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김정 Oct 23. 2024

죽기로 예정된 내 운명을 바꾼 것




사실 전 25살이 되기 전에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농담 아닙니다.

당시는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렇게 중년의 나이가 됐습니다.  

뭘까요.

그 운명이란 것이 깨끗하게 빗나간 거겠죠.

헌데 빗나갔다고 한다면 말이죠, 그냥 빗나간 걸까요. 아무 일도 없이요?


그런 건 없습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엔 특별하다면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거죠.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 말이죠.

아니면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 같은 것이 따랐을 수도 있고요.     


그 기막힌 사연을 시작해보겠습니다.    

      



난 미신을 잘 믿는다. (‘저를 제발 미워해주세요’ 라는 글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실 겁니다)

숫자로 말하면 4자와 6자, 13자는 될 수 있는 한 피한다.

굳이 택할 이유는 없다는 신조다.

오늘의 운세도 자꾸 마음에 남는다.

실제로 그렇게 이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신년의 토정비결은 필수고, 일이 안풀리면 용한 할머니에게 점을 치러간 적도 있다.

간밤에 이상한 꿈을 꿀라치면 해몽을 꼭 찾아보고.     


“이햐. 이거 큰일인데. 재산에 큰 손실을 본대.”

“이김정, 너 거지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런데 이다.     


내 수명이 25살을 넘기지 못할 운명이라고 예언한 분이 계셨던 거다.

25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는 거다.     


이런 냉혹한 말을 한 사람은 누굴까.

어느 도사였다.     


도사라고 하면 이렇게 상상할 거다.

하얀 도복에 감태나무 지팡이를 든, 백발 할아버지.

근데 아니었다.

20대 후반에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은 청년이었다.     


무슨 교단에 종사하고 계신다고 했는데 까먹었다.

아무튼 자신은 그 교단에서 도사 라고 했다.

옆에 붙어 있던 동료들도 “넵, 도사님.” 하고 꼬박꼬박 복창했으니, 그런 거로 한다.        


어쨌든 종로 뒷골목에서 우연히 만나 그 도사 일행들과 논쟁이 붙게 되었다.

니 사상은 다 틀리고, 내 사상은 다 맞아 하는 식이다.     


그분의 요지는 이랬다. 자신이 섬기는 교단의 도가 지혜고, 진리고, 우주다, 였다.

그렇단 말이죠.

해서 난 사르트르, 칸트, 헤겔, 마르크스, 하이데거, 쇼펜하우워, 비트겐슈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이재봉 등등 이름 있다 싶은 철학자는 죄다 꺼내놓았다. (이재봉은 아버지인데 눈치 못채게 끼워넣어봤다.)      

여튼 쇼미더머니 랩배틀 같은 거로 보면 된다.

지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이거다.    

 

그런 논쟁의 말미 즈음이다. 말싸움에서 살짝 밀린 도사 양반이 갑자기 초집중하더니 눈을 반쯤 감고,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뭐하는 거요?”

“니 운명 본다. 말 걸지마.”

도사가 다시 눈을 떴다.

“당신 말이야. 그거 알아.”

“그거,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넌 25살이 되기 전에 죽을 운명이야.”

“허걱.”     


이거였다.     


물론.

말싸움 끝에 나온, 홧김에 한 말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넘겨버릴 수 있다.

별 말 아닌 거라고. 가비지 라고. 스팸이라고.


그런데 그게 또 그렇지 않다.

흘려버렸다 생각하면, 부지불식간에 주머니 속 송곳처럼 삐쭉 하고 튀어나오는 거다.  

   

사람이 죽는다는데, 25살을 못넘긴다는데, 그게 그냥 넘어갈 말은 아니지 않을까요.

아무리 홧김에 했더라도, 어느 교단에 도사라는데.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돌아다녀도 도사는 도사죠.     


게다가 난 미신이라면 굉장히 진지해지는 인간이기도 했다.

