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대구 쥐, 도쿄로 상경하다

by 에리카

싱가포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일본과 일본어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커리어와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요소들이기 때문.


돌이켜보면 난 어릴 때부터 뭔가 남들과 똑같은 옷을 입거나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게 싫었었다. 뭔가를 좋아하다가도 그게 유행하기 시작하면 싫어지는 성격이었는데, 그래서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 '특별한 것'을 좋아했다. 그런 취향 덕분인지 자연스럽게 일본 패션에 관심이 생겼고 그걸 시작으로 일본 문화에 빠지기 시작했다. 일본 패션 잡지를 보면서 보수적인 분위기의 대구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유분방한 스타일을 하고 있는 일본인들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이 생겼던 것 같다.

정말 좋아했던 모델 요피

내가 중고등학생이었던 2000년대 초반에 니뽄삘(일본을 뜻하는 nippon과 feel의 합성어)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일본 스타일의 스타일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 '니뽄삘'이 좋았고 코디를 참고하기 위해서 일본 잡지를 모으는 것으로 시작해 많은 일본문화 덕후들이 그렇듯 드라마, 영화, 아이돌 등으로 점점 영역이 확장되어 갔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 때문에 방학 기간에는 앉은자리에서 드라마 시리즈를 하나 보기 시작하면 10편, 20편도 연달아 봤고,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 영화는 모조리 찾아서 다운받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하루 종일 듣는 생활이 계속됐다. MP3에는 시이나 링고, 케츠메이시, 패리스 매치, 캇툰, 아무로 나미에 등 다양한 장르의 제이팝이 가득했고 처음에는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던 가사들의 뜻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더욱더 재미를 느꼈다.

지금 봐도 너무 예쁜 나나

대학생이 되어서도 덕질은 계속되었고 좋아하던 만화 시리즈인 나나 NANA가 일본에서 원작이 나오고 나면 한국어판으로 번역되어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그 기간을 기다리는 게 싫어서 직접 원작을 사서 일한사전을 찾아가며 번역을 해보기 시작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궁금해서 하다 보니 저절로 공부가 됐던 것 같다. 만화책으로 시작한 번역이 소설책으로 넘어갔고, 하다 보니 원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뉘앙스를 알 수 있는 점이 좋았다. 시중에 나온 번역본과 비교해보면서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조금씩 일본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 때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의 힘을 알았던 것 같다.


사실 대학에서 내가 원하는 학과보다는 국립대라는 조건에 맞춰서 선택한 전공은 내 적성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공부가 재미없다 보니 언제나 마음은 붕 떠있었다. 수업도 빠지기 일쑤였고 과 생활에도 별로 참여하지 않았고, 1학년 1학기에는 F가 뜬 성적표로 학사경고를 받았다. 그렇게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던 때, 우연히 학교에서 운영하는 부설 어학당이 있다는 걸 알고는 좋아하는 일본어를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에 아침 수업으로 등록을 했다. 마침 선생님도 좋은 분이었고, 그전까지는 소위 야매로 알던 일본어를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그 갭을 채워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이왕 하는 것, 제대로 정말 잘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살면서 무언가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내가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일본어였다. 그래서 꼭 일본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도쿄로 가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본격적으로 어학원은 어디로 갈지, 집은 어느 지역으로 정할지 등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말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보다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몇 개의 리스트를 추려서 각각의 비용과 장단점을 비교한 표를 A4용지 한 장에 정리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모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고는 그 종이를 보여드렸다. 내가 그때까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모아놓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고, 학비와 생활비는 이 정도가 드는데 학비를 지원해주시면 생활비 일체는 현지에서 아르바이트로 충당하고, 1년 반 뒤에는 일본어 능력 자격증 JLPT 1급을 따서 오겠다는 계획을 말씀드렸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엄마는 어떻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서 이렇게 준비했냐고 서운해하시기도 하고 걱정을 하셨다. 그리고 과묵하신 아빠는 표를 한참 묵묵히 바라보시고는 "지은이 네가 이렇게까지 준비했으니 한번 해봐라. 아빠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은 해주마."라고 하셨다. (언제나 나를 믿어주고 지켜봐주시는 부모님께 감사드린다.)그렇게 해서 나는 첫 해외생활을 도쿄에서 시작하게 되었고 내 세계관이 크게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료고쿠에서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스모선수들 © MATCHA, Inc.

