그럴 때면 팔 밑 언저리나, 의자와 맞닿아 있는 허벅지부터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