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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김정 Sep 20. 2024

당신을 일년동안 짝사랑했어요 라는 전화를 받는다면



난 공대생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도서관에 달려갔다.

공학 수학과 전공 엔지니어링 원서를 읽고, 강의 내용의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서.

아니다.

문학 서적을 탐독하기 위해서다.     


대학내내 문학, 예술사, 인문 서적만 팠고, 짬이 나면 동아리에 가서 독서 토론과 합평회를 가졌다.

그리고 강의 시간이 되면 공대생으로 변신을 해서 하얀 가운의 실험복을 입고, 납땜기와 로베르트 보쉬 공구통을 들고(농담), 출석 호명에 대답했고, 레포트를 냈고, 시험을 쳤다.

학점을 따고 졸업하기 위해서.     


요컨대 잡식성 학생이었다. 문과도 아니고, 이과도 아니었다.

이과에 땅을 밟고 섰지만, 송나라 장자 선생님처럼 문과의 꿈을 꾸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연애로 치면 불륜이고, 양다리이고, 어장관리고, 나쁜 시키다.

이걸 논하자는 건 아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로 인해 내 어깨에 뽕이 차버렸다는 거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동안 취업 재수를 했었다.

취업 재수를 한 이유도 어깨에 뽕이 차서다.

순순히 일반 회사에 들어가 봉급자가 될까보냐 하고 되도않는 시건방을 떨었다.

겸손하지 못했고, 눈에 뭐가 씌였고, 철도 없었다.     


나의 이십대하고도 중반, 이불킥 시대의 얘기다.   

  

그때 나라는 사람은 필시 스페셜한 일을 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가령, 문학계 혜성같이 등단을 한다든지.

가스통 바슐라르식 몽상의 평론가 길을 걷게 된다든지.

시인 기형도처럼 삼류 극장 좌석에 파묻혀 장뤽 고다르표 누벨바그에 젖는다든지.

하고 얼토당토않은 아우라 개폼을 잡았다.     


그러나 현실은 미안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였고, 취업 재수생 백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옛날 부치 캐시드와 선댄스 키드가 내일을 향해 총을 쐈듯이, 스페셜한 것은 요원한 일이고, 아마도 오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어깨에 뽕이 차있었다.     


그런 날들중 하나였다.      


집으로 불쑥 전화가 왔다.

“때르릉” 하고.

전화를 받자 낯선 목소리의 여자였다.

나를 찾았다.

‘누구지?’

누군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나이는 나보다 어리겠다 정도.   

  

미스테리한 그녀는 바로 자신에 대한 짧막한 소개를 했다.

소개를 들으니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아, 그분!’     


일년 전에 진행했던 독서 모임에 함께 했던 여학생이다.

당시 연합 동아리였던 어느 여대 문학회 독서모임에 진행자로 초대된 적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진행을 맡으며 함께 토론도 했고, 배움도 가졌다.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모였고, 겨울방학을 이용해 두달동안 가졌다.

재밌었고, 즐거웠고, 시간이 흘렀는데도 기억이 선명하다.

(아마 여자들에 둘러싸였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지고 소중한 기억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마누라가 방금 눈을 흘겼다.)       


그녀는 거기에 참석했던 여학생이다.

생각해보니 그녀와 관련된 소동이 있었다.

모임 첫날, 30분 분량의 시작 발제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자리에서 떠났다.

사연은 이렇다.     


그애 옆에 친구가 내게 말했다.

“선배님. 얘가 갑자기 몸이 좋지 않대요. 어쩌죠.”     


그녀의 얼굴색이 파리했고, 정말 어딘가 아파보였다.

앰뷸란스를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그녀는 마다했다. 그 정도는 아니고, 집으로 돌아가면 괜찮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힘없이 떠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후로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독서 모임에 다시는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픈 게 낫지 않아서 그런가 했더니, 아니었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을까 했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때 추측으로는 모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참석하지 않기로 했나보다 였다.     


그렇게 짧은 인연만 남긴 그녀다.

그런데 그녀가 왜 내게 전화를 했을까. 그것도 일년이 넘어서.     


그녀는 자신의 소개를 짧막하게 마친 후,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모임 때부터 선배를 지난 일년동안 짝사랑해왔어요.”    

  

뭐시기.

헉.     


하마터면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믿을 수 없었다.

당연하지 않을까.     


그 모임의 일부는 연합동아리 활동으로 자주 본 적이 있지만, 그녀는 그날 처음이었다.

이 얘기는, 우리가 서로 대면을 한 시간이 일생을 통틀어 고작 30분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그 30분동안 그녀는 아프기까지 했다.

게다가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이라고는.

“앰뷸란스 불러드릴까요.” 였다.

거기에 무슨 시그널, 플러팅, 썸에 연관된 일체의 정황은 아마도.

없었다.     


정말이지 없었습니다.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몰랐다.

그녀는 혹시 슈퍼 울트라 Q패스 금싸빠인 걸까.  

