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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김정 Oct 07. 2024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지금 혹시 인생이 정말 끝난 것 같은가요. 그렇다면 과연.     


오래 전 일이다.

한때 모셨던 팀장님은 성과중심주의자이셨다.

의도와 과정은 중요치 않았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

그 반대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되는 인물이었다.

(이런 분도 마누라에게는 “그 거, 영 마음에 안드는데.” “네네 마눌님.” 하고 꼼짝 못하는 것을 백화점에서 우연히 봤다. 불가사의하고, 미스테리하지요.)      


한번은 팀장님을 모시고, 팀원 몇 명이 일본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이전번의 회사 고과에서 고배를 마시고 낙심하던 때다.

“이번에는 기필코 A를 맞아야지.” 하고 별렀다. 티 안나게. 티 나면 경쟁이 치열해지니까.     


출국심사를 모두 마치고, 면세점으로 들어서던 길이다.

그때 야마자키 위스키가 내 눈에 보였다.

면세점에서 야마자키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때였다.

게다가 팀장님 최애 술중 하나가 야마자키다.

저 귀한 걸 팀장님과 나눠 마신다면 어떻게 될까.

고과 점수 1점은 올라갈지도 모른다.     


선반에 마지막 한병이 남아있었다. 리미티드란 얘기다.  

   

좌측에서 검정 선글라스를 낀 어떤 사내가 코트 깃을 바싹 올리고, 야마자키를 뚫어져라 지켜보는 것이 내 눈에 들어온다.

저걸 꼭 사고싶은데 하고.     


안되지.

난 잽싸게 홍해를 가르듯 군중을 뚫고 나가며, 손을 번쩍 들었다.     


“이모! 사장님! 야마자키 여기 주세요! 여기 돈 있어요! 머니가 있다고! 여권하고 탑승권도 있고, 한식 조리 자격증도 있고, 컴퓨터활용능력 2급이고, 운전면허 오토 1종에, 바리스타 자격증은 앞으로 딸 거고, 그리고 뭐가 또 있더라, 모르겠고, 어쨌든.”

라고 소리친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동시에 바라봤다.     


‘고과는 내 것이다.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이번에는 하고 결의에 불탔고, 고과의 화신이 되었다.

그렇게 야마자키는 내 차지가 되었다.

낙심한 선글라스 사내는 인생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풀이 죽어 돌아갔다.     


야마자키를 끌어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일행들(회사 실전학으로 말하면, 잠재적 고과 경쟁자들) 옆에 앉았다. 숨을 골랐다.

샐러리맨 해보신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회사와 사회는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요, 살육의 피가 낭자한 닌자와 자객들의 세상이다.

난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실실 지었다.     


“이대리. 뭐 좋은 일 있어? 면세점에서 뭐라도 산 모양이야.”

팀장님이 궁금해서 물어왔다.

“팀장님. 이거.”

술병을 감질맛나게 들어보였다.

“아니, 야. 마. 자. 키. 그런 귀한 술을? 내 눈엔 안보이던데.”

내 눈엔 보였는데.

“팀장님 성은에 보답하려고...오늘 호텔에서...”

“아, 이 친구. 그럼 못써. 괜찮아. 좋은 건데 너나 아껴 마셔라. 나는 뭐 괜찮다.”

손사래질을 치신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으실텐데.     


탑승이 시작되었다.

사람들 줄이 길게 이어졌다.

우리는 좀더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틈을 봐서 팀장님께 다시 어필을 했다.     


“팀장님! 오늘밤 진행됩니다. 모두들 호텔방에 모이세요! 전설의 야마자키를 바로 깝니다! 인생 뭐 있겠습니까. 오늘 산 술은 오늘 까라는 게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다케츠루 마사타카의 지론이었습니다.”

“다케츠루 마사타카?”

“넵!”

(다케츠루 마사타카? 그게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냥 막 질렀지, 여기 모인 사람 아무도 몰라요.)

“하하하. 그래. 다케츠루 뭐시냐 하는 양반의 철학이 그렇다면야, 하는 수 없지. 알았다, 알았어.”


난 음흉히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대로 일이 술술 풀리고 있다.     

 

고과 시즌이 얼마 안남았다는 것.

누구나 청탁엔 약하다. 그런데 미끼를 물었다. 그리고 문제는 한번 물면 놓지않는다는 것.

“흐흐흐.”     


비행기에 탑승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들려왔다.

내 주변에 평화와 행복, 아니.

음모와 배신, 모략의 어두운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옆에 후배가(이전 고과에서 A를 받으신 분이시지, 아마) 안전벨트를 딸깍 매며 내게 말을 건넸다.

“선배님.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걸 사실 생각을 했어요. 팀장님 입이 찢어지던데요.”

라고 웃으며 내게 말했지만.

속으론.

“선배나 돼가지고, 술 따위로 팀장님 환심을 사려고,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좋아, 도쿄에 가기만 해봐라” 이겠지.

훗후. 이래서 맞짱엔 선빵이고, 검술엔 선공이 무섭다는 것이다.      


비행기는 기분 좋게 이륙했다.

“띵동. 잠시후 기내 음료 서비스가 시작되겠습니다.”

방송이 나왔다.     

이제 느긋하게 무료 음료를 왼손에 들고, 빈 손은 터치스크린에 우아하게 올리려던 찰라.


음, 근데 이상했다.

뭔가 느낌이 좋질 않았다.

정수리가 간질간질했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야마자키 위스키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라고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머리를 들어 기내 짐칸을 올려다보았다.

난 그러고보니 저 짐칸에 그것을 넣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없다.

발 밑에도, 무릎 위에도, 후배 옆좌석에도, 후배 발을 들어보아도.

뒤엣 사람에게 잠시 맡긴 적도.

스튜디어스에게 물품 보관 서비스를 받은 적도.

비행기 밖에도.

없다.     


생각해보니.

공항 39번 게이트 의자 앞에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거기에 있다.

필시.     


흑흑.     


야마자키 위스키.

그곳에 나는 야마자키를 깜빡 놓고 왔던 것이다.     

     



(신주쿠 근처 어느 호텔)     


“이봐 안주임. 이대리는 언제 오나? 야마자키 같이 마시자고, 밤에 호텔방에서 모이자더니, 왜 안오나. 인생 뭐 없대메. 혹시 다케츠룬가 뭔가 하는 양반하고 둘이서 몰래 마시고 있는 거 아니야.”

“술 사러 갔어요.”

“술? 이미 산 거 아니야? 뭐야. 대체. 이 자식.”  

   

그 시간 나는 야마자키를 이잡듯이 찾느라 신주쿠 가부키초를 헤매고 다니고 있었다.


백화점도 문을 닫은 한밤중.

때는 한겨울 12월. 신주쿠에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쳤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스타일로.     


“휘이이잉. 휘잉.” 하고.     


그러니 아무리 가부키초라도 인적이 끊겼다.

내 발자국의 검은 두줄만 눈밭에 똘똘똘.      


“야마자키 없나요? 단 한병만이라도. 덜덜덜.”     


오돌돌 떨며 한 사내가 눈밭을 홀로 걸어가고 있다.     




(후일담이겠죠, 아마)    


공항 39번 게이트 앞을 지나치던 코트 깃의 검정 선글라스 사내가 홀로 주인을 잃은 야마자키를 발견하고, 주위를 살피곤, 입가에 씨익 웃음을 짓고, 슬쩍 야마자키를 들어서 총총총 가버렸다는...     


그렇습니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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