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김정 Oct 11. 2024

저를 제발 미워해주세요



신기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95% 실화입니다.(나머지 5%는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난 다른 사람의 운명을 봐준 적이 있다.

미래를 예측했다는 거다. 그것도 백명도 훨씬 넘는 사람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 사실이다.


더 중요한 건.

그 백명이 넘는 모두가 내 말이면 철썩같이 믿었다.

사이비 종교 하나 만들어도 될 뻔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군 입대 한달 전, 나는 외삼촌 집에 놀러갔다가 하드 커버에 구백 페이지도 넘는 두껍고 기이한 책을 만나게 된다.     


제목은 가정 종합 대백과.

부제는 ‘뭐든 물어보세요.’     


심심하던 차에 그 책을 팔랑팔랑 넘겨보다가 우연히 운명편, 손금과 관상을 만나게 되었다.

“이런 것도 있네.” 하며.

처음엔 신기해하다가 내용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 어느 시점에선 책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군에 입대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말이다.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 배치후 서너달 지났나, 내무반에서 김상병이라는 고참에게 손금을 봐준 적이 있다.

하도 여자를 소개시켜달라며 집요하게 달라붙길래 대체용으로 봐준 거다.     


전문성은 일도 없었다. 당연하겠죠.

외삼촌 집에서 본 가정종합대백과 운명편 561쪽부터 593쪽의 절반을, 그것도 언뜻 본 걸 기억해내어 몇마디 해준 거다.


듣는 사람도 미심쩍으니까, “이거 진짜 맞는 거지? 그런 거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 몇 번씩 되묻기도 하고, 나중엔 날 사기꾼 보듯 했다.

그러자니 내 쪽에서도 기분이 상했다.

일 것 봐줬더니, 이 양반이.     


“맞다니까요. 먼 당숙 할아버지의 유품중 저명한 수상학, 관상학 저서가 있는데, 어린 시절에 만화책같은 건 일절 보지않고, 그 저서를 탐독했다니까요.”     


뻥이다. 어린 시절 나는 만화책을 천권도 넘게 봤다.

학교 파하면 방바닥에 뒹굴며 보고, 어린 동생 돌보라면 이게 기회다 하고 보고, 밥상머리에서 보다가 뒈지게 맞고, 등하교에 만화책 보면서 걸어가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도 보았다.     


어쨌든 만화책 쪽은 그렇다고 하고.

그런데 얼마뒤였다.     


일파만파가 되었다.

내 소문이 내무반에 좌악 퍼졌던 거다.

그 김상병이 “쟤가 손금, 관상을 보는데 정말 기가 막히다니까요.” 라고 신나게 말하고 다녔던 거다.

믿지도 않더니, 겉과 속이 달랐고, 빅마우스였다.     


그러던 어느날이다.

“이김정 일병, 잠깐만 볼까.”

한 사내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서슬이 퍼런 내무반 군기병장이었다. 사회에서 어린 시절부터 줄곧 권투를 하셨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쫄려 죽는다는 표현을 써도 되는 분이다.     

“니가 그렇게 손금하고 관상을 잘 본다며.”


목소리를 까셨다.

우드득 하고 이 갈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요컨대 뭐댔다.

이제부터 말 잘해야 한다.     


“아, 아닙니다. 잘 못봅니다.”

이런 건 애시당초 꼬리를 잘라야 한다.

‘김상병님은 왜 떠벌려가지고서리.’   

  

한동안 매의 눈으로 나를 꼬나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김상병에게 뻥을 친 거네.”


헉, 얘기가 그렇게 되나.

그럼 나는 고참에게 뻥친, 죄질이 극악인 쫄병이 되는 거고.     

숨이 턱 막혀왔다.


그런데.

돌연 그는 권투로 다져진 주먹으로 내 가슴을 톡톡 쳤다.

가볍게 친 것 같은데.

내 몸이 휘청휘청.


“컥컥, 아닙니다. 컥, 컥.”

“아니라고. 뭐가 아닌데.”

주먹이 멈췄다. 간신히 살았다.     


“뻥이 아닙니다.”

“그럼, 내꺼 볼 수 있겠네.”

내 꺼라면.

그의 입가에 묘한 실소가 퍼졌다.   

  

“병장님꺼 말씀입니까.”

“그래. 내꺼. 만약 말이다. 내꺼 못보면, 어떻게 될까.”

“......?”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요.    

 

“처음엔 못본다고 했다가, 그 다음엔 뻥이 아니라고 했다가, 알고보니 고참한테 사기나 치는 새끼였던 거지. 그것도 자대배치 받은지 채 삼개월도 안된 놈이. 간땡이가 부어도 유분수지. 그렇게 되면, 여기서 니 발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

물론, 걸어나갈 수는 없겠죠.


“고참 희롱죄로 뒈지는 거지.”     


꺼억.      


설상가상.

사면초가.

뒷산에서 내려온 굶주린 호랑이에게 방금 나는 물린 거다.     


허나.

옛말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에잇! 그래, 해보지, 뭐. 까짓것.

