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약적인 기술의 발전이나 아이디어는 사실은 게으른(?) 사람들에게서 나온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더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이들이 결국엔 기술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것.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사는 적응력 좋은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큰 변화를 만들기보다는 시스템의 일원으로 충실히 살아가게 된다.
나도 만약 엄청난 인싸에 한국사회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다면 밖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학창 시절부터 한국사회의 소위 주류라고 하는 것들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고, 몇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다 그러다 죽는(급 빠른 전개...) 그런 전형적인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학생 때 제일 싫어했던 선생님 유형은 "왜 그런 거예요?"라는 질문을 하면 "원래 그런 거야. 그냥 외워."라고 하던 타입이었다.
이 세상에 원래 그런 게 어디 있나. 어떤 법도, 규칙도, 문화도 모두 애초에 생겨난 배경이 있고,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니만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한국에서 '당연한 것'들이 다른 나라에선 전혀 당연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느새 클리셰가 되어버린 말이지만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원래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고, 원래 그 나이엔 그렇게 해야 하는 거라는 것. 나에겐 전혀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서울에서 그 최악의 첫 직장을 경험하고 난 후, 내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난 역시 해외에서 일해보고 싶다.
그리고 신촌의 그 자취방에서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으로 열심히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해외취업', '해외취업 후기', '해외취업 성공'과 같은 키워드로 검색해서 나오는 글들은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그리고 그런 후기들을 읽으며 어느샌가 나도 해외에서 영어를 쓰면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일을 하고 있는 멋진 커리어우먼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홍콩에서 일을 하고 계신 한 블로거 분의 글을 읽게 되었고 처음으로 홍콩이란 나라에 관심이 생겼다.
검색을 해보니 광둥어를 쓰기는 해도 영어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고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다문화를 경험하기 좋아 보였다. 게다가 다국적 기업이 많아 어쩌면 취업을 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홍콩의 구직사이트에서 'Korean', 'Korean speaking', 'Korean marketing'이란 검색어들로 포지션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포지션이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최소한 3~5년의 경력자를 원했다. 게다가 대부분은 뱅킹, 금융 쪽의 일이 많았는데 아무리 봐도 갓 졸업해 고작 6개월의 경력(이라고도 할 수 없는)밖에 없는 한국인으로서 노릴 수 있을만한 일은 없어 보였다. 스스로 생각하는 장점 중의 하나는 나 자신과 상황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태도인데, 이때 나는 '과연 내가 채용담당자라면 나 같은 외국인을 고용할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외국인을 뽑으면 비자도 지원해줘야 하고, 게다가 현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언어 능력 말고는 이렇다 할 특별한 기술도 없는데 말이다. 도통 나를 뽑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 나름의 분석을 내리고나니 잠시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원하는걸 내가 줄 수 있어야 했다. '어떻게 해야 외국인이라도, 비자를 지원해 주면서까지도 채용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그 질문을 하면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구직사이트를 구석구석 훑어보았다.
그러다 구인 포스팅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는 걸 발견했는데, 하나는 회사에서 직접 올린 채용공고와 마이클 페이지 Michael Page, 헤이스 Hays 등의 리쿠르팅 회사에서 대신해서 올린 채용공고였다. 어떤 포지션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그 리쿠르팅 회사의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내거나 웹사이트에 이력서를 업로드하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래서 웹사이트로 들어가 보니 이력서만 등록해두면 전 세계에 있는 지사에서 프로필과 맞는 포지션을 추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우리나라의 취업알선업체와는 달리 구직자는 전혀 비용을 낼 필요가 없었다. 매치시켜준 회사에서 보수를 받는 시스템이라고 하니 구직자로서는 전혀 손해 볼 부분이 없었다. 지금이야 대중적인 방식이 되었지만 당시 처음으로 리쿠르팅 회사라는 시스템을 발견했을 때의 그 환희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정말 유레카였다.
또 한 가지, 나는 한국인으로 한국인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어를 할 수 있으니 일본인들과 경쟁을 하는 편이 좀 더 승산이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들 중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일본인들은 한국인에 비하면 대체적으로 영어에 약하니, 나는 한국인 포지션이 아니라 일본인 포지션을 공략해보자고 말이다. 일본어도 되고 게다가 영어와 한국어를 플러스로 할 수 있다고 어필하며. (나름 신선한 발상의 전화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통한 셈이다).
