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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이김정
Oct 04. 2024
여섯 번째 여자는 미인이었지만, 악몽이 찾아왔다
이런 말 하기 쑥스럽지만, 한때 글 하나로 잘 나간 적이 있었다.
드디어 나잘난에, 자뻑에, 리플리증후군이 시작되었나 하실텐데, 그런 건 결코 아닙니다.
라고 말은 하지만. 쫌 잘 나가긴 했을지도, 아닐지도, 그럴지도, 모르지요.(농담해서 죄송합니다.)
다시 얘기로 돌아가보겠다.
십수년 전이었고, 독서 관련 인터넷카페에 글
하나를
올렸을 때다.
팬시한 글이었다.
이쁘고, 애니같고, 십대 감성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신카이 마코토를 짬짜면으로 반반 섞었다.
이렇게 써보면 어떨까 하는 기분으로 아무 생각없이 끄적끄적 썼던 거였다.
그런데 반응이 놀라웠다.
댓글 수십개가 순식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붙어버렸다.
특히 젊은 여자분들이.
남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남자들 댓글이 없어도 인기는 상한가를 치다못해, 줄상에, 떡상을 했다.
카페를 넘어서 포털 메인페이지까지 게재되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카페에선 이 사람 누구야 하고 난리가 났다. 여자들끼리만.
남자 회원들은 “저 자식 뭐야.” 질투의 눈을 했고.
어쨌든 난 갑자기 세간의 주목을 받은 셈이다.
요리로 치면 경기도 의정부 뒷골목 아무개 주방장이 미슐렝 유명 쉐프, 백종원, 이연복, 김순자여사가 된 격이다.
(세번째 분은 저희 어머니입니다. 한번 끼어넣어봤습니다. 반응이 안좋을래나.)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자연스레 카페의 몇몇 분들이 오프에서 얼굴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심지어 지방에서도 시간을 내어
올라오겠다는 분도 계셨다.
아무튼 바야흐로 팬미팅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내 입장은 어땠을까.
온라인과 달리 오프에서 보면 솔직히
실망하지 않을
까 싶었다.
왜냐면 제가 들창코에, 시력도 나쁘고, 키도 180에 0.2 모자르고, 왼손잡이에다가, 잠꼬대도 심하고, 손톱을 씹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왠만하면 사양하려다가 나는 못이기는 척 그러자고 했다.
왜냐면.
모두 여자분들이었으니까. 이십대였고.
이런 걸 사양하는 것은 남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흑심은 결코 없었다.(믿지않겠지만.)
그리하여
우리들은 홍대에서 만났다.
만나기 삼십분전에 미리 도착해 나는 2호선 홍대입구역 화장실에서 들창코를 교묘하게 숨기고, 가글을 하고, 향수를 칙칙 뿌리고, 가름마를 다시 타고, 옷매무새를 고치는 수작업 뽀샵을 했다.
그리고 첫인사 연습을 해두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그 글을 쓴 작가입니다만. 궁금하신 점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젠틀한 말투, 목소리톤,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무진장 발성 연습을 했다.
서브웨이 화장실 미러를 보면서.
2호선 홍대역 화장실 두 번째칸에서 일 보시던 분과 쉬를 하던 열한명의 분들이 보거나 말거나. 듣거나 말거나.
였다.
홍대는 지금이나 그때나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였다.
그곳에 모두 여자분 다섯분이 나오셨다. 조촐했다.
하지만 이게 맞다. 너무 많으면 다니기 불편하고(홈쇼핑 관광패키지 느낌이 날 것 같고), 너무 적으면 민망하다.(남녀가 선보는 아, 네 그러신가요, 하는 소개팅 분위기가 될 것 같아서)
나를 포함해서 여섯명은 조금 이른 시각이긴 하지만, 이탈리안식 파스타로 이름을 날리는 식당에 갔다.
메뉴판이 오갔다.
‘난 뭐로 먹지...히히.’ 하고 메뉴를 막 고르려는 찰라.
먼저 메뉴판을 냉큼 받은 앞에 두분이 모든 메뉴를 박력있게 진두지휘하며 시키셨다.
“알리오 올리, 나폴리탄, 피자는 마르게리타로 하고, 샐러드는 음.” 하는 식이다.
요리가 나오자 이걸 또 테이블에 좌악 펼쳐놓고 집게로 나눠먹었다.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
남자들끼리 오붓하게 이탈리아식 파스타 식당에 갈 일도 없지만, 있다고 해도 각자의 메뉴를 하드하게 시키게 된다. 니 껀 니 꺼, 내 껀 내 꺼. 다른 룰은 없다.