마지막에 헤어질 때 보았던 도사의 의미심장한 눈빛도 생생히 기억하고.

“그때 가서 보자고.” 하던 매서운 눈빛 말이다.     

 

당시 내 나이 20살이었다. 사실 25살은 아직 먼 미래이다.

헌데 중간에 군대를 갔다오고 복학하니 거짓말처럼 24살이 되어있었다.     


촉박해진 거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날짜가 다가올수록 자꾸 그 일이 떠오르고, 초조해졌다.

잠꼬대도 하고, 악몽도 꾸었다.     


“넌 25살을 못넘긴대도!”

도사가 꿈 속까지 등장한다.

그럼 난 이렇게 애걸복걸 해본다.

“전 아직 미혼이고, 드래곤볼 인조인간 셀 최종편을 아직 못봤고, 월드컵 최종 예선 결과까지는 꼭 봐야 하고, 한국시리즈에 한화가 우승하는 것도 좀 보면 좋겠고, HOT 멤버 모두 결혼하고 애 낳고 공처가로 사는 것도 보고 싶고, 그리고 또, 아이고, 도사님 살려주세요.”     


부적을 써볼까도 생각해봤다. 굿은 좀 그렇고.(내 돈이 들어갈까봐)

해서 아버지께 이런 제안도 넌지시 건네본다.

“아버님. 큰아버님께 말씀드려서 할아버지 묘를 이장하시는 게 어떨까요. 지금은 청룡의 동쪽으로 나무목에 대응하니 가문이 성장은 하겠으나 잃을 것이 많으오니, 북쪽, 현무에 물의 보호를 받아 백세 장수할 수 있는 임진강 판문점...”

“임진강 판문점?”

“판문점 휴전선 너머로 이장을. 일단 제가 살고봐야겠습니다. 아버님!”

“이 우라질 놈이! ”     


그러던 와중에 내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바로 운명의 그 일이다.     




25살까지 백일도 안남은 날이었다.

달력에 엑스 표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안다.

정말 이제 얼마남지 않았구나 하고.

마지막 잎새처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그 예언이 이뤄진다면...     


그러던 때, 후배와 단 둘이 술을 마시게 됐던 거다.


1학년인가, 2학년 정도. 새까만 후배다.

남자 후배고. 키도 185를 훌쩍, 바벨 무게도 너끈히 치고, 게다가 훈남이다.

난 복학생에, 180은 택도 없고, 턱걸이 0.5개 하고, 꾀죄죄한 늙탱이다.

요컨대 우린 단 둘이 술을 마실만한 조합이 아니다. 누가 봐도.      


게다가 그애는 나 같은 선배에게 술 마시자고 할 이유도 없다. “시간 있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왜 굳이 내게.


헌데 조금 늦은 시간에, 과방에 있던 나를 찾아와 “술 한잔 안드실래요, 선배님” 하질 않나.


믿을 수가 없어서, 여친과 헤어졌냐 했더니, 그건 아니란다.

도서관에 있던 중, 술이 갑자기 마시고 싶어졌고, 과방에 와보니 선배님 뿐이란다. 함께 가주면 안되겠냐는 거다.      


“나 이거 참 어쩌나, 바쁜데.”

하고 미온적인 답을 전한다. 폼나게.

여기서 넙죽 “그럼 당연히 가야지. 이렇게 잘 생기고 인기 많으신 젊은 후배님과 제가 언제 한번 술을 마셔보겠습니까요, 헤헤.” 하고 실실 웃으며 따라나서면 사람이 얼마나 없어보이겠는가.     


그랬더니.

“바쁘시나봐요. 그럼 안되겠네요. 다른 분을 찾아봐야...”

“이보게나. 바쁜데, 그렇지만, 시간을 내겠다는 얘기겄지.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보소.”     


“고맙습니다. 제가 가자고 했으니 술값은 제가 낼게요. 선배님.”