그래도 저러한 짧은 시간에 사랑이라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낀다는 게 정녕 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세상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으니까 생각해볼 수도 있다.

고는 하지만.     


나는 혼란에 빠졌다.

혼란에 빠진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근데요, 지금 강사를 하고 계신 건가요?”

“네?”

강사라니?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일까.

학원. 일타강사, 뭐 그런 거.     


“대학에 강의를 나간다든지...”

아하. 대학 강사 말하시는구나.

“아니요.”

외모는 강사처럼 생겼다고는 하지만.

도리도리.     


“그럼, 대학원에 다니면서 조교 같은 거 하시고, 문학사조 논문도 쓰시고.”

대학원에 다니면 좋겠지만, 학비도 비싸고, 집안 사정이 따라주지도 않고. 논문은 체질이 아니라서.

“아닌데요.”

도리도리.     


“아. 출판사나 언론계통에 다니시는구나. 누군가에게서 그런 얘길 들었던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만, 그것도 아닙니다요.”

도리도리.     


“그럼 실례지만, 지금 어떤 자리에서 계시는지?”     


대충 이런 문답이 오고갔다.


이런 정도의 대화로 보면 이분이 대강 누굴 좋아했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지 추측이 될 것이다.    

 

그렇다.

그녀가 어떤 계기로 나를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건 몰라도, 대신 하나 알 수 있는 건 있다.     


그건 나를 매우 인텔리전트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위치도 되고, 거기에 명망이 있고, 지적인 아우라에 품위도 갖추고, 예술도 한발 담근 인간.

그녀가 보고 싶어했던 환상 속의 인물이다.

내가 어떻게 저런 인물로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그 계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실제의 나는 전혀 아니다.

나도 당시 그쪽으로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어깨에 뽕이 차있었으니까), 현실적으로 아닌 건 아니었다. 사기를 칠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어떤 여자분이 나를 좋아해주는 것은 매우 고맙다.

나 같은 인간을 좋아해주는 것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중 참 소중한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편향되고 왜곡된 시각과 감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그닥 원치 않는다.

명배우 케시 베이츠가 출연한 아주 오래전 영화 미저리에서 보듯이...아, 그렇게 생각하면 저 여자분을 재단해서 편견으로 보는 것이니 그만두겠다.      


어쨌든 나는 그녀의 생각을 바로 잡아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추측이 틀리더라도 중간에 정정하면 되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설명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그녀가 실망하지 않도록 아주 스무스하고 젠틀하고, 소프트하게 말하고, 그녀의 마음을 거절하기로 했다.    

 

그런데 상황은 내 의도와 다르게 흘렀다.

그녀가 내 말을 애초부터 이해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완강히 이해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이었다.     


‘너, 나 속이려는 거지. 넌 실제로 매우 인텔리전트한 사람이 되어있는데, 자꾸 아니라고 하는 거잖아’ 하고.     

이러니 조금 으스스해졌다.

이분 집요함이 대단했다.

그래서 일년동안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다가...미저리, 케시 베이츠로 변신을 해서, 으으. 아니다.    

 

전화기를 든 손에 땀이 쥐어진다.

등줄기로 땀이 흐른 것도 같다.

머리가 아파왔다.

설렁설렁 말해선 안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느 지점부터 대강 설명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도 섰다.

그래서 나는 속속들이 내 사정을 있는 그대로, 아주 디테일하게, 인과관계가 분명해서 설정 파괴가 없도록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작했다.

난 백수다. 정말 백수다, 이렇게 된 배경도 설명했다.

이래 저래 해서 한량에, 건달에, 놈팽이에, 날백수에, 기둥서방이다(아참, 이건 아니고) 하고.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아 대학원은 꿈도 꾸지 못한다.

대학 강사를 할 실력도 안되고, 논할 가치도 없다.

출판사니 언론사니 그런 데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들어가지 않는 게 아니라 들어갈 수 없다.      


“왜요?”

그녀가 건너편에서 눈을 깜빡이며(보이지 않지만 느껴졌다) 질문했다.     


실력이 없으니까.      


그런 곳도 다 시험을 친다든지, 여러 가지를 고려하는데, 난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설명했다.

부연해서 토익 점수도 깨알같이 얘기해주었다.     


“정말 그것 밖에 안돼요?”

여기서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생각해도 한숨이 나올만한 점수다.

“리스닝 쪽이 안좋아서...그래마도 그닥...”

변명을 해보지만, 무마는 안된다.     


“신춘문예라든지, 문학지 공모는 안하세요?”

예심에서 컷 된다.

해도 떨어진다는 거다. 떨어질 것을 알면서 왜 하겠는가. 내 실력을 안다 라고 말했다.     


“그럼 따로 개인 출판이나 잡지를 간행하시지...”

고작 용돈 받아 쓰고, 알바도 겨우 하는 처지의 취준생이.