그런데 여자들은 여러 메뉴를 시켜서, 마치 다같이 품앗이 밭일을 끝내고, 갖고온 도시락을 모아놓고 오붓하게 나눠먹는 식의 분위기였다.
의외로 나는 이게 좋았다. 처음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회중시계 토끼, 마법사 모임처럼 비쳤지만.
어쨌든 덕분에 여러 파스타도 맛보고, 바질이 들어간 샐러드도 나눠 먹고, 마리게리따 피자도 한쪽씩 먹었다. 거기다 하우스 생맥주도 한잔씩 곁들였다.
무더운 여름은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기분 좋은 가을, 어느
주말
이었다.
노천으로 개폐월을 개방한 식당에 앉아 우리는 저녁 무렵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거기에 다섯명의 파릇한 이십대 여자분들이 까르르 하고 별 거 아닌 말에도 환하게 웃었다.
젊음이란 그런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뭐든 즐겁고, 뭐든 생기있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나를 둘러싸고 내 글을 칭찬해주었다.
난 0.5센티미터 두께의 미소를 얼굴에 띄었다. 너무 좋다고 실실대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과묵하면 건방진 거 아니야 하는 얘길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어쩜 그렇게 글을 예쁘게 쓰세요.”
“전 사랑스런 글에 반해서 한달음에 남자친구에게 달려갔잖아요.”
어떤 분은 나를 내내 노골적으로 주시했고, 어떤 분은 슬쩍슬쩍 쳐다보았다.
내 옆자리를 앉겠다고 가위바위보도 했다.
나 이런, 이놈의 인기란.
내 인생 행복했던 한 때를 꼽으라면 이 장면이다.
지금도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떠올리면, 얼굴에서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마누라가 옆에서 보면.
“뭐야! 왜 그렇게 바보처럼 실실 웃어. 무슨 좋은 일 있어.”
“앗, 아무 것도 아닙니다요. 히히히.”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이제 슬슬 산책을 하고, 차 한잔 마시러 가든지, 일본식 포차 같은 데에서 술을 한잔 곁들여도 좋고, 아니면 취향에 따라 노래방도 좋고.
하던 참이었다.
그때 한 여자분이 말했다.
“근데요. 여기 꼭 오고 싶은 여자분이 한분 더 계셨어요...”
라고 시작한 여섯 번째 여자 얘기.
난 이제 이분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분이 만약 나타나지 않았다면, 과연 어땠을까 이다.
그랬다면 지옥 같은 악몽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건 지옥이란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치 운명과도 같이 여섯 번째 여자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 일에 대해 얘기하겠다.
여섯 번째 여자.
그녀는 홍대 근처 상수동 쪽, 캐주얼한 의류와 악세사리를 파는 곳에서 알바를 한다고 했다.
이곳에 꼭 오고 싶었고, 실제로 비번인 날이라 오기로 되어있었다.
헌데 원래 그날 근무를 하기로 한 다른 알바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아침에 배앓이를 심하게 해서 도저히 안되겠다, 병원에 가봤는데, 장염이라고 한다, 주사를 맞고, 약을 먹기는 했는데, 오늘은 쉬는 게 좋겠다고 의사가 권고했다, 그러니 대신 부탁을.
이런 얘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녀는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오지 못한 것이다.
그 대신 오늘 함께 만나게 되면 자신이 있는 가게로 와주면 안되겠는지 부탁을 해왔다는 것이다.
꼭 나를 보고싶다고.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해듣는 그녀의 말투에는 뭔가 기묘함이 있었다.
꼭 보고싶다라니.
어째서.
그렇지만 당시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달리 바쁜 일도 없었다.
저녁을 먹은 후 산책이라 생각하면 된다. 때는 가을이다. 홍대 스트릿이고.
담소를 나누며 가볍게 걸어가면 될 것 같다. 고작 해봐야 십분도 안되는 거리다. 홍대와 상수동은 옆동네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가게는 아담한 크기였다.
젊은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악세사리에 캐주얼하면서 트렌디한 느낌의 여성 의류들을 함께 판매하고 있었다.
때마침 가게의 손님을 응대하고 있던 그녀에게 우리가 온 것을 소리나지 않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생긋 웃고는 양해를 구하는 듯한 표정을 매력있게 지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눈을 돌려 눈을 마주쳤다.
