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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디 Sep 06. 2021

혹시 집 팔 생각 없니?

결과적으로 다시 일을 시작한 건, 아이가 18개월이 되었을 때다. 작은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하기로 했다. 물론 영화 속 82년에 태어난 지영 씨처럼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짜잔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진 않았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분명 늪 같은 침식에서 간신히 발을 뺏다는 걸 부인할 수가 없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몇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우선 아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면접을 보러 다닐 때 처음 2주 정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었지만,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아이를 다시 집으로 들였다. 필수 노동자(Essential worker)들만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다고 했다. 덕분에 집에서 일하게 된 남편까지 3인 1견 가족 모두가 똘똘 뭉쳐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아까운 데이케어 비만 꼬박꼬박 상납했다.

좁고 답답한 집안에서도 아이는 차곡차곡 커나가고 있었다. 그동안의 내 시간은 어릴 적 만화 속 '시간과 정신의 방'처럼 둔하고 뭉뚝했었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버려둔 작은 자투리 시간까지 모아 모아, 매일 조금씩 성장의 발판으로 삼고 있었다. 일을 시작할 무렵 아이는 제법 똑똑하게 문장을 말하기 시작했다.


"얘들 크는 거에 비하면, 어른 늙는 건 느려. 느려." 증손주들을 볼 때마다 하시는 할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다시 데이케어로 돌아간 아이는 2-3주 만에 친구를 만들었다. 그것도 엄청 많이 만들었다. 테싸, 스텔라, 하퍼, 마일즈, 벤지! 아직 어눌한 발음으로 아이는 소중한 듯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웠다. 그리고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배운 데로 "아이 돈 라- 이- 킷. 노땡큐"로 정중하게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너무 귀여워!


난 운전을 시작했다. 무려 처음 2005년 면허를 따고 16년 만의 일이었다.


회사는 크고 작은 회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산업 단지에 있었다. 집에서 회사까지의 거리가 꽤 멀었고, 대중교통이라고는 시간이 불규칙한 버스뿐이었다. 그래도 시내에서 출발하는 지라 출근은 어느 정도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문제는 퇴근길이었다. 버스는 늘 구글맵이 알려준 것과 다른 때 도착했다. 감에 맡기는 게 오히려 정확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정류장에 가만히 서 오지 않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릴 때면, 엄마가 아침에 벗어두고 온 잠옷을 움켜쥐고 '엄마 찾으러 간다'며 현관에서 우는 아이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이 쫀득해졌다.


당장 운전 연수를 받았다. 선생님은 다섯 번, 총 10시간의 연수를 추천했지만, 우기고 또 우겨 6번 연수를 받았다. 1분에 천 원 꼴로 치이는 비싼 연수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더듬더듬 혼자 도로로 나섰다.


호주는 초보운전의 개념이 없다. 처음 운전을 배우는 'Learner (연습생)' 면허증으로 1년,  빨간색 'Provisional driver (임시 운전자)'로 또 1년, 그리고 초록색 'Provisional driver'로 3년을 운전해야 한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시험을 쳐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타고난 드라이버라 단박에 모든 시험을 합격한다 쳐도 최소 5년은 운전을 해야, 제약 없이 운전할 자격이 주어지는 셈이다. 호주는 안전과 관련된 문제는 늘 이렇게 깐깐하고 꼬장꼬장하게 구는 편이다.

단, 허점이 있다면 바로 해외에서 온 운전자들이다. 나라마다 워낙 면허 취득 절차가 달라, 조건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허점을 파고들었고, 장롱면허로 16년을 푹푹 묵힌 내 면허증에도 제약 없이 운전할 수 있는 면허증(full license)이 곧바로 부여됐다.

L plate- 혼자 운전 불가능, 연수해줄 사람이 동승해야만 함 / Red P plate- 뒷좌석에 사람을 태울 수 없음. 사실상 내 운전 실력은 도로로 나서는 것조차 불법이다

도로로 나서면서 차 뒤에는 '초보운전' 대신 큼직하게 'Sorry, I just arrived from oversea (미안해. 나 해외에서 방금 왔어)'라고 써붙였다. 조금 우스운 관경에 이따금 내 차 뒤통수를 사진 찍어 가는 운전자들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부끄러울 틈이 없었다. 그 정도는 해야, 뒤차가 나를 좀 조심해 줄 것 같았다.


이여사의 출근길은 늘 스릴 넘쳤다. 버스 시간 하나도 제대로 못 맞추는 주제에 구글맵은 내게 매일 새로운 도전을 요구했다. 맹수들이 들끓는 고속도로를 뚫어야 했고, 우회전 뒤 바로 좌회전을 해야 하는 고난도 스킬을 필요로 했다. 매일 아침, 출근한 것만으로도 이미 보람찼다.


그리고 또 마침내 우리 가족은 다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대출을 받을 수 있다. 빚을 낼 수 있다!

전세 자금 대출이 무서워 월세를 살던 팔푼이 내가 대출받을 수 있다고 좋아하는 날이 왔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확실히 빚을 질 수 있다는 건 능력이 있다는 반증이었다. 아이와 나까지 부양가족으로 얹혀, 남편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우리는 은행의 기준에도 퍽 무능한 편이었다. 하지만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드디어 시내 아파트에서 벗어나 다음 집을 노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캬아! 서늘하고 눅눅한 공기 사이사이로 곰팡이가 끼는 것 같았는데, 마침내 좀 시원한 바람이 들었다.


그 사이 호주 정부는 코로나에 대한 대응 수위를 차츰 높여갔다.