“됐다. 그 돈 넣어둬라. 선배를 뭐로 보고.”

한번 사양은 필수다. 그렇다고 알겠습니다, 선배가 사세요 하지는 않을 거니까.

이것도 길고 긴 대학생활의 경륜에서 나오는 전략이다. 술도 얻어먹고, 이 한마디로 선배 위엄도 서는 게 아니겠는가. 이걸 두고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하는 거다.     


“선배님이 사주신다고요. 감사합니다.”

“......어? 어.”     


적립 포인트 쌓아둔 술집으로 이끌었다.

“숨겨둔 맛집이 있걸랑.”

돼지 껍데기 최하품을 파는 집이다.     


아무튼 함께 술을 마시며, 주로 내가 얘기했다. 내가 사는 거니까.

그는 묵묵히 들어주었고.


학교 생활의 고난과 역경에 대해 얘기해주고(술 마신 다음날 첫시간 강의에 대리출석 팁 같은 거).

군대 얘기도 해주고.(소말리아 해적 퇴치 무적 함대 파병 갈 뻔 했던 썰)

“선배님, 공군 아니셨나요?”

“사장님! 여기 소주 댓병 주세요. 짝은 건 깔짝거려서 영 못마시겠네. 싸나이는 댓병이지. 받으시오.”

화제를 돌리고(말을 돌리고).


실존주의, 일본 선불교, 후기 구조주의, 절대 검증할 수 없을 것 같은 얘기로 막 질러댔다.

거기다 자크 라캉, 들뢰즈, 촘스키, 데리다, 가타리, 바르뜨까지 내오면 금상첨화다.

(다시 이름을 대라면 못댄다. 나도 모르는 이름이니까.)     


분위기가 무르익자, 지덕체 라고 했나, 무술 얘기로 건너간다.

바쁘다.     


뭐 이거, 나, 너무 다재다능한 거 아닐까.

이런 사람 어디 섭외 안하나 몰라.     


“정말 무술을 배우셨어요?”

“고럼. 아뵤! 아삐요. 어후! 빠샤!”

안휘성 남궁세가의 호신강기의 일초식을 보여주었다.

갈고, 닦고, 내 몸을 불태우며, 정신일도 하사불성으로 배운 것이다.

무협소설에서.      


아무튼 그러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중간에 주인아저씨가 안주를 내오다가 내 바지에 조금 흘려서 미안하다며 서비스 안주까지 주셨다.

적립포인트로 먹을 건데 괜찮을래나 싶은데, 어떻게 되겠지 뭐.

신나서 또 술을 안시킬 수 없다.

부어라, 마셔라.

술이라면 나도 세지만, 후배도 만만치 않았다.

이거 숨은 강자다.

키 크고, 잘 생기고, 술까지 세면 어쩌자는 건지.


“노래방 갈까?” 혹시나 하고 묻는다.

“선배님 얘기가 더 재밌습니다. 계속 하시죠.”

뒤늦게 부처가 염화미소표 제자 카샤파를 만난 격이고, 공자가 애제자 안희를 만난 격이다.

오래 살고 볼 일일세. 물론 세달후면 죽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덕분에 지하철 막차도 끊겼다.

이왕 늦은 김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야기 꽃을 더 피웠다.

후배는 여전히 묵묵히 듣고.     


이런 후배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근데 이런 후배가 나를 궁지로, 아니 사지로 몰고갈지는 꿈에도 생각못했다.   

  

고로 이 얘기의 클라이막스 다 왔다.     



    

그렇게 밤 2시인가, 3시즈음 되어 일어섰다.

한창 떠들던 내 입이 아파서다.

그럴 만도 하겠죠.      


우리는 일단 과방으로 발걸음을 총총총 옮겼다.

밤이 깊어 대학교 주변이지만 인적이 드물었다.

과방에서 지하철 첫차때까지 자면 되지 뭐, 하고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걸어갔다.     