당신은 호상이요 하고, 덕담 몇마디 하면 되는 거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호홉!”

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할 수 있다.

“준비됐냐.”

“넵!”

“그럼 좋아, 우선, 내 과거부터 함 말해봐라. 손금이나 관상에 그런 것도 다 나오는 거잖아. 안그래. 못맞추면 알지. 뒈지는 거야. 흐흐흐.”     


허걱.

망연자실.

생각지도 못한 전개다.     


과거라니.

내가 당신의 과거를 어떻게 아냐고요.

행복주민센터 주민등록초본 발급 주무관도 아닌데.     


그때 내가 처한 절체절명의 현실.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지만, 그땐 서슬 퍼런 추상같은 군기병장 앞이었다.     

나는 손발을 덜덜 떨어가며, 가정종합대백과 운명편, 561쪽부터 593쪽의 절반도 보지 못한 기억을 쥐어짜내야만 했다. 혹시 과거를 볼 수 있는 내용이 있었던지 하고.

그게 어디 있었더라.


그의 곰 발바닥 같은 손을 폈다.

덜덜덜 하고.

“춥냐. 지금 겨울이야. 왜 이리 떨어!”    

 

코 앞에선 불호령에, 일이 이렇게 되니, 책 내용이고 뭐고 도무지 생각이 안난다.

이럴줄 알았으면 정독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과거를 보는 법이 필시 있었을텐데.     


그래도, 정신만 차리자.

다른 건 모르겠다.

보이는 대로만 말하자고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병장님.”

“응, 그래. 어디 읊조려봐.”


“병장님은 많은 형제 중에 유독 외로우셨습니다.”

“오호. 그래. 재밌는데.”     

“병장님의 그런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마음 고생이 참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몸이 너무 유약해서 힘들었겠군요.”     


(여기까지, 갑자기 제 말이 무슨 말인가 하실텐데요, 방금 위의 점괘를 쉽게 해석한다면 이렇습니다 : 그 당시 세대의 왠만한 사람들은 형제가 많았다. 형제가 많으면 의외로 외로운 법이다. 형제가 없어도 외롭고. 고로 사람은 외롭다. 뭔소리냐고? 나도 모른다, 절체절명이니까, 묻지마라. 그리고 권투를 했다는 건 반대로 몸이 유약해서 그런 거고.)     


“병장님 집은 그리 유복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근데, 가세가 기울어지셨군요. 아이고야.”


(점괘 해석 : 먹고 살기 바쁜 시절, 어느 부모가 권투 도장에 나가라고 돈을 줬겠나. 먹고살만 했겠지. 근데 입대전까지 복싱을 계속 하셨다라. 뭔가 나름의 고충이 있는 거지. 그게 가세 라고 하는 거고. 집은 멀쩡한데 라고 하면, 당신의 심상 속 가세라고 하면 되는 거고.)     


“거기다 병장님 바깥엔 적이 많았습니다. 군대를 제대하면 그 적이 기다릴 거고요. 앞으로 몸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도 어딘가 아프신 곳이 계시죠. 몸을 잘 관리하셔야 합니다.”


(점괘 해석 : 권투를 했으니 처싸운 놈이 많아서 적이 많을 거고. 연습이나 시합으로 어디 한군데 아픈데 없다면 거짓말이다. 몸 관리 잘 하라는 말은 감성적 덕담이고.)     


이건 말 그대로 손금도 아니고 관상도 아니다. 그냥 통밥을 던진 거다.


전문 용어로 뻥이고.     


그런데 상황이 요상하게 흘렀다. 대충 듣고난,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상기되는 거다.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걸까.


아니나 다를까. 그는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았다.

아무래도 큰일난 것 같다.     


“너 이 자식.”

“으헉. 죄, 죄송합니다. 병장님. 제가 그만 주제도 모르고.”

그는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넌 대체 누구냐. 날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     


알긴 뭘 알아. 넘겨짚은 거지.      


그 다음부터는 뭐, 요샛말로 오토로, AI 로봇 알고리즘으로 돌아갔다.

생명선이 어떠니, 재물선이 어떠니, 인중이 어떠니 하고.     


그 다음은 물이 흐르는대로 흘렀다.

대대 인력 대부분이 나를 찾아왔다.

“관상가님. 저좀 한번” 하고.


범위를 넓혀서 작업장의 하사관들도 봐주고, 중사 형, 상사 아저씨, 준위 할아범, 군무원 일동 여러분들.

부대식당 배식 담당 형님은 빼놓을 수 없고(계란 후라이 하나 더 받으려고).

맛난 사식 먹으려고 부대 월담좀 하려는데, 경비병 오빠도 봐주고, 경비병이 델꼬 있는 군대 강아지도 봐주었다.(이건 농담)

아무튼 추산해보면 백명은 훨씬 넘을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운명을 봐준다는 것만 놓고보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한두명이 힘들었지, 몇 명 보다보면 명성이 쌓여서 처음의 미심쩍음은 없어진다.

내 쪽에서도 데이터가 쌓여서 기본 툴이 생기고.

