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맨디 Aug 31. 2021

완벽한 선택이었다.

구매가 확정되면 계약에 따라 30일, 60일, 혹은 90일 정도의 시간 후 소유권이 넘어온다. 신축 아파트는 대체로 건설사가 owners corporation란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기 때문에 확인해야 하는 부분들이 적은 편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30일 만에 소유권 이전(settlement)이 완료된다.

대출받을 은행에 요청받은 자료들을 보내고, 부동산 양도 전문 변호사 (Conveyancer)를 정해서 우리 집 정보를 넘겼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집을 샀다. 내 집을 마련했다. 또다시 한바탕 요란을 떨며, 크나큰 한 고비를 넘겼다.

그러고 나니, 새삼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그들의 첫 집을 사던 때가 떠올랐다.


내 초등학교 3학년 일기장에는 '아파트에 당첨됐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아파트 분양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건지, 아니면 분양권 추첨에서 몇 번이나 떨어지고 나서 얻게 된 분양권이어서 내겐 당첨에 더 가까운 의미였던 건지 모르겠다. '너무너무 좋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는 내용으로 가득 찬 일기 끝에 쓰여있던 '축하해. 무슨 좋을 꿈이라도 꾼 거니?' 하는 다정한 선생님의 코멘트도 적혀 있었다.  


우리 가족은 가난했지만, 추억까지 가난하지는 않았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이후로 가족들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평면도에 요리조리 가구를 배치했다.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다. 그래도 잠은 언니와 함께 잘 예정이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완벽한 내 공간이 생길 예정이다. 나뿐만 아니라, 새로 살게 될 '우리 집'에서의 삶을 상상하느라 가족 모두 두둥실 들뜬 분위기였다. 가구를 배치한 평면도에는 거실 한편에 둘 노래방 기계의 위치까지 꼼꼼하게 메모되어 있었다.

터파기가 시작되고 기초 공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부터는 시간이 나는 주말마다 한 번씩 공사 중인 아파트를 찾았다. 주변 동네 탐방부터, 경비실이 들어올 자리, 상가가 들어올 자리 곳곳을 손대중으로 그려봤다. 그리고 한층 한층 골격이 올라갈 때마다 바닥에서부터 손가락으로 층수를 헤아려 우리 집의 위치를 허공에 짐작하곤 했다. 우리 집은 17층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즈음 영남지역 중견 건설사들의 줄도산이 시작됐고, 우리 아파트도 그 불운을 피해 가지 못했다. 8층에서 10층 정도 바쁘게 올라가던 우리 아파트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멈춰 섰다. 우리 집인 17층까지는 한참 못 미치는 높이였다.

엄마 아빠는 교대로 '데모'라는 걸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데모에 다녀온 엄마 아빠가 태연하게 '입주도 전에 이웃들과 친해졌다.'라고 너스레를 떨어 감히 그 무게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마른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평생의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여름날 땡볕에 엄마는 탈수로 쓰러진 적도 있다고 했다. 중도금 한 번도 밀려 낸 적 없는 착실한 그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시간이었다.


엄마 아빠는 언니와 나에게 그 힘듦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의 추억은 가난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삶의 고됨을 그들은 오롯이 속으로만 삼켜야 했다. 그때의 엄마와 이미 비슷한 나이가 되어가지만, 지금의 내가 과연 그렇게 어른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초등학교 3학년 때 분양받은 아파트는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입주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바뀐 건설사가 한번 더 도산하면서, 우리 아파트의 이름은 세 번이나 바뀌었다. 마침내 다 지어진 새 아파트로 이사하기 위해 우리 가족은 마지막 이삿짐을 쌌다. 마지막 이사. 그리고 입주민의 절반 정도는 이사를 마쳤고 절반 정도는 비어있던 반짝반짝한 새 아파트. 그 막 지어진 아파트로 이사를 했던 겨울은 내게 너무나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내 기억 속 우리 아파트는 언제나 신축이었다. 벌써 지은 지 20년쯤 지난 아파트라는 걸, 작년에 엄마 집 주방 가구를 바꾸면서야 처음으로 인지했다. 코로나로 '우리 집'에 못 간 지 2년이나 되었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그 공간을 따뜻하게 품고 계신다.


그들의 노력에 비하면 나의 '내 집 마련'은 식은 죽 먹기였다. 짜릿한 한판 승이 끝나자, 준비된 것처럼 전문가들이 한 부분씩을 떼어 갔다. 부동산, 은행, 변호사가 일상처럼 각자의 몫을 했다. 내가 할 일은 딱 한번 은행에 찾아가 우리의 소비 패턴을 수치로 정리한 일과 메일로 요청받는 파일들을 간간히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세상이 정말 편해졌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파장이 컸던 것은 은행이 시내(CBD) 아파트의 가치를 매매되는 시세보다 한참 낮게 예측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시내 아파트들을 고위험군 자산으로 분리했다. 똑같은 구조의 다른 층 아파트들이 모두 6억 2천을 넘겨서 매매되는 걸보며, 우리는 정말 싸게 잘 샀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은행은 우리 아파트의 가치를 5억 중반으로 책정했다. 당장 대출이 천만 원 정도 덜 나와서 한 달 만에 현금을 빌리느라 애를 먹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다.

'건물주님'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편하다고 여겨지는 임대인의 비애도 처음 알게 됐다. 소유권이 넘어오고 다섯 달 정도 기존의 렌트 계약을 유지했는데, 커미션을 렌트비의 6%나 받는 부동산은 매번 일을 야무지게 마무리하지 못했다. 월세를 두어 번 밀려서 걱정, 렌트를 마무리하면서 부서진 벽을 고치는 과정에서 걱정, 이사청소를 하지 않아서 걱정. 심지어 부동산에서 추천해준 페인트 업자는 이사 가는 날 당일까지도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결국 페인트 작업을 하는 벽을 피해 집 중앙으로만 이삿짐들을 쌓아야만 했다.

우리 아파트도 시내의 대부분의 아파트들처럼 주차장이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총 여덟 개 층으로 구성된 주차장은 빈부 격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접근이 쉬운 아래층이 주에 90불로 시작해 층을 올라갈 대마다 5불씩 주차장 대여비가 싸졌다. 우리는 적당한 선에서 주에 50 불하는 주차장을 빌렸는데, 덕분에 차를 주차하기 위해서는 12번의 코너링이 필요했다. 주에 4만 원, 월에 16만 원을 아끼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귀찮음을 필요로 했다.

페이스북에 나만 볼 수 있는 글로 '첫집의 감동을 잊지말자'고 써두었엇다. 

그래도 입주한 아파트는 기대만큼 좋았다.

우리 둘,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가 살기에는 20평대 아파트는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둘 다 회사로 출근을 하던 시기라서, 컴퓨터를 둔 방 한 군데는 자주 들어갈 일도 없었다.

주말마다 퀸 빅토리아 마켓에 나가 유명한 마켓 레인 커피를 마셨고, 걸어서 10분 이내에 큼직한 공원이 둘이나 있어 산책하기 좋았다. 백화점들이 모여있는 번화가까지도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였고, 박물관, 공연장, 바, 브런치 맛집 무엇하나 멀리 있는 게 없었다.


정말이지, 완벽한 선택이었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전 09화 우리가 잘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