그때였다.     


“어이, 이봐.”

한밤중 어둠 속에서 한무리의 사내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괴한들인가.     


눈을 재빨리 돌렸다.

무리의 숫자는 모두 여덟명이 넘으려나.

우리를 순식간에 사방으로 둘러쌌다.

다들 좀 마셨는지 술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인상도 험악하고, 문신도 언뜻 보이고, 눈빛도 살벌하다. 덩치도 있다. 차림새도 학생 같지는 않다.

한밤중에 갑자기 맞닥뜨리는 무리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험악한 세상이다 보니.     


종합해볼 때 이들은 괴한들이 맞다. 양아치이고.      


그때다.

“왜!”

옆에 후배가 반문을 했다.

반말로.     

어, 저 후배님.

저들을 자극하면 안되실 것 같은데요.     

후배는 저들을 양아치 역할을 밤새 연습하다가 돌아가는 연극영화과 학생들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나도 거들었다. 젠틀하게.

“이, 이보쇼들, 뭡니까요.”     


“어쭈, 왜? 왜에? 왜 라고 하셨어요.”

내 말은 안듣고 아까 후배 반말에 긁혔는지, 20대 초반의 양아치놈 하나가 건들건들 앞으로 나오며 말을 걸어왔다.

이거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당신들이 먼저 반말했잖아.”

후배가 지지 않고 말을 받았다.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안될텐데요. 후배님.


헌데 한편으로 보면.

얘가 이렇게 강단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하긴 큰 키며, 허우대며, 한두명 정도는 상대할만 하겠다 싶다.

난 0.5명 정도는 상대가 될 것 같고. 도합 최대 2.5명.

그럼 나머지 5.5명은 어떻게 되는 건가.

우리들을 막 때리겠지.     


고로 중과부적이란 얘기다.

이건 절대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다.

꼬랑지를 내려야 한다. 배도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몰매를.     


잠깐만.     


그때다.


내 머릿속을 총알처럼 관통하는 것이 있었다.     

이게 혹시 그것인가.


도사가 예언했던 바로 ‘내가 죽을 때를 말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거다.     


설마.     


그 짧은 시간에 머릿속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저리 불의를 참지 못하는 후배가 따박따박 말대꾸하다가 결국 이들과 한바탕 붙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럼 어쩔 수 없이 나도 붙어야 한다. 혼자 토낄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싸웠다고 치자.

얼마나 버틸까.


수적 열세로 우리는 금세 이들에게 마구잡이 폭행을 당할 것이다.

술까지 퍼마셨겠다, 이들의 시뻘건 눈에 뭐가 보이겠나.

게다가 저들은 여덟명. 한명씩 때려도 여덟 대다.

난 깐족거린다고 더 맞을 거고. 선배라고 후배 교육 잘못 시켰다고 또 맞을 거고.     

결국.


맞다 지쳐 길바닥에 쓰러지며 뇌진탕으로 가는 거 아닐까.     

나, 이런.


그렇다.

그렇게 되는 거였다.

시뮬레이션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일어날만한 일이다.  

   

그러고보니.

뭔가 과거의 일들이 실마리가 연결되는 것도 같다.     


이 얘기다.

절대 나와는 술 같은 거 마셔주지 않을 것 같은 이 훈남의 후배가 왜 오늘은 선뜻 먼저 찾아왔을까.

이건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리고 술집 주인 아저씨는 어째서 내 바지에 안주를 흘렸던 걸까.

덕분에 미안해서 서비스 안주를 내오게 되었고, 술을 더 마시게 되어 이렇게 늦지 않았나.

이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결국 막차를 놓치게 되어 이 늦은 밤에 과방으로 걸어가게 된 거고, 마침 이 시간에, 이 거리에서 막 이들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런 모든 게 과연 우연의 일치라고 또다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내 대답은.