그때 순간 내 가슴이 설레었다.
왜냐면.
난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미인이라 직감했기 때문이다.
정말 미인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외모가 이쁜 여자들, 남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미인들을 보아왔고, 만나기도 해봤다.
그녀는 그런 타입의 미인이 틀림없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질 정도였다.
그녀는 절세 미인이었다 라고.
그런 분 앞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옷매무새를 만지고, 머리 매무새도 손보고, 이빨 사이 껴있을 양념은 없는지 빠르게 검색도 하는데.
그런데.
그런데 그 일이 터졌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일이초가 흐른 뒤였다.
난 기억한다. 정확히 일이초 뒤다.
갑자기 나에게 그것이 찾아들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꾸르륵. 꾸르륵.”
배 안에서 창자가 뒤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 소장, 아니 대장 어딘가의 어두컴컴한 동굴 속, 신경 다발에서 찌르르 하고 고통의 신호가 오고 있었다.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설사다.
왜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이때인가.
왜 이때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걸까.
하고많은 시간중에 왜 이 시간을 택해서, 저 절세 미인을 앞에 두고, 그리고 이 여섯명의 여자분들을 앞에 두고 찾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던 걸까.
설사.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늠해보았다.
샐러드가 문제였을까.
샐러드에 들어간 바질때문인가. 샐러드를 만진 주방장 녀석이 손을 씻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차가운 하우스 맥주가 원인이었던 걸까.
이것도 아니라면, 설마 혹시.
저 미인인 알바 여자분과 눈이 마주쳐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신화 속의 메두사처럼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되는 것처럼 설사를 하게 된다는.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까지 하다니, 난 미쳤나보다)
아,
아니다.
문제가
무엇이었
는지
뭐가
중요하겠는가
.
왜냐면.
난 안다.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미인과 만나고 다음 코스로 가서 화장실에 가면 되겠지 하고 태평하게 생각할 게 아니었다.
고통은 규칙적으로 왔고, 그리고 확실하게 심해져갔다.
대장 속에서 거주하는 설사를 담당하는 난장이 놈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창자의 벽을 긁어대고 있었다.
“이래도 응가를 안해. 어서 응가를 해. 이 자식아. 시원하게.” 하고.
(미안합니다. 혹시 지금 식사중에 이 글을 읽으시는 것이라면 본의 아니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식사 다 마치시고 오셔서 여기서부터 다시 읽으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도 혹시 다른 코스로 빨리 가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여자들쪽 상황은 어땠을까.
미인 알바인 그녀에게 붙은 손님이 그녀를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이 셔츠는 어떠니, 저 원피스는 어떠니, 이건 귀에 꽂으면 어떨까 하는 식으로 얘기가 오래 이어지는 것이다.
“제에발! 그녀를 놔주세요. 아그그그.”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고통의 고성을 나 혼자 질러댔다.
그럼, 단호하게 화장실에 갔다오겠다고 말하면 안되었을까.
그것도 문제다.
일단 난 매우 내향적인 남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둘러싼 다섯명의 꽃같은 여자들에게 화장실 갔다온다고 말했다고 치자.
이게 종류가 그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꽤 시간이 걸리게 되어있다.
그렇게 되면 눈치를 채고, “뭐야, 저 남자, 응가나 하고.” 이럴까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오늘 쌓아올린 이미지가 있는데.
폼이란 폼은 다 잡았는데.
문학이 어떠니, 감성이 어떠니, 요새 읽은 책중 추천하자면 어떠니 하고 말이다.
게다가 팬시하고, 감성어리고, 이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향수도 뿌리고, 가글도 하고, 양말도 새로 사 신고, 목에 스카프도 했었나(이건 모르겠다) 어쨌든, 흑흑.
아, 정말이지.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러했던 사람이 설사라니.
아, 안된다.
절대 안된다.
하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고속으로 돌렸다. 여자분들 모르게 이것을 해결할 방법을.
그리고 떠올렸다.
“흐흐흐.”
핸드폰을 여유있게 들었다.(장은 뒤틀렸지만)
“여보세요. 이김정입니다. 아니, 휴일이신데, 이렇게 전화를 주셨네...이머전시가 생겼다고요, 이런, 이런. 잠시만요. 이햐, 나 없으면 회사가 안돌아가니.”
하고 나는 여자분들에게 눈으로 젠틀하게 양해를 구했다.
그분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눈웃음을 지어주었고.