일본 야후에서(일본은 여전히 야후가 메인 검색엔진이다) 리쿠르팅 회사를 검색하니 역시나 다양한 회사가 나왔고 그중에서도 JAC라는 곳이 특히 평판이 좋은 것 같았다. 전 세계 곳곳에 지사도 있었고 포지션도 다양하게 올라와있었다. 새로 일본어 이력서를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 조금 번거로웠지만 인터넷의 좋은 예시들을 참고해 꼼꼼히 작성해서 프로필을 등록하고는 홍콩의 한 포지션에 지원을 했다. 그런데 며칠 후 홍콩지사의 담당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야노 상이라는 분에게서 연락이 와서는 이력서를 잘 받았다며 한국인이 등록을 한건 처음 봤다고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홍콩은 나처럼 사회초년생으로 지원을 할 수 있는 포지션은 거의 없다고 하며 대신에 싱가포르는 어떻냐고 묻는 게 아닌가.
사실 2012년 당시만 해도 지금만큼 싱가포르가 대중적인 해외여행지도 아니었고, 해외취업으로 각광받는 곳도 아니었다. 나는 부끄럽지만 그저 동남아의 어느 한 국가 정도로만 알고 있던 상태라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고 하니 일본 여성들 사이에서는 깨끗하고 치안이 좋아 해외취업지로 인기가 많다고 했다. 영어가 공용어인 데다 한국과 일본인 커뮤니티가 발달해있고 홍콩처럼 다국적 기업이 많아 이직하기에도 좋을 거라며. 마침 일본어 스피킹 포지션 중에 네이티브가 아니어도 지원을 할 수 있는 포지션이 있는데 지원을 해보지 않겠냐고 하는 것이었다. 내 대답은 무조건 예스 앤 예스!! 였다.
그 포지션은 메리어트 그룹이 운영하는 리조트 멤버십 프로그램인 메리어트 베케이션 클럽 Marriott Vacation Club의 일본인 고객관리팀이었다. 고객들을 관리하는 고객센터의 아시아 퍼시픽 본사가 싱가포르에 있었는데 직원들은 고객들이 자신의 멤버십을 잘 활용해 휴가 계획을 짤 수 있도록 상담도 해주고, 이메일과 전화로 예약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이력서가 통과되고 난 후에는 일본어와 영어로 상담이 가능한지, 격식 있는 이메일을 쓸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시험이 있었다. 두 언어 모두 회화는 가능했지만 '비즈니스 레벨'이라는 말에 왠지 긴장이 됐다. 하지만 다행히도 필기와 전화 인터뷰 모두 무사히 통과했고 야노 상으로부터 매 과정마다 조언과 피드백을 받으며 최종 오퍼까지 받게 되었다.
나는 그저 구직자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이력서 준비 외에는 평소 실력대로 인터뷰를 본 것 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모두 야노 상이 알아서 처리해줬고, 심지어 입국하는 비행기 티켓과 입국해서 집을 구하기까지 2주 동안 회사 옆에 있는 메리어트의 계열 호텔인 칼튼 호텔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혜택도 받았다.
싱가포르로 입국하기 전 나는 여행 겸 홍콩을 방문해 비즈니스 중심가인 완차이에 위치한 JAC 홍콩 오피스에서 야노 상을 직접 만났다. 너무 감사했기에 꼭 직접 인사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아마도 처음으로 그렇게 엄청난 높이의 오피스 빌딩에 방문한 때였던 것 같다. 홍콩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풍경에 마음이 설렜다.
야노 상은 인상 좋은 아저씨(?) 였는데 이 일이 야노 상도 홍콩 오피스로 부임한 지 얼마 안돼 담당하게 된 포지션이라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가게 되었고 처음부터 모든 것이 수월하게 진행되어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야노 상은 내게 "지은 씨처럼 용기 있고 유능한 인재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라며 마지막까지 감동스러운 말로 용기를 주셨다.
그렇게 야노 상과의 만남을 끝내고 오피스를 나와 고층 빌딩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완차이의 육교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이제부터 시작될 나의 새로운 챕터에 가슴이 벅차올랐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상상만 하던 일들이 하나씩 현실로 이루어지는 그 짜릿한 기분. (인생에서 그런 가슴 벅찬 순간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는것이 목표이다!)
나는 마치 신난 강아지처럼 육교를 깡충깡충 뛰어가 반대편에 연결된 쇼핑몰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근사한 카페에 들어가 스스로에게 맛있는 점심을 사주며 이 역사적인 날을 축하했다.
지은아, 이제 진짜 시작이야.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