아니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이건 마치 누군가 퍼즐처럼 교묘하게 연결한 무엇이라는 거다.

운명의 신이 짜놓은 실.

이란 거다.


갑자기 소름이 끼치고, 등으로 식은땀이 흐른다.    

 

이건 뭔가.

결국.

25살을 나는 못넘긴다, 이건가.


그게 오늘이고.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춘향이, 향단이 널뛰기처럼 팡팡 뛰었다.

"몽룡아, 나 잡아봐라."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던 거다.     

“넌 25살을 못넘길 거다. 음하하하.” 리바이스 도사가 웃어대는 얼굴이 떠오른다.     


절대 안될 일이지.

이건 말 그대로 비명횡사다.     


부적 어디 있었지.

아차차, 그게 과방에 두고온 책가방 속에 있다.     


불의를 참지못하는 옆에 후배는 이미 눈빛에서 이글이글 불이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젠장할.

얘는 왜 이리 못나서서 난리일까.


이건 막아야 한다.

기필코.

안그러면, 정말 그렇게 흘러가게 되고 말 거다.

나, 정말 이런.


해서 정신 차리고 상황을 살피니.


“그러셨어요. 그럼 존대말 써드리지. 요. 크악! 퉤!”

양아치가 가래침을 오지게 내뱉었다.

젠장할.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는 거다.

큰일났다.


“아이고, 우리 학생 형님들께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시발요.”

그러자 뒤에 무리들이 으허허 웃어댔다.

분위기 조졌다.


일촉즉발 그때다.

“좆밥은 가라!”

엉?

무리들 웃음이 뚝.

일순 정적.


지금 방금 이 말은?

누가 하신 거지요.

옆에 후배님이 하신 말이다.

누구에게?

바로 앞의 양아치에게.


이건 잠시 휴전하면서 대치중인 한나라, 초나라가 있었는데, 기습으로 화살 만발 쏜 격이다.

“메롱이다. 이놈들아 하고.”      


잠시 어리둥절하던 양아치는. 나도 그랬지만.

“방금 이 새끼가 뭐라 그랬냐.”

어이 없어 했다. 나도 그랬다.

후배님, 너, 미쳤구나.


“좆밥은 됐고. 여기 대빵 있을 거 아니야! 대빵 나와! 쯔깨다시 같은 좆밥 뒤에 숨지 말고!”

라고 말한건. 이젠 뭐, 제대로 미쳐가는 후배님 말씀이다.

아주 기름에 불을 붓네 부어. 불에 기름인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아놔, 이 무슨 미친 새끼가 다 있어.”

좆밥이라 불린 양아치가 주먹을 번쩍 들었다.


내 말이.

후배님! 정말, 이 미친 놈아. 정신좀 차려! 제발.

이건 그냥 끝내자는 거지.

니만 죽으면 되지, 왜 나까지 끌고 들어가냐고.

이 불의도 못참는 미친 후배야.

우린 여기서 다 죽는 거였어.

젠장할. 젠장할.


짧은 순간에 내가 왜 얘하고 술을 마셨을까 절실히 후회했다.

훈남이라고 칠칠맞게 좋아라 따라나섰다니.

여기가 바로 내 무덤 자리였구나 싶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묘를 이장하자니까.    

 

“막둥아. 빠져라!”

막둥아?

이건 누구 목소리?

미친 후배는 아닌데.


뉘신지.


주먹 쥐고, 씩씩거리는 양아치를 옆으로 밀쳐내고.

한 사내가 어둠 속에서 두둥 나타났다.


“그래 대빵 나왔다.”

이마에 흉터가 있는 흉악한 인상의 사내가 눈을 빛내며 후배 앞에 섰다.

덩치나, 가오나, 분위기 모두.

대빵 맞다.     

결국 사단을 벌였구나.


“당신이 정말 대빵이요?”

후배가 물었다.

그걸 왜 물어. 보면 몰라. 이 미친 후배야.

