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입대 한달 전, 나는 외삼촌 집에 놀러갔다가 하드 커버에 구백 페이지도 넘는 두껍고 기이한 책을 만나게 된다.
제목은 가정 종합 대백과.
부제는 ‘뭐든 물어보세요.’
심심하던 차에 그 책을 팔랑팔랑 넘겨보다가 우연히 운명편, 손금과 관상을 만나게 되었다.
“이런 것도 있네.” 하며.
처음엔 신기해하다가 내용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 어느 시점에선 책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군에 입대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말이다.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 배치후 서너달 지났나, 내무반에서 김상병이라는 고참에게 손금을 봐준 적이 있다.
하도 여자를 소개시켜달라며 집요하게 달라붙길래 대체용으로 봐준 거다.
전문성은 일도 없었다. 당연하겠죠.
외삼촌 집에서 본 가정종합대백과 운명편 561쪽부터 593쪽의 절반을, 그것도 언뜻 본 걸 기억해내어 몇마디 해준 거다.
듣는 사람도 미심쩍으니까, “이거 진짜 맞는 거지? 그런 거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 몇 번씩 되묻기도 하고, 나중엔 날 사기꾼 보듯 했다.
그러자니 내 쪽에서도 기분이 상했다.
일 것 봐줬더니, 이 양반이.
“맞다니까요. 먼 당숙 할아버지의 유품중 저명한 수상학, 관상학 저서가 있는데, 어린 시절에 만화책같은 건 일절 보지않고, 그 저서를 탐독했다니까요.”
뻥이다. 어린 시절 나는 만화책을 천권도 넘게 봤다.
학교 파하면 방바닥에 뒹굴며 보고, 어린 동생 돌보라면 이게 기회다 하고 보고, 밥상머리에서 보다가 뒈지게 맞고, 등하교에 만화책 보면서 걸어가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도 보았다.
어쨌든 만화책 쪽은 그렇다고 하고.
그런데 얼마뒤였다.
일파만파가 되었다.
내 소문이 내무반에 좌악 퍼졌던 거다.
그 김상병이 “쟤가 손금, 관상을 보는데 정말 기가 막히다니까요.” 라고 신나게 말하고 다녔던 거다.
믿지도 않더니, 겉과 속이 달랐고, 빅마우스였다.
그러던 어느날이다.
“이김정 일병, 잠깐만 볼까.”
한 사내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서슬이 퍼런 내무반 군기병장이었다. 사회에서 어린 시절부터 줄곧 권투를 하셨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쫄려 죽는다는 표현을 써도 되는 분이다.
“니가 그렇게 손금하고 관상을 잘 본다며.”
목소리를 까셨다.
우드득 하고 이 갈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요컨대 뭐댔다.
이제부터 말 잘해야 한다.
“아, 아닙니다. 잘 못봅니다.”
이런 건 애시당초 꼬리를 잘라야 한다.
‘김상병님은 왜 떠벌려가지고서리.’
한동안 매의 눈으로 나를 꼬나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김상병에게 뻥을 친 거네.”
헉, 얘기가 그렇게 되나.
그럼 나는 고참에게 뻥친, 죄질이 극악인 쫄병이 되는 거고.
숨이 턱 막혀왔다.
그런데.
돌연 그는 권투로 다져진 주먹으로 내 가슴을 톡톡 쳤다.
가볍게 친 것 같은데.
내 몸이 휘청휘청.
“컥컥, 아닙니다. 컥, 컥.”
“아니라고. 뭐가 아닌데.”
주먹이 멈췄다. 간신히 살았다.
“뻥이 아닙니다.”
“그럼, 내꺼 볼 수 있겠네.”
내 꺼라면.
그의 입가에 묘한 실소가 퍼졌다.
“병장님꺼 말씀입니까.”
“그래. 내꺼. 만약 말이다. 내꺼 못보면, 어떻게 될까.”
“......?”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요.