2007년 7월, 스모 경기장과 연습장이 모여있는 조용한 동네 료고쿠에 보금자리를 얻은 나는 카메이도에 있는 어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맨션 바로 옆 건물은 스모선수들의 숙소였는데 아침이면 거대한 몸을 유카타로 아슬아슬하게 가린 선수들이 아침 훈련을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맨션의 관리인 아저씨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드라마 대장금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처음엔 "챵구미"라고 해서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다), 스모에 관한 책을 빌려주기도 하고, 중고 자전거를 구해다 주기도 하는 등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줬었다. 료고쿠는 조용한 주택가가 대부분으로 조용하고 고즈넉한 동네였고, 전철 소부센으로 한 정거장 거리인 학교가 있던 카메이도 또한 소박한 동네였는데 개인적으로는 시끄러운 번화가를 좋아하지 않고 현지인들이 많은 곳을 좋아해서 두 곳 모두 마음에 쏙 드는 지역이었다.

학교 외관 © 수림 일본어학교

내가 다닌 어학교는 수림외어전문학교라는 전문학교의 부설 어학교로 이곳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다시 전문 통번역 공부를 하러 전문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코스였다. 그래서 일반 어학원보다는 더 커리큘럼이 체계적이고 선생님들의 수준도 높다는 평을 들었는데 실제로도 만족하면서 다녔다. (처음에 나는 1년 반 과정으로 등록을 했었는데 일본 생활이 너무 좋았고 좀 더 공부에 욕심이 생겨 결론적으로는 2년 반 과정을 수료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한국어로 일본어를 배우는 것과 일본어로 일본어를 배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답답해도 내가 아는 단어와 표현을 총동원해서 질문을 하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로 어떻게 서든 설명을 해주시는 선생님의 노력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에는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점점 확장된다는 것을 느꼈다. 수업시간은 오전 9시에서 12시까지, 겨우 세 시간뿐이었지만 수업이 끝난 후 상점에서 만나는 점원들, 맨션 관리인 아저씨와의 대화, 운 좋게 한 달도 되지 않아 구한 아르바이트에서 일본어를 계속 사용하다 보니 내 일본어 실력은 자연스럽게 빠른 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2년 반의 유학생활을 함께 한 아르바이트 장소, 칸베

나는 부모님에게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서 쓰겠다고 약속하기도 했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본어를 빨리 늘리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가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전단지에서 오픈 멤버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는데, 그 전화를 걸기까지 엄청나게 떨리는 마음으로 멘트를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도 이력서를 가지고 와보라는 답을 듣고 신바시에 있는 교자 나베 집(만두전골 같은 메뉴)인 칸베라는 가게를 찾아갔다.


신바시는 긴자에서 한 정거장 거리로 직장인들이 퇴근 후 많이 찾는 지역으로 이자카야, 서서 먹는 우동집, 오래된 맛집 등 흔히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동네로 잘 알려져 있다. (신주쿠나 하라주쿠처럼 젊은이들이 많은 지역이 더 낫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외국인 아르바이트생으로서는 깐깐한 젊은이들보다 어지간한 실수는 웃어 넘겨주는 아저씨 손님들이 많은 신바시가 훨씬 더 편하다!) 운 좋게도 오픈 멤버를 찾고 있던 가게라 바로 일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오케이였고, 그다음 주부터 출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가게에서 나는 2년 반의 유학생활을 함께 하며 너무나도 많은 추억을 쌓았다. 일본어 실력이 는 것은 물론이며, 당시 원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시급 덕분에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행 경비도 마련할 수 있었다. 일본 전국 곳곳을 여행했고, 내가 번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며 산다는 것의 희열을 느꼈다. (이때 경제적 자유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것 같다)


20대 초반, 도쿄에서 보낸 2년 반 동안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기였던 것 같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그중에서도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친구들을 만난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나처럼 대구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들이 아닌 전혀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만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공부였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해서 취업준비를 하고, 대기업에 들어가고,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갖는 - 어떤 정해진 루트가 있는 삶이 아닌 정말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대구에서, 혹은 학교에서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라는 이유에는 납득하지 못하고, 남들처럼 그저 룰을 따르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걸까라며 고민했던 것들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때 다짐했다.


나는 더이상 좁은 우물안에서 답답해 하지 않겠다. 이렇게 세상은 넓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 사는 동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성장하겠다. 라고.


그렇게 그 다짐은 내 인생의 나침판이 되었고, 도쿄에서의 경험은 어디에 가서라도 얼마든지 혼자서 잘 적응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리고 몇년 후 생각지 못했던 싱가포르라는 나라에서의 새로운 기회로 연결 되었다.



keyword
이전 01화프롤로그: 누가 뭐래도 한 번뿐인 내 인생이니까