처음엔 모든 레스토랑과 상점들을 닫았다. 그리고 다섯 가지 예외 사항 (재택근무로 전환이 불가능한 업무, 병원 방문, 생필품 쇼핑, 다른 이를 돌보기 위한 외출, 하루 2시간의 운동)을 제외하고는 집 밖을 벗어나는 걸 모두 금지했다.

그래도 확진자가 늘어나자 이번엔 집에서부터 5km를 정해 이 거리를 벗어나도 벌금형이라는 조건을 추가시켰다. 놀이터마다 폴리스 라인 같은 접근 금지 띠를 둘렀고, 통금도 만들었다. 밤 9시가 지나면 허가 없이는 그 어떤 목적으로도 집 밖을 나가서는 안된다. 이를 어기면 수백만 원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언제나 사람으로 북적이던 쇼핑몰들이 텅 비어버렸다. 

국경도 굳게 닫혔다. 의료업에 종사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거의 모든 비자 발행이 멈췄다.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은 데다가, 대부분의 회사들도 업무를 재택근무로 바꾸면서 시내는 말 그대로 텅 비어버렸다. 거리를 가득 메우던 중국인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제야 은행이 시내 아파트를 '고위험군'으로 분류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파트에 빈집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시내에 몰려있는 University of Melbourne, RMIT, Monash 등 큰 대학이 모든 수업을 온라인으로 대체하면서, 더 이상 유학생을 주된 타깃으로 하는 시내 아파트들은 찾는 이가 없었다.

부동산 사이트에 렌트를 검색하면 우리 아파트에서만 100채가 넘는 빈집이 검색되어 나왔다. 주에 730불까지 가던 월세는 주에 380불까지 떨어졌다.


드디어 다음 집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길이 막혀 버렸다. 이번엔 아파트가 걸림돌이었다. 대출을 계산하는 사이트에 예상되는 아파트 렌트 수입을 주에 380불로 고쳐 넣으면 대출 가능 금액이 파삭 줄었다. 다음 집 예산은 기껏해야 4억에서 5억 사이였다.


산불에 코로나를 연달아 겪으면서, 우리는 아파트에 신물이 난 상태였다. 마스크 없이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는 '우리 집 앞마당'이 너무나 간절했다. 하지만 지금의 예산으로는 아주 조막만 한 마당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파트를 팔아야 하나?


결정이 쉽지 않았다. 일단 매매 자체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어지간히 괜찮은 값이 아니고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선택지가 더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파트 월세가 폭락한 상황에서는 1. 이 아파트에서 버티면서 코로나 상황이 극적인 반전을 맞이해 국경이 열리길 기대하거나, 2. 아파트를 정리하는 것 이 두 가지밖에 답이 없었다.

단지 조금 더 불편한 마음을 지워내기 위해 '만약'을 넣어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만약 우리가 아파트를 사지 않고 있었다면? 아마 곧바로 아이가 생겼고 내가 실직한 걸 생각해보면, 다른 집을 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내 렌트를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아파트를 산 게 적어도 몇천만 원은 더 아낀 셈이다. 그래. 썩 나쁜 선택만은 아니었다. 후회하지 말고 일단 집을 팔자.


결론은 나왔다. 아파트를 팔기로 했다. 


치사하게 그제야 아파트에서 좋았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꽃으로 꾸며둔 베란다에서 야경을 보며 와인을 한잔 하던 일. 만삭일 때 배가 무거워 매일같이 수영장으로 달려가 물에 배를 띄어두고 쉬던 일. 우리 강아지를 예뻐하던 앞집 아가씨가 비슷한 강아지를 들여서 함께 산책 다니던 일. 

구름 떼가 몰려오거나 무지개가 뜨거나, 시시각각 색이 바꾸는 노을, 그리고 시리게  파란 하늘을 매일같이 관찰했었다. 굳이 애써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매일 눈앞에 장관이 펼쳐졌다. 

해가 바뀌는 12월 31일 자정에는 아파트 창문 너머로 도시 곳곳에 쏘아 올려지는 불꽃놀이를 내려다봤었다. TV에 나올법한 화려한 불꽃은 아니었지만, 아담한 불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퍼지는 모습은 은은한 일렁거림이었다. 아이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제였고, 잔잔한 파도 같은 감동이었다. 

굳이 그런 조각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우리의 첫 집이었다. 이삿짐을 들여놓던 날, 페이스북에 나만 볼 수 있는 글로 '첫 집의 감동을 잊지 말자'라고 썼었다. 집안 곳곳에 애정 어린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게 이번엔 아직 팔겠다고 내놓지도 않은 아파트에 미련이 남아 괜히 미적거렸다. 매일 딴청을 피우다가 '내일은 꼭 부동산에 연락해 집을 내놓자'라고 말하며 잠드는 일을 며칠이나 반복했다.


그때 한 부동산 업체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혹시 너희 집 팔 생각 없니?" 했다.


대충 정리하자면 이랬다. 아래층에 우리 아파트와 똑같은 구조의 집을 이미 보고 간 노부부가 아들에게 내 줄 아파트로 그 집을 썩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다만 조금 더 전망이 좋은 위층을 찾고 있어서 층마다 같은 구조를 가진 집들에 전화를 돌리는 중이었다고.


우리에겐 좋은 조건이었다. 일단 구매자가 정해진 상태에서 파는 것이기에 광고비를 아낄 수 있었다. 부동산 입장에서는 집을 팔 마음이 없다고 생각되는 우리를 꾀어내기 위해 꽤 매력적인 금액을 제시했다. 렌트 가격이 급락하면서 아파트 매매 가격도 떨어지는 추세였기에 더 알아볼 것도, 고민할 것도 없었다. 단박에 "Yes!"를 외쳤다.


그렇게 우리의 첫 집을 순식간에 팔아버렸다.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한 지, 두어 달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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