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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김정 Oct 14. 2024

울고싶을 땐 울어야 합니다



울지않고는 못배기는 글입니다.

옆에 손수건 한 장 준비해도 됩니다.


“정말요?” 하고 물으실텐데.     


약속합니다.

그리고 이 글 제목이 왜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뼛속까지.          




회사에서 일본 출장 가는 길이었다.  

   

잠시 건축 개발업무를 할 때다.

도쿄 센다가야에 소재하는 인테리어설계 디자이너 하시모토 씨와 긴급 미팅 건이다.    

멤버는 팀장님, 나, 후배, 국내설계 담당자, 통역사, 모두 5명이다.

광 팔고, 패 돌리고, 고스톱 치기 딱 좋지만, 그런 얘길 했다간 혀가 잘릴 것이다.

팀장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성과 지상주의 냉혈한이시니까.     

 

“출장중 쓸데없는 얘기로 정신을 흐뜨려놓는 날엔, 세치 혀를.”

“허걱.”

“거기다 만약 정신 못차리고, 실수까지 하는 날엔, 단두대에 목을.”

“꺼억.”     


그런데 이것이 현실로 닥쳐올 줄은 정말 몰랐다.     



  

때는 겨울이고, 연말이다.

다른 말로 인사 고과철이 코 앞이다.

거기다 이번 출장은 경영진이 지시한 긴급 미팅 건이다.

실수하면 안된다는 얘기다.     


고로 준비는 철저히 했다.

하시모토씨의 어시스턴트와 미팅 스케줄을 우선 잡았다. 거기에 맞춘 일본 현지 스케줄을 짰고, 유휴 시간은 벤치마킹도 넣어 촘촘함을 더했다.

일본 측과의 저녁 식사도 일정에 넣고, 장소는 그쪽에서 예약하기로 한다.

완성된 스케줄을 토대로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하고, 여행보험 들고, 경비를 뽑아 출장 품의를 진행시켰다.

동시에 설계 긴급요구사항과 Q&A 자료를 디테일하게 준비하여 통역사무실로 보낸다.

결재가 난 품의서를 출납 사원에게 회람시켜 출장 경비를 받아 은행에 가서 환전까지 마쳤다.

일본어로 번역되어 돌아온 설계 긴급요구사항과 Q&A 자료를 일본측에 미리 보내놓았다. 답변 준비하라고.

    

“이대리! 나좀 잠깐 볼까.”

팀장님이 매의 눈으로 출장 준비를 점검하셨다.

눈을 체크리스트에 박고 꼼꼼히 따졌다.


“플랜B는 있나. 그쪽에서 우리 긴급 요구건을 동의하지 않을 때.”

내 얼굴도 안보고 묻는다.     

“있습니다. 여기.”


팀장님은 입을 비죽 내밀고, 내가 내놓은 긴급요구건 플랜B 서류를 눈으로 차르르 훑는다.

“벤치마킹 장소, 이것밖에 없나.”

“벤치마킹 플랜B 있습니다. 여기.”

일본 신규 복합시설 현황 리스트를 내놓는다.


“비행기는...”

“예약했습니다. 비상구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으로서 좌석 넘버링은...”

“아니, 비행기 연착되거나 사고 났을 때 스케줄은 어떻게 되냐는 거야.”

사고나면, 동해에 떨어져 죽는 거 아닌가 할텐데, 천만의 말씀.    

 

“스케줄 플랜B는 여기.”

나같이 철두철미하게 일하는 사원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고 하쇼.

라고 팀장님께 읍소하고 싶지만, 내가 참는다. 난 유능하니까.     


팀장님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어 내 얼굴을 본다.

혹시.

뭔가 잘못됐나.     

“이김정 대리.”

억양이 없다.

“네?”

“이대로 계속 진행해.”

휴우.     


마지막으로 회사 준비물을 챙긴다.