그랬다간 쫄딱 망해서 파산한다. 길바닥에 나앉는다는 얘기다.  

   

“그럼 앞으로 뭐하실려고요?”

이 말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촌천살인의 여동생, 가족이라는 이름의 분들이 이미 천번도 넘게 내게 던졌던 질문이다.     


“그래, 너 이 자식아, 앞으로 뭐하며 살래.” 하고.     


그래서 난 그분들에게 말해왔듯 나오는대로 썰을 풀었다.

어느 구두 회사와 백화점, 패션 어패럴 무역 회사, 기술관련 금융기관, 그리고 국내 유통 회사, 제과 기업에 이력서를 쑹쑹 넣을 예정이다. (실은 어깨에 뽕이 차서 고민중이고, 증명사진도 찍지 않았다.)

플랜 B도 있다.

앞으로 이 모든 곳에 떨어지면, 욕을 얻어먹더라도 다시 시간을 벌어서 공무원 시험 준비도 할 거라고.    

 

내가 대체 왜 이런 얘기를 전화로 일생 통틀어 30분 밖에 보지 않은 여자에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그리고 성심을 다해 설명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끌어안고 있고, 얼마나 엉망이고, 얼마나 백주 대낮에 날백수에, 불한당에 불과한지 논리적으로 설정파괴없이 말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한창 열변을 토했다.

얘기하고보니 그럴 듯 했다.     


헌데 어느 순간부터 전화기 저편의 그녀가 말이 없어졌다.

침묵.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녀가 숨을 한번 꼴깍 삼키더니 한참을 또 말이 없었다.     

나는 기다렸다.     


“크큼.”

좀더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속이 후련한 듯한 말투다.

요지는 두마디였다.     


내게 고백을 했으니 속이 다 풀렸다고.

그리고 앞으로 연락하지 않을 것 같다고.     


전화를 끊기 전 내게 당부를 했다.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토익은 파** 어학원 스파르타 특별속성반 등록해요. 이삼백점 올리는 건 일도 아니에요. 그런 거.”

“탁! 뚜우우우우.”


그리고 끊겼다.     


“......”     


(잠깐, 당신의 마음을 거절하는 과정이 아직 남았는데, 갑자기 끊으시면.)

    

그 뒤로 그녀에게서 단 한통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어쨌든 잘 해결된 것 같았다.

잘 해결된 것 같은데, 이상하다.

내 기분이 미묘하게 뜨뜻미지근해지고, 얼기설기 꼬여진 것도 같고, 이상하고, 오묘신묘, 신기방기해졌다.

뭘까 이건.     


나에 대해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너무 노골적으로 설파했나.     


잘 모르겠다. 정확히 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이런 정도가 아닐까.     


‘성토를 하고보니 내가 봐도 진짜로 나는 굉장히 한심한 인간이었다 라는 거다.

그리고 그런 말을 줄곧 내가 내 자신에게 해줄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는데, 그녀를 매개로 내게 한 것 같다는 거다.’     


어깨에 뽕이고 뭐고 다 빠졌다.

그 덕인가, 어깨에 뽕이 빠져서, 몸이며, 마음이며 훨씬 가벼워졌다.

내 어깨에 짊어진 뭔가가 돌연 사라져버린 기분이다.

‘넌 특별해지지 않아도 돼.’ 라고 누군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뒤 나는 다른 졸업생, 다른 졸업예정자들처럼, 증명 사진도 찍고, 그녀의 충고대로 파** 어학원 스파르타 특별 속성반에 들어갔고, 이력서를 열심히 썼고, 채용란을 꼼꼼히 살폈고, 면접 시간도 잘 지켰고, 그리고 어느 회사에서 고맙게도 입사를 허가해주었다.     


어쩔땐 이런 생각도 든다. 그녀 덕분에 취업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어쨌든 거기서 사람들과 어울려 행복도 느끼고, 즐거움도 느끼고, 화도 내고, 슬퍼도 하고, 분개도 하고, 낄낄대기도 하고, 그렇게 살았다.

후회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거기서도 후회도 하면서, 그 후회하는 마음을 다독이면서, 다독이는 것을 반추하면서 인생이란 것을 살았다.     

인생이란 원래 후회하는 거라고.     




여담으로 케시 베이츠는 최근에 은퇴를 선언했다. 그녀의 나이 76세이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 미저리, 타이타닉, 돌로레스 클레이본, 여러 영화가 있지만, 그중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좋아한다.     


그 영화에 나오는 명대사중 하나가 있다.     

‘나는 젊다기엔 너무 늙었고, 늙었다기엔 너무 젊다.’     


지금 내 나이가 딱 그렇다.     


근데 그녀는 뭐할까?     


이랬더니 내 얘길 엿본 마누라가 나를 고문한다.     

“네 이놈! 그년이 누구냐! 바른대로 말하렷다!”

“케시 베이츠요!”

“안되겠다! 주리를 더 틀어라!”

“네이!”

“끄아아악!!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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