책에 나온 거 몇 개 풀고, 그들의 고민 들어주고, 찬찬히 덕담해주는 식이다.


그러면 그들 모두는 내가 하는 말이면 철썩같이 믿었다.

혹여 사이비 종교가 태동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나만 보면 싱글벙글하고 전에 없이 좋아하는 척을 하고, 절대 맹신들을 하시니, 정말 교주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근데 이게 그분들은 모르지만, 반대되는 내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민망하고 어색했.

불필요한 겉옷을 한겹 더 입고있는 것 같은 거다.

거기다 난 점점 뭔가 불안감같은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뭔 말만 해도 모두 단합이라도 한 것처럼 "믿습니다!! 싱글 벙글" 하는데, 물론 제가 좌초한 부분도 있지만,

만약 이분들이 갑자기 돌변한다면 어떨까요.

어느날 모두 돌변해서 나를 한꺼번에 미워하게 된다면.


아찔한 공포감이 들었.


연인으로치면, 여자의 하나부터 백까지 다 좋댄다.

여자의 코딱지도 좋댄다. 방구 냄새도 향긋하고, 트림 소린 클래식이고.

여자 입장에선.

"지금은 다 좋아도, 이 자식 나중에 돌변해서 배신 크게 때리는 거 아닐까"

갑자기 불안해지는 정서와 비슷하달까.

이해되시나요?

이게 저에 한정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그러니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서는 안되는구나 했다.

말해놓고보니 이상한데, 그렇다.


사람은 가끔은 미움도 받아야 하고, 가끔은 불신도 받으며 살아야, 사는 게 사는 것 같지않을까 그때 깨달았다.


그게 연인이라면, 정상적인 연인 아닐까요.

너무 100% 좋아한다고만 해서야, 어째.

제가 좀 유별나죠.


여튼 찬양만 받는 사이비 교주가 될 재간은 내겐 없다는 거다.

난 평범하고, 특별하지도 않고, 특별하기는 커녕 오히려 꼬질꼬질하고, 막돼먹은 인간이고, 발냄새도 많이 나고, 비듬도 많은 인간. 

그만 하겠습니다. 더 나가다간...에고.


그래서  외쳤다.


"저를 제발 미워해 주세요. 저를 믿지말아 주세요. 아주 쪼금만."


이래도 옆을 지나가는 내무반 사람들이 싱글벙글 쳐다본다.

"아이고, 관상가 나리."

으, 미치겠네.


참 아이러니한 얘기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말년 병장이 나를 구제해주었다.     

어느날 나와 김상병 둘을 부르더니 따끔하게 훈계했다.


“이김정 일병. 그만 뻥쳐라. 군대에 왔으면, 니 할 일이나 잘 하고 가면 돼. 학생은 공부, 가장은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오고, 군인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거고. 알겠나.”

“넵!”

“김상병. 너는 앞으로 이김정 일병 부르는 놈은 내가 가만 안둔다고 소문 퍼뜨려라.”

“넵. 걱정마십시오. 제가 겉과 속이 다른 빅마우스, 앗, 아닙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그 일은 마무리되었다.        

휴우.   




(여기서 그냥 끝내면 서운하니까요,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요.)     


그 당시 이런 일도 있었다.     

소령, 중령 하는 영관급 높으신 분들이 나를 부른 적도 있다.


“사병중에 관상을 잘 보는 놈이 있다던데.” 하고.

내 최고 상사인 준위 할아범을 들볶아서 불렀다.     


가봤더니, 높으신 분들이 다과를 놓고 담소를 나누던 참이었다.


내가 머리를 조아리고 앉으니.     


“이봐, 니가 그렇게 용하다며. 내가 다음달에 계룡본부로 가는데,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이보쇼. 국가에서 명령을 했는데 따르면 되는 거지, 가타부타 뭔 말이 많으세요.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요.”

라고 말하면 난 바로 영창을 가겠죠.     


해서.

“예이~, 상관에 닭의 형상이 있고서리, 하관에 물 수자가 흐르노니, 별 탈 없이 궁합이 맞겠습니다요. 저절로 나오는 언변이 감개무량입니다.”

전설의 관상가 흉내좀 냈는데, 살짝 내시 같은가요.     


“그런가 허허허. 이햐. 계룡으로 가야겠구먼.”

어차피 갈 거면서.


“박중령. 용한 관상가가 말한 거니, 자네가 가면 꼭 영전할 걸세. 박수.”

“짝, 짝, 짝.”     


미친.         

 



(후일담이겠죠, 아마도)     


남녀 커플이 중고서점에서 어느 책에 눈을 떼지 못한다.


“오빠. 저 책 안살래. 가정 종합 대백과.”

“그래? 부제가 뭐든 물어보세요 라... 재밌겠는 걸. 사자.”

“근데 부제 옆에 조그만 글씨로 뭐라 써있는데.”

“뭐든 물어보세요 옆에?”

“응. 그 옆에, ‘운명편은 써져있는 거에 반대로 됩니다’ 라고 써있네.”     


과연 박중령께서는 영전을 하셨을래나.





이전 07화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