기획설계도면, 인테리어 조감도, 설계 긴급요구사항과 Q&A 인쇄본, 회의 전용 노트북, 브리핑 레이저, 필기도구.     


이렇게 치밀하고도 체계적으로 준비를 마친다.

묵묵히.

눈을 반짝이며.     


나는 이 출장의 PM이다. 철두철미해야만 한다. 당연하다.


퇴근해서는 개인 짐을 준비한다.

해외 출장용 비즈니스 양복과 코트는 입고 가고, 캐주얼한 옷 한 벌, 양말과 속옷, 세면도구, 남자 향수, 충전기, 110 볼트 아답터, 일본 비즈니스 출장 3일 완성 회화책과 호텔방에서 읽을 꺼리, 그리고 회사에서 챙겨 온 짐을 더해 기내용 캐리어를 완성한다.      


여기까지.

이젠 정말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다음날 컨디션을 위해 눈가리개를 하고, 수면 베개를 베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새벽, 공항에 도착하여 용변을 미리 보는 치밀함으로 몸을 가볍게 한 후, 사람들을 기다렸다.

멤버들이 출국장에 하나둘씩 모이더니 팀장님을 마지막으로 오전 7시 30분이 된다.


“다들 모이셨으니까, 티켓팅하시죠. 비행기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라고 나는 손을 뻗어 티켓팅 부스를 가리켰다.

(나, 아무래도 너무 멋있다.)     


그런데.

티켓팅 부스로 막 걸어가려던 찰라였다.    

  

누군가 내 뒷통수를 한대 후려쳤다.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것이었다.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뭔가 중대한 실수를 한 것 같다는 거다.

침을 삼켰다.     


“꿀꺽”     


무엇일까.

아주 중요한 것을 빼먹은 기분이다.

아주 중요한 것을 빼먹고 왔다는 사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온다.     


캐리어를 끌고 툴툴툴 집을 나올 때도.

공항행 리무진 버스를 타며 요금을 낼 때도.

공항에 도착해 용변을 볼 때도 께름칙했다.

마치 우산을 버스에 두고 온 기분 같았다.

아니다.

결혼 반지를 한강고수부지 공용 화장실 세면대 위에 딸랑 벗어놓고 나온 기분 같았다.

그게 뭘까. 내가 놓고 온 것.     


여권.

영어로 패스포트.     


설마.

맞다.


여권을 챙긴 적이 없다.       

비행기 예약은 회사 전담 여행사에서 알아서 진행하기 때문에 정말 여권을 챙길 틈이 없었다.

캐리어를 챙길 때도 여권에 대해선 일도 생각하지 않았다.

한달에 한번일 정도로 빈번하게 해외 출장을 가는 통에 방심한 것일까.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했다고 생각했었는데.

플랜 B도 131개나 만들어 놓았는데.

110볼트 아답터도 챙겼는데.

이건 미처 생각못했다.

여권을.


아니다.

캐리어 안에 넣었다는 것을 깜빡 잊은지도 모른다.     

나처럼 철두철미한 PM이자 회사원이 여권을 안챙길리 없다.

“그렇고 말고.”

반사적으로 챙겨서 기억을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급 냉정해졌다.     


일행을 주시했다.

모두들 아무 것도 모른 채 티켓팅 부스로 가고 있다.     

난 슬그머니 문워크로 뒷걸음질을 쳐 뒤로 빠졌다.

의자에 캐리어를 소리나지 않게 놓았다.

일행들이 내 상황을 눈치채서는 안된다. 특히 팀장님이.    

  

캐리어의 배를 북 갈라서 양편으로 펼쳤다.

안을 천천히 뒤져보았다.

여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럴수록 침착하려하지만, 숨이 점점 가빠온다.

보여야 할 게 보이지 않으니까.   

  

캐리어의 안쪽으로 머리를 좀더 집어넣었다.

손질이 빨라졌다.