“
주말
에도 바쁘시나보네.” 라는 말이 뒤에서 들려오고.
난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전화가 오긴 뭐가 왔겠나. 뻥이지.
난 그야말로 맹렬하게 달렸다.
화장실을 찾아서. 토일렛을 찾아서. WC를 찾아서.
이젠 정말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난장이놈이 창자를 인정사정없이 긁어댄다.
거리에서 보이는 족족 화장실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이것도 열어보고, 저것도 열어보고.
열려라, 제발 하고.
헌데 무슨 일인지 모두 꽁꽁 잠겼다. 어떤 화장실도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왜지?
단 하나의 상가 화장실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생각해보았다.
때는 화장실에서 흉측한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가게들이 화장실 문을 최신형 도어락으로 잠그던 때였던 거다.
“아, 안돼!”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진짜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격한 운동을 하지 않아도, 온몸에 기분 나쁜 땀이 번들번들 맺히는 경험.
숨 쉴 수도 없을 것 같다. 고통이 심하면 숨이 막히는 법인가 보다.
고통은 더욱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출산의 고통을 견디신 이 세상 모든 어머니를 존경하게 되었다.
“아, 아아악!! 어머니!”
어떻게 할 것인가.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까.
솔론몬 왕이 와도, 지혜의 신 아테나가 와도, 전래동화 사또와 꾀돌이가 와도, 절대 안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난 그런 극악의 확률을 뚫었다.
사람이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지만 어쨌든.)
이제 이 세상에서 낼 수 있는 마지막 지혜를 쥐어짜냈다.
이것이 안되면 끝장이다.
내가 생각해낸 것은 바로 지하철역내에 있는 화장실이였다.
대신 제약이 있다.
지하철비를 내고 게이트를 통과해야 한다.
지금 돈이 문제인가.
어쨌든 거기라면 열려있을 거고, 들어갈 수 있다.
단, 만석이 아니라는 전제로.
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을 잽싸게 스캔했다.
이곳은 홍대 남쪽 지역이다. 영어로 레드 유니버시티 사우스 블록.(급하니까 진위 여부는 나중에 따지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6호선 상수역이다.
뛰면 일분내다.
됐다. 간다.
내 달리기 실력은 정평이 나있다. 못하는 거로.
100미터에 15초 안팎이다. 창피하다.
근데 그날은 100미터를 12초에 뛴 것 같다.
괴력이다.
“다, 다, 다, 다.”
그 옛날 학생때 체육쌤이 이 장면을 보았어야 했었다.
“이김정. 좋아 그런 폼으로 달리는 거야. 넌 할 수 있어.”
웹툰에서 빠르게 달리면 주위에 먼지가 날린다더니, 정말 길가로 은행잎들이 후드드드 떨어졌다.(원래 떨어지기로 되어있던 것 같긴 하지만)
나에겐 구세주요, 오아시스요, 구천갑자 보살님이신 6호선 상수역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여섯명의 꽃같은 여자들을 놔두고, 한 남자가 맹렬하게 달리고 있는 것이다.
화장실을 향해서.
과연 저는 상수동 지하철역 화장실에 잘 도착해서 해결을 보았을까요.
그리고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달려가 여자분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자연스레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결말까지 모두 말하면 싱겁지 않냐고. 글에는 여운이 있어야 한다고.
대신 하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저의 인기는 그날을 피크로 석양처럼 져버려서 시들해졌습니다.
당연합니다.
선어지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물없이 물고기를 잡으려는 헛된 희망을 말합니다.
별 노력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얘기이겠죠.
저때의 저는 그랬습니다. 글 하나로 어떻게 오래 버티겠습니까. 그건 그저 얻어 걸린 것일 뿐.
지금도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어쨌든 덕분에 저는 좋은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여섯 번째 여자분입니다.
그때 저는 왜 배앓이를 했던 것일까요.
아까도 추측했듯이 혹시 메두사와 눈을 마주치면 남자들이 돌이 되듯,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배앓이를 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합리적인 의심이 듭니다.
분명 저는 그분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런 느낌을 찌르르 받았습니다.
과연 제 생각이 맞을까요?
헌데 이제는 그때의 분들과 모두 소식이 끊겨 알 수 없는 인생의 미스테리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참, 상수역 화장실은 아직도 건재하겠죠.
다시 가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음.
지금 강아지 산책시켜줘야 해서 갔다와서 대답할께요. 휘리릭~.
# 사진 출처는 픽사베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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