“처음엔 못본다고 했다가, 그 다음엔 뻥이 아니라고 했다가, 알고보니 고참한테 사기나 치는 새끼였던 거지. 그것도 자대배치 받은지 채 삼개월도 안된 놈이. 간땡이가 부어도 유분수지. 그렇게 되면, 여기서 니 발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
물론, 걸어나갈 수는 없겠죠.
“고참 희롱죄로 뒈지는 거지.”
꺼억.
설상가상.
사면초가.
뒷산에서 내려온 굶주린 호랑이에게 방금 나는 물린 거다.
허나.
옛말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에잇! 그래, 해보지, 뭐. 까짓것.
당신은 호상이요 하고, 덕담 몇마디 하면 되는 거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호홉!”
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할 수 있다.
“준비됐냐.”
“넵!”
“그럼 좋아, 우선, 내 과거부터 함 말해봐라. 손금이나 관상에 그런 것도 다 나오는 거잖아. 안그래. 못맞추면 알지. 뒈지는 거야. 흐흐흐.”
허걱.
망연자실.
생각지도 못한 전개다.
과거라니.
내가 당신의 과거를 어떻게 아냐고요.
행복주민센터 주민등록초본 발급 주무관도 아닌데.
그때 내가 처한 절체절명의 현실.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지만, 그땐 서슬 퍼런 추상같은 군기병장 앞이었다.
나는 손발을 덜덜 떨어가며, 가정종합대백과 운명편, 561쪽부터 593쪽의 절반도 보지 못한 기억을 쥐어짜내야만 했다. 혹시 과거를 볼 수 있는 내용이 있었던지 하고.
그게 어디 있었더라.
그의 곰 발바닥 같은 손을 폈다.
덜덜덜 하고.
“춥냐. 지금 겨울이야. 왜 이리 떨어!”
코 앞에선 불호령에, 일이 이렇게 되니, 책 내용이고 뭐고 도무지 생각이 안난다.
이럴줄 알았으면 정독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과거를 보는 법이 필시 있었을텐데.
그래도, 정신만 차리자.
다른 건 모르겠다.
보이는 대로만 말하자고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병장님.”
“응, 그래. 어디 읊조려봐.”
“병장님은 많은 형제 중에 유독 외로우셨습니다.”
“오호. 그래. 재밌는데.”
“병장님의 그런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마음 고생이 참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몸이 너무 유약해서 힘들었겠군요.”
(여기까지, 갑자기 제 말이 무슨 말인가 하실텐데요, 방금 위의 점괘를 쉽게 해석한다면 이렇습니다 : 그 당시 세대의 왠만한 사람들은 형제가 많았다. 형제가 많으면 의외로 외로운 법이다. 형제가 없어도 외롭고. 고로 사람은 외롭다. 뭔소리냐고? 나도 모른다, 절체절명이니까, 묻지마라. 그리고 권투를 했다는 건 반대로 몸이 유약해서 그런 거고.)
“병장님 집은 그리 유복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근데, 가세가 기울어지셨군요. 아이고야.”
(점괘 해석 : 먹고 살기 바쁜 시절, 어느 부모가 권투 도장에 나가라고 돈을 줬겠나. 먹고살만 했겠지. 근데 입대전까지 복싱을 계속 하셨다라. 뭔가 나름의 고충이 있는 거지. 그게 가세 라고 하는 거고. 집은 멀쩡한데 라고 하면, 당신의 심상 속 가세라고 하면 되는 거고.)
“거기다 병장님 바깥엔 적이 많았습니다. 군대를 제대하면 그 적이 기다릴 거고요. 앞으로 몸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도 어딘가 아프신 곳이 계시죠. 몸을 잘 관리하셔야 합니다.”
(점괘 해석 : 권투를 했으니 처싸운 놈이 많아서 적이 많을 거고. 연습이나 시합으로 어디 한군데 아픈데 없다면 거짓말이다. 몸 관리 잘 하라는 말은 감성적 덕담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