도면과, 각종 서류들을 꺼내고, 여분의 옷들도 꺼냈다. 역시 보이지 않는다.

“어, 어딨더라.”

매우 매우 다급해졌다.

손이 덜덜 떨려온다. 더듬거리기까지 한다.

이명도 생긴다.


“침착해, 침착.”

복식 호흡을 해본다.

아답터와 충전기도 끄집어내고, 세면도구도 꺼냈고. 남자 향수도 꺼냈다. 일회용 면도기도 꺼냈다.

3일 완성 회화책도 옆에 던져놓았다.

옆 의자에 내 짐으로 산더미를 이룬다.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팬티와 속옷도 열외없이 들어냈다.

이젠 출장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안에 있는 것 다 들어내고, 없는 것도 죄다 들어낸다.

파내고 또 파낸다.

캐리어를 통해 지구 중심까지 파내려갈 작정이다.

그러나 그렇게 파내고, 헤집고, 뒤집어도.

여권은.      


끝내 없다.     


이젠 침착할 수 없다. 눈 앞이 흐려진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지금껏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어제까진 행복했는데, 오늘 아침은 갑자기 지옥으로 돌변한 기분이다.

안쪽에 내가 모르는 비밀 주머니라도 있는지 힘없이 뒤져본다.

없다. 그딴 게 있을 리 없다.    

 

아흑.

양손으로 머리칼을 쥐고 흔든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늘이 노래지고 주위가 캄캄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주저 앉고 싶다.

눈 앞에 지옥문이 보인다.

발밑에서 땅이 갈라지고, 그 어두운 심연 틈으로 지옥의 악마들이 기어나와 내 몸 위로 손을 휘감아 뻗쳐왔다.      

망연자실.     


집이나 회사에 놓고 온 게 틀림없는 걸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가정을 인정해야...

아닌데. 철두철미한 내가, 그것도 PM이 설마 여권을 안챙길리 없는데.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빈 껍데기가 된 캐리어에 흩어진 짐을 힘없이 도로 챙겼다. 아무렇게나.   

  

“이봐. 이대리.”

이미 티켓팅을 마친 일행들이 뒤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네, 네.”

혼이 빠진 채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어?”

다른 일행들 얼굴은 흐릿하다. 팀장님 매의 눈만 보인다.

비정한 성과 지상주의자이시고, 인정사정없는 냉혈한이시고, 프랑스 단두대 처형 집행자 기요틴이시다.

다음달이면 인사 고과철이다.

경영진 지시의 긴급 출장건이고.    

 

근데 여권이 없을 예정이다.

아주 쫄딱 망할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팀장님의 매의 눈을 보니 정신이 퍼뜩 든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된다.

난 재빨리 머리를 흔들었다. 어색하지 않게.

그리고 말했다.

“집에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이 와서 확인해보고 바로 뒤따르겠습니다. 먼저 게이트로 들어가십시오.”     


아버지는 새벽마다 산길 트레킹 5km를 매일 소화하고, 철봉대, 웨스트 회전판, 다리찢기, 아령 들기, 푸샵, 건강 헬스 기구를 한순배 돌고, 약수터 물까지 떠오는 매우 건강한 분이시다.

시간을 벌기 위한 거짓말을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했다.     


“이대리.”

“네.”

팀장님 눈이 빛났다. 어설픈 거짓말에 속지 않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아버지가 방금 쓰러진 아들의 어두운 얼굴을 한다.

그랬더니.     

“괜찮은 거지.”

역시.

“그럼요.”


설득력을 보태기 위해 나는 전화하는 연기까지 보탠다.

화룡점정이다.     


“아버님이 대체 어떻게 되셨다고요, 어머님!...” 하고.

물론 반대편에선.

“뭐 이 자식아. 내가 왜 니 엄마야. 아빠지!”


아무것도 모르는 팀장님과 일행은 출국심사장으로 갔다.