    

“그렇다. 내가 대빵이다. 신분증으로 보여줄 수도 없고.”

“그럼 우리 대빵하고 얘기해 보시오.”

우리 대빵?

잠깐만.

그런 게 있었나?


“누구?” 저쪽 대빵이 물었다.

그러게.

“남궁세가 선배님. 말씀하시죠.”

후배가 나를 보았다.     


허억.

저요?

저 말씀입니까요.

이 후배, 정말 미쳤구나.

   

이제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니가 대빵이냐?” 저쪽 대빵이 물었다.


물었으니 답을 하자.

“그게, 그렇겠죠. 그런가?”

“기야, 아니야.”

그러게요. 저도 답답합니다요.


“네, 네. 그런가 봅니다.”     

미친 후배를 다시 보니.

어서 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다.


아니, 뭘 어서야. 보자보자하니.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대빵끼리 상견례라도 하라는 거야

"아이고 새벽 3시에 만나뵈서 영광입니다. 이바지음식하고 혼수는 생략하시고..."

나참.


일단 생각좀 했다.

이걸 어떻게 할지.

음.

"......"

에라 모르겠다.


저쪽 대빵이 짝다리로 기다리고 있다.    

나는 눈치를 살살 보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잘 모르면 질문이라도 제대로 해보자는 심정으로.


“대, 대빵님.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돈좀 있냐.”

그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그렇다. 돈이다. 돈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늦게까지 어디선가 술을 퍼마시고 집에 가려는 참인데, 택시비가 없는 거다.

남은 돈까지 탈탈 털어 술을 마신 거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삥을 뜯는 거다.     


“그게 돈이.”

어쩌고저쩌고.     


미적대는 나를 보고 답답했던지, 눈빛이 타오르는 미친 후배가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선배님. 그거요. 펼치시죠.”

“뭐?”

“호신...”

“아, 아.”

아까 술자리에서 말한 남궁세가 호신강기를 말한다.     

정말 나는 미친 후배를 둔 게 맞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미쳐보지.


“그럼, 그럴까. 후배님 좀 떨어져 있어보세요.”

어쨌든 활활 타오르는 이 미친 얘좀 어떻게 해봐야 할 것 같다.

이러다 다 죽을 수도 있다.   

  

“네?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안괜찮지, 니같으면 괜찮겠니.

근데 니가 여기서 제일 문제야.

저기 멀찍이 떨어져있어. 아주 머얼리.

“날 뭘로 알고. 호신강기다. 무술의 세계는 깊고 영묘한 법. 아는가.”

입만 살아있는 나는 이렇게 지껄이고 있고.

“죄송합니다 선배님.”

꾸벅.     


후배님은 멀찍이 떨어졌다.

됐다.

미친 쟤는 좀 떨어뜨려야 안심이 될 것 같다.

그냥 걸어다니는 폭탄이다.  


우리들 하는 걸 보던 대빵이 물었다.

“너네들 뭐라는 거냐.”     

나도 묻고 싶다. 우리가 지금 뭐하는 건지.


나는 대빵 앞으로 조금더 다가갔다.

“뭐야, 왜 다가오는 거야?”     


대빵형님,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난 망설임없이 호신강기를 펼쳤다.

그러니까 지갑을 좌악 펼쳤다.

“여기, 돈 많습니다. 아낌없이 쓰십시오. 대빵님.”

있는 돈, 없는 돈 다 꺼냈다.     


무협에서 호신강기란 몸 주위에 강기의 방어벽을 치는 일종의 호신술이다.

강기가 꼭 무공의 기만 될 이유는 없겠죠.

내 강기는 곧 돈이란 얘기다.     


액수는 모두 5만 6천원.

네명씩 택시 두 대 나눠 타고, 심야 할증 붙어도 서울 어느 지역이든 갈 수 있는 액수다.

용인 에버랜드 가는 거면 모를까.  