“알겠습니다. 급하게 되었군요. 끊습니다! 어머님!”

“아빠래두!”     


시간이 흘렀다. 8시 10분이 되었다.

어디선가 태평하게 아침 뉴스가 들려오고 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이런 판국에 무슨 방법이 있겠나, 다시 찾아봐야지.     


나는 다시 캐리어의 배를 가르고 안에 든 짐을 모조리 꺼낸다.

이것도 꺼내고, 저것도 꺼내고, 여권이 나올 때까지 꺼낸다.

없어도 꺼낸다.

나올 때까지 꺼낸다.     


“여권아, 어디 있어. 여기 있어야 해. 없으면 안돼! 없으면 만들어 내라고, 이 캐리어야! 이 캐리어 @#$, 이 자식아!”     


정신이 나갔다. 혼이 나갔다. 캐리어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아무 죄없는 빈 캐리어를 흔들어도 여권은 떨어지지 않는다.

주위는 쑥대밭이고, 난장판이 된다.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쑤근쑤근댄다.     


풀썩 주저앉는다.

고개를 푹 숙인다.

여권은 여기에 없다.

그게 사실이고, 인정해야한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남의 사정 같은 것은 봐주지 않는다.      


이대로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도 할 수 없다.

기다리는 건 정말 구천지옥뿐.     


“팀장님, 먼저 일본 가세요. 전 여권 찾아서 내일 갈께요. 쫌 늦으면 모레.”

라고 말했다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다.     


“아버지가 아니라, 큰아버지 백부께서 쓰러지셔서, 코마 상태로... 흑흑흑.”

그건 일전에 이미 써먹었고.     


“뭐, 여권 따위 안가져왔는데, 그러지 말고 공항 형님들, 비행기좀 탑시다. 그게 뭐라고.”

무대포로 가면 공항 보안대에 잡혀 질질 끌려가겠지.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별 미친 놈 보듯 했다.

그래, 나는 미쳤다. 아마도.     


그때 옆의 대화가 우연히 귀로 전해져왔다. 듣고싶어 들은 게 아니다.

“이봐 양복 안주머니에 담배같은 거 넣지 마.”

“왜요?”

“냄새 배기잖아. 어차피 비행기 타면 피지도 못할 거. 가방에 옮겨 넣어.”

“출국장 안에도 흡연실 있는데. 투덜투덜.”     


양복 안주머니?

혹시.

아니다.

양복이라면 당연히 새벽에 입을 때 챙겼을 텐데 모를 리 없다.

그래도 혹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는데.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뭉툭.     


어, 작은 수첩 같은 게 만져졌다.

그걸 집어서 꺼내니 빼꼼히 얼굴을 보이는 것.     


여권.     


어째서?

난 양복에 여권을 챙겨 넣은 기억이 없는데.

내 것이 맞나?

맞다.

다른 사람 여권을 내 안주머니에 넣고 있을 리는 없을 거고.     


생각해보니, 이 비즈니스 정장은 한 달 전 일본 출장 때 입고 간 동일한 양복이다.

그때 출장에서 돌아와 여권이 든 정장을 옷장에 넣어두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는 캐주얼한 정장으로 출퇴근했고.  

그런데 이번에 다시 디자이너를 만난다고해서 비즈니스 정장을 꺼내입었던 것이다.  

    

난 여권을 부둥켜안고 꺼이 꺼이 울었다.

“넌, 대체 어디 가있었던 거니. 얘야.”  

   

“꺼이 꺼이, 엉엉엉, 꺼이 꺼이, 엉엉엉.”     


여권과 나, 그리고 캐리어는 함께 부둥켜 안고.

울었다.

공항이 떠나갈 듯이 대성통곡으로 울었다.     


“하마터면 지옥에 갈 뻔했잖아. 우리 앞으로 절대 헤어지지 말자고. 엉엉엉, 꺼이 꺼이, 엉엉엉.”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합니다. 참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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