   

그들도 돈을 세어보니 액수가 모자라지도 많지도 않은 거다.

그렇지만, 애매 모호한 표정이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고, 간도 딱 맞는 것 같은데, 이건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들이란 거지.

택시 세대로 나눠 타면 살짝 모자라는 정도니까.   

  

그럼, 이것들아, 달걀 후라이라도 하나 부쳐주랴.  

   

“혹시 이것도 원하시면.”

신고 있던 달걀 후라이, 아니 운동화를 벗어주었다.


영화 같은 데에 보면 이런 애들은 좋은 운동화로 바꿔 신고하지 않나.

운동화에 대한 애착들이 있던데.


그랬더니.     

“아니, 그건 됐어. 우리께 더 좋아.”

브랜드를 따졌다.


“알았다. 고맙다. 가자.”

대빵이 시원히 답했다.

겉보기보다 쿨하고, 최소한의 분별은 있는 것 같다.

아까 막둥이가 아직 시원치 않은 표정이다.

“형님들, 그래도.”

“됐어. 가자. 돈 받았잖아.”     


“안녕히 가십시오. 대빵님.”     

어둠 속으로 그들은 금세 사라졌다.   

  

난 후배를 눈으로 찾았다.

저 멀찍이 서있다.

후배는 창피한지 얼굴도 못든다.

불의에 참지못하는 사내.

눈빛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사내.

그리고 미친 후배.

그에게 흑역사를 선사한 셈이지만.


그러나 어쩌겄나.

다 살자고 하는 짓이지.     


5만6천원으로 그렇게 난 25살이라는 나이를 무사히 넘겼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카하.


그날밤 오랜만에 두발 뻗고 잤다.




(후일담이겠죠, 아마, 이 부분은 상상일 수도 아닐 수도.)     


그 일이 있은지 얼마후 뜬금없이 그 후배가 나를 찾아왔다.     


“그날 말입니다.”

으헉 미친 후배다.


“그날?”

“양아치들 나타난 날, 밤이요.”

“아, 아.”

“실은 그날 선배님이 은인이셨습니다.”

“뭐라고?”

이건 또 뭔 소리야.


후배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저희 어머님이 타로점을 보시는데, 그날 제게 중대한 은인이 나타난다고 꼭 찾아보라고 하셨거든요. 처음엔 무슨 은인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제 목숨을 구한 게 아닌가 싶어요. 이렇게 감사 인사드리려고요.”

너도 점봤구나.유행인가.


“그런 일이 있었어. 아, 그랬구나.”

“술 사달라고 선배님을 찾아간 것도 그런 이유였죠.”

“내가 너의 은인이라는 걸 미리 안 거네.”

사람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아니요.”

후배는 머리를 흔들었다.     

엥?


“그럼?”

“말해도 되나요.”

“말해봐.”

후배는 주저했다. 무슨 큰 비밀이 있는 듯 했다.

그러니 더 알고 싶었다.


“어서 말해봐. 무슨 말이든 상관없으니까. 난 의외로 마음이 넓거든.”    

 

“그 은인이란 게 말이에요. 실은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제 주위에 말이 많고, 바보 멍충이 같은 사람이 될 거라고 하셨거든요. 그게 은인이 될 거라고. 제 주변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선배님 밖에는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맞지 뭡니까. 술 드실 때 정말 말도 많이 하시고, 바...죄송합니다. 여기까지만.”


“아, 그러니까. 내가 그런 타입의 은인이 되는 거네...”     


하참.


목숨은 건졌는데, 이게 기쁜 일인지, 슬퍼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말이 많고, 바보 멍충이면 어떻냐. 살고 보자. 결국 오래 산 놈이 장땡이지요.

살면서 고쳐살면 되는 거고요.

저는 이 입을 좀 어떻게 해봐야겠는데요.


그나저나 HOT 분들은 잘 살고 계시나요. 잘 사세요. 모